84화
아델이 찾아왔다고?
편지를 보낸 것도 아니고 직접 황궁에?
“정말 아델 레오폴드가 찾아왔단 말이냐?”
믿을 수 없는 소식에 황후가 놀라며 되묻자 시녀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애가 도대체 왜…….”
“만나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후 폐하.”
몹시 당황하는 황후에게 프라시스 후작이 말했다.
“여기까지 직접 온 걸 보면 보통 이유는 아닌 것 같으니 일단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토끼든 여우든 잡으려면 일단 만나야 하는 법이니까.
황후는 약간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돈하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해라.”
* * *
“어서 오세요, 레오폴드 영애.”
황후는 이전에 봤던 것처럼 우아하게 웃으며 날 반겼다.
그러나 흔히 마음의 창이라고 불리는 눈동자에는 의심과 경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전에는 눈동자에도 속마음이 보이지 않게 잘 숨기더니.
그만큼 그녀가 초조하다는 의미이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고귀하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프라시스 후작 각하께서도 계셨군요.”
“오랜만이군, 영애.”
덩달아 그녀의 뒤에 있는 후작에게도 인사하자 프라시스 후작이 무뚝뚝하게 인사를 받아 주고 황후에게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프라시스 후작이 눈치 있게 빠지고, 나는 황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시녀가 차와 다과를 새로 세팅하고 나가자마자 황후가 몹시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4황자의 일은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범인을 잡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났겠군요.”
“네. 저도 제 손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황후 폐하.”
내가 부르자 황후가 바짝 긴장하는 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통해 보였다.
“그 범인이 황후 폐하가 시킨 일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헛소리입니다.”
황후는 딱 잘라 부정했다.
“애초에 나는 황제 폐하께서 4황자에게 약을 준 일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겠습니까?”
나는 살포시 웃었다.
“모르셨군요.”
“네.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
“전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요.”
법원에 코비 알슈타인을 넘길 때조차 ‘그가 4황자에게 독을 먹였다.’라고만 말했을 뿐, 자세한 정황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 점을 지적하자 황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길래 말을 뱉기 전에는 생각을 잘했어야지.
뭐, 그렇게 말하도록 내가 찌르긴 했지만.
생을 거듭하면서 능구렁이 같은 황제를 계속 상대하다 보니 황후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건 쉬웠다.
나는 찻잔에 담긴 차를 내려다봤다. 우연하게도 차의 색이 붉은색이었다.
나는 찻잔을 황후 쪽으로 밀며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선 진심으로 페르데스 님의 몸이 걱정돼서 약을 지어 주신 거랍니다.”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아기를 가지려면 몸이 튼튼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 약에 황후 폐하께서 몹쓸 짓을 하셨으니…… 황제 폐하께서 이 소식을 아시면 어떻게 될까요?”
“…….”
“정말 궁금하네요. 여기까지 온 김에 뵈러 가야겠습니다.”
“원하는 게!”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황후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것이요?”
“그래요. 원하는 것.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까!”
“아, 그럼요. 당연히 원하는 게 있으니 왔죠.”
나는 반쯤 뗐던 엉덩이를 다시 소파에 붙이고 황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제가 요청할 때 황제 폐하께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황후 폐하께서 깽판을 쳐 주세요.”
“……깽판?”
아, 내가 너무 천박하게 말했나?
하지만 이것 말고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후가 헛웃음을 지었다.
“요컨대 내가 폐하의 눈을 가리고 있으면, 그사이에 딴짓을 하겠다는 거군요.”
“들어주시겠습니까?”
황후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다물어졌다.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이득일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께 폐가 갈 만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
“……그 말을 어떻게 믿죠?”
“글쎄요. 제 입장에선 믿어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여기서 황후를 설득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오히려 역효과였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황후의 마음을 더 흔들 수 있을 테니 나는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그녀를 바라보는 건 조금 고역이었다.
그녀가 페르데스에게 독을 먹였다는 사실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커지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할 것 같아 꾹꾹 누르고 있는데, 드디어 결정을 내린 건지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영애의 부친인 레오폴드 공작이 황태자의 목숨을 구해 준 일도 있고 하니, 영애의 부탁을 들어주지요.”
끝까지 페르데스에게 독을 먹인 사실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네.
황후가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마주하니 몹시 짜증이 났다.
억지로 눌렀던 화가 목구멍까지 차오르자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참자.
더 큰 일을 위해 지금은 참는 거야.
“그래서 언제 그……걸 해 주면 되는 거죠?”
황후의 고상한 체면상 깽판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모습이 조금 웃겼다.
“다음 주에 해 주시면 됩니다. 최소 2주 정도는 황제의 눈을 붙잡을 수 있게 깽판을 쳐 주세요.”
“2주씩이 나요?”
황후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기색이 스쳐 갔다.
확실히 2주나 황제의 눈을 붙잡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지.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막스 상단과 퓨라 거래를 다시 하겠습니다.”
“……!”
내 말에 황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의심이 이렇게 많아서야.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론 웃으며 다시 물었다.
“해 주실 거죠?”
“……좋아요.”
황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각서를 쓰도록 하죠.”
“그러죠.”
나 역시 황후가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지 못하게 각서를 받아 두려고 했는데, 먼저 말해 주니 흔쾌히 받아들였다.
* * *
황후의 인장이 찍힌 각서를 품에 잘 챙겨 넣고, 황후궁을 나서는데 눈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페르데스 님.”
페르데스였다.
그 뒤에 알도르 경과 에런 경도 있었다.
알도르 경은 내 호위를 해야 하니 그렇다 쳐도 페르데스와는 같이 오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독을 먹었으니까.
주치의가 만든 해독제를 먹고 좋아졌다곤 하나, 요양이 필요했다.
그러나 페르데스가 같이 가겠다고, 혼자서는 절대 못 보낸다며 만약 가려면 그를 지르밟고 가라고 드러눕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오게 됐다.
페르데스는 은색으로 번쩍거리는 황후궁을 슬쩍 보곤 내게 물었다.
“잘 해결됐어?”
“네.”
나는 웃으며 각서를 넣어 둔 품을 두드렸다.
내 행동에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본 페르데스가 웃었다.
“잘됐네.”
“그렇죠.”
“이게 확실히 영애가 기존에 생각했던 방법보단 낫지?”
“그러게요.”
내심 내가 그 계획을 실행하려고 할 때, 황제가 눈치채고 막으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페르데스가 좋은 방법을 알려 준 덕분에 황후를 방패로 내세울 수 있게 됐다.
아니, 이건 황후에게 감사해야 하나.
그녀가 쓸데없는 짓을 한 탓에 일어난 거니까.
……그렇다고 페르데스에게 독을 먹인 건 용서할 수 없지만.
“볼일이 끝났으니, 이만 나갈까요?”
황궁에는 1분 1초라도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페르데스도 같은 생각인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차를 타러 가려는데, 우리가 타고 온 마차 옆에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체르노서였다.
유학 간다더니 아직 안 간 건가.
그를 본 페르데스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냥 걸어가죠.”
어차피 저 마차는 황실 소유로, 넓은 황궁을 좀 더 빨리 이동하려고 타고 온 거였다.
그러니 두고 가도 전혀 상관없었다.
뭐, 머나먼 황궁 입구까지 두 발로 걸어가야 한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체르노서를 만나는 것보단 열 배, 아니 백 배 나았다.
페르데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돌아섰다.
나 역시 돌아서서 가려는데.
“뭐야. 역시 반푼이가 타고 온 거네? 레오폴드 영애도 있고.”
체르노서가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쩜 이리도 재수가 없는지.
무시하고 가고 싶었으나, 그러는 건 황족 모독죄로 몰릴 수 있으므로 돌아서려고 했다.
“돌아보지 마.”
그런데 페르데스가 내가 돌아보지 못하게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상대할 필요 없어. 무시해.”
“하지만 황자인데…….”
“나도 황자야.”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괜찮아.”
황태자라면 모를까, 황자끼리는 서열을 매기지 않았다.
모친이 가진 권력이나 외가, 그리고 황제의 총애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공식적으론 같은 서열이었다.
그러니 페르데스가 체르노서를 무시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내가 무시한 것도 페르데스가 그러라고 했다면 그만이었고.
체르노서를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페르데스가 이렇게 황자 직위를 이용한다는 게 놀라웠다.
예전엔 황자 직위를 티끌만큼도 사용하지 못했는데.
나는 곁눈질로 흘끗,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야이, 거기 안 서? 반푼이 주제에 감히 날 무시해?!”
뒤에서 체르노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했지만, 페르데스는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올곧이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 모습이 낯설어서.
내가 아는 페르데스가 아닌 것 같아서.
“…….”
페르데스가 날 쳐다봤을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