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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261/262)

83화

페르데스가 독을 먹게 된 건 따지고 보면 내 탓도 있으니, 죄책감에 나는 그가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메이와 잭, 그리고 알도르 경은 그들이 대신 곁을 지키고 있다가 페르데스가 깨어나면 말해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내 얼굴을 봤으면 했으니까.

그가 깨어나는 모습을 볼 때까진 편히 잘 수도 없을 것 같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새벽의 여명이 거의 사라질 무렵, 페르데스가 눈을 떴다.

“깼어요?”

반색하며 부르자 페르데스가 눈동자만 돌려 날 쳐다봤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황족의 상징으로, 황제도 같은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황금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칠 때마다 순간 섬뜩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반가운 마음만 들었다.

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오래 잠들어 있다가 정신이 든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페르데스는 멍하니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런 페르데스의 손을 꼭 잡으며 이것저것 물었다.

“어디 아픈 곳 없어요?”

“…….”

“목이 마르진 않아요?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요. 다 가져다줄 테니.”

“……왜.”

메마른 입술에서 나온 목소리는 가뭄이 지독하게 든 땅처럼 갈라져 있었다.

페르데스도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는지,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고래 싸움에 상어 등이 터진 거예요.”

새우라고 표현하면 페르데스가 너무 초라해 보여서, 상어라고 바꿨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페르데스가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게 아니라 못 알아들은 거구나.

하긴 한 번에 알아듣기엔 어려운 말이긴 하지.

“어떻게 된 거냐면요…….”

당사자인 페르데스도 자초지종을 알아야 하니, 나는 처음부터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전에 체르노서가 페르데스의 뺨을 때린 일로 퓨라 거래를 끊은 것부터 시작해서 코비의 일까지 전부.

내 이야기를 들은 페르데스의 얼굴이 부서진 과자처럼 구겨졌다.

당연히 화가 나겠지. 독을 먹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반드시 복수할 테니까.”

“……복수?”

“네. 황후가 두 번 다시 페르데스 님을 건드리지 못하게, 두 다리까지 잘라 버릴 생각이에요.”

페르데스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복수할지 미리 다 생각해 두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페르데스는 허공을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말했다.

“……안 했으면 좋겠어.”

“네?”

“황후한테…… 복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좋다고, 꼭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하면 말했지, 말릴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약간 놀라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부스스, 무거운 상체를 일으킨 페르데스가 조금 높아진 눈높이에서 진지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재차 말했다.

“복수하지 마.”

혹시 빈말인가, 아니면 장난치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내가 황후에게 복수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왜죠?”

목 안쪽이 누군가 긁은 것처럼 가려웠다.

“왜 황후에게 복수하지 말라는 거죠? 혹시 내가 질까 봐 그래요?”

“아니.”

“그럼 어째서 말리는 건데요?”

“황후에게 복수하기 위해 막스 상단의 채권을 모조리 사서 빚 독촉을 할 생각이지?”

그걸 어떻게…….

내 계획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질문에 당황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페르데스의 말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재정이 어려운 막스 상단은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파산할 테고, 그럼 황후는 큰 타격을 입겠지.”

“……그걸 잘 아시면서 왜 하지 말라는 거죠?”

“그러면 황후뿐만 아니라 영애도 큰 타격을 입을 테니까.”

이번에도 정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산한 상단의 채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휴짓조각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막스 상단이 망하면 나 역시 막대한 금전적인 손실을 보게 된다.

적어도 퓨라 3년 치 수익을 날리게 되겠지.

그걸 알면서도 진행하려고 했던 건, 돈보다 황후에게 복수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돈은 다시 벌면 돼요.”

“그렇다고 잃은 돈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지.”

페르데스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영애가 복수하고 싶은 상대는 황후가 아닌 황제잖아.”

“…….”

“그러니 쓸데없이 황후와 신경전을 벌이지 마. 어차피 황제가 무너지면 황후도 무너질 테니 그것만 신경 써.”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지만…….

“……황후가 한 짓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꽉 쥔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가 가만히 있으면 황후는 절 우습게 보고 이보다 더한 짓을 하려고 할 거예요.”

“난 복수하지 말라고 했지, 가만히 있으라고는 안 했어.”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물었다.

“영애가 황제한테 복수하기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뭐지?”

가장 필요한 거?

그건…….

“시간이요.”

공작위라는 복수의 초석을 세우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초석만 단단하게 세우면 다른 건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럼 그 시간을 버는 데 황후를 이용하는 건 어때?”

“……!”

“적은 적으로 상대하라는 말도 있잖아.”

그러게. 왜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까.

체르노서를 상대하기 위해 외숙부, 겔르안을 이용했으면서!

페르데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막스 상단을 무너뜨리는 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방법이 떠올랐나 보네.”

“네.”

“다행이…….”

순간 페르데스의 몸이 흔들리더니 내 쪽으로 맥없이 기울어졌다.

“페르데스 님!”

나는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를 부축했다.

그제야 그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 주치의를……!”

그 사실을 안 내가 주치의를 부르려고 하자, 페르데스가 내 팔을 잡았다.

“됐어.”

“됐긴요! 온몸이 불덩이인데요!”

“해독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물어보려다 말을 삼켰다.

5황자가 페르데스에게 이것저것 먹였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 그중에 독도 있었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치의를 불러올게요.”

“됐다니까.”

“하지만…….”

“그렇게 걱정되면 내 머리나 쓰다듬어 줘. 그럼 나을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걸로 열이 내려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어서 해 줘.”

너무 애타게 내가 그렇게 해 주길 바라고 있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황후 폐하, 제발 제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코비 알슈타인이 페르데스에게 독을 먹인 죄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알슈타인 자작은 버선발로 황후에게 달려가 간곡히 빌었다.

“제 아들은 황후 폐하의 명령을 따른 죄밖에 없습니다!”

“말조심하세요, 알슈타인 자작.”

몹시 다급하고 애절한 알슈타인 자작과 달리 황후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며 말했다.

“누가 들으면 그대의 아들이 정말로 내 명령을 받아 움직인 줄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슈타인 자작은 직감했다.

황후가 제 아들을 구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이대로 코비 알슈타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거라는 걸!

“어, 어떻게 그런…….”

꿈에도 생각지 못한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알슈타인 자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제 아들은 황후 폐하께 충성을 다 했는데 어떻게…….”

“이런.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요, 자작.”

황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우아하게 웃었다.

“만약 그대의 아들이 내게 충성을 다했다면, 어떤 경우에서라도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겠지요.”

“……!”

“아들 일은 정말 유감이군요. 알슈타인 자작, 그대 역시.”

황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알슈타인 자작을 내친 뒤, 제 아비인 프라시스 후작을 불렀다.

프라시스 후작도 이 소식을 듣고 황후가 부르길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바로 달려왔다.

여유가 넘쳤던 황후의 표정은 아비를 보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황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후작을 다그쳤다.

“일 처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리도 쉽게 들킨단 말입니까?”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황후 폐하.”

프라시스 후작은 제 딸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죄했다.

“코비 알슈타인이 멍청하게도 에토스를 아델 레오폴드의 개인 정원에 숨길 줄은 몰랐습니다.”

코비가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에토스를 불태우거나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할 만한 장소에 숨겨야 하는데, 레오폴드 공작가는 기사들이 빈틈없이 경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에토스를 들고 나가자니, 공작저에서 나가는 물건을 동전 하나까지 꼼꼼하게 확인해서 적어 두는 터라 불가능했다.

이에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코비가 떠올린 장소가 바로 아델의 개인 정원이었다.

개인 정원은 아델의 사적인 공간이라 경비를 보는 기사들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곳에 몰래 들어가 에토스를 파묻었는데, 하필 그 장면을 아델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공개 재판은 없어야 합니다.”

황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황족 살인 미수는 당장 참수해도 문제가 없는 중죄니, 오래 끌지 말고 바로 처벌하라고 하세요.”

“네, 황후 폐하.”

이러면 코비 알슈타인의 일은 해결됐고.

‘그 여자는 어떡하지?’

아델 레오폴드. 그 여자가 자신이 배후에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게 몹시 찝찝했다.

물론 증거는 없으니 자신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지만, 대신 다른 걸로 복수하려고 할 것이다.

퓨라 거래를 끊고, 마법사의 탑과의 거래마저 끊기게 했던 것처럼.

그걸 막기 위해선 아델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

“막스 상단의 채권을 가진 귀족들을 소집하세요. 그리고…….”

황후가 쓸 만한 수를 계산하며 부친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는데,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황후 폐하, 아델 레오폴드 영애가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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