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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78/262)

82화

“네, 네?”

갑작스러운 아델의 말에 코비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아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 설마 내가 너한테 독이라도 줬을까 봐?”

……네. 독을 줬죠.

코비는 입 안에 굴러다니는 말을 삼켰다.

저 약의 정체가 뭔지 모른다고 했는데, 그 사실을 말하는 건 제 무덤을 파는 짓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코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자, 아델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건 독이 아니라 보약이니까.”

“…….”

“그러니까 마시렴.”

어떡하지. 마셔야 하는 건가?

코비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마시기로 했다.

그것 말고 그녀의 의심을 피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코비는 지스에게 아델이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일이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아델의 행동을 봤을 땐 심증은 있는 것 같았지만, 심증만으로는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쫓겨나기는 하겠네.’

어렵게 지스의 제자가 됐는데 쫓겨나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상관없었다.

다른 곳에 들어가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마시겠습니다.”

쫓겨나는 걸로 끝내려면 자신이 범인이라는 티를 최대한 내지 않아야 하니 코비는 약을 마시기로 했다.

어차피 해독제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저 안에 든 독은 한 번 마신다고 이상이 생기지 않았다.

일단 약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서 해독제를 바로 먹어야지.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코비는 시원하게 약을 들이켰다.

“아.”

그런 코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혹시 그거 알아, 코비?”

약병을 말끔하게 비운 코비가 입술에 남은 잔해를 닦아 내며, 아델을 쳐다봤다.

아델이 싸늘한 눈으로 코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안에 ‘판타시아’가 들어 있다는 거.”

“……!”

판타시아.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지만, 독초와 섞으면 독의 효력을 증폭시켜 줬다.

개미 새끼 하나도 죽이지 못할 만큼 약한 독도 판타시아를 섞으면 효력이 몇 배로 증가해서 코끼리도 거뜬히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안에 판타시아가 들어 있다고?

그러고 보니 약만 마셨을 뿐인데, 아까보다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커, 커컥.”

그 사실을 자각한 코비는 가슴을 움켜쥐며 상체를 숙였다.

점점 숨을 쉬기가 버거워지고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어서 빨리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죽을 거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면서 그 생각이 가득 채워졌다. 제 방 서랍에 있는 해독제가 간절했다.

코비는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겨우 움직이며 방을 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덜커덩-

“!”

문이 바깥에서부터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열고자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두꺼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어 줘!”

쾅쾅-

코비가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열어 달란 말이야! 해독제를 먹어야 해! 지금 당장……!”

“해독제라.”

순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코비는 그를 꿰뚫어 볼 것 같은 싸늘한 눈동자와 마주하고 그대로 굳었다.

아델이 다리를 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난 분명 보약이라고 말했는데, 왜 해독제를 찾는 거지?”

코비의 둥그스름한 얼굴선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코비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그, 그게, 제, 제가 판타시아 알레르기가 있어서…….”

아델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판타시아 알레르기라. 처음 듣는데?”

그렇겠지. 그런 알레르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 아주 특수한 알레르기라 아가씨께서 모르실 만합니다.”

하지만 살려면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아델은 약사나 의원이 아니라 잘 모를 테니까.

“이, 이 알레르기는 무척 위험해서 어서 약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전 죽습니다.”

마라톤을 하고 난 후처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이대로 있다간 심장이 뻥, 터져서 죽을 것 같아 코비는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니 제발 해독제를 먹게 해 주세요, 아가씨.”

“호오, 해독제가 있어?”

“네, 네. 제 방에 있습니다!”

“그렇군.”

아델은 웃으며 일어서더니 침대 옆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열렸다.

벌떡 일어선 코비는 나가려고 했지만.

콰직-

“컥!”

나가긴커녕 문을 열고 들어온 알도르에게 붙잡혀 벽에 머리를 박게 됐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두개골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메이.”

아델은 그런 코비를 쳐다보지도 않고, 알도르의 뒤에 서 있는 메이를 불렀다.

“네, 아가씨! 당장 해독제를 찾아서 의원님에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밖에서 알도르와 함께 그들의 대화 내용을 전부 들은 메이가 코비의 방 쪽으로 달려갔다.

타다닥, 복도로부터 전해지는 달음박질 소리가 사라진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컥, 커억-.”

그 와중에 코비는 당장 죽을 것처럼 숨을 껄떡거렸다.

그 모습을 본 아델이 작게 조소하며 말했다.

“네가 마신 약에 판타시아가 들어 있다는 거, 거짓말이야.”

“……네?”

“거짓말이라고. 그런 거 안 들었어. 대신 심장을 빨리 뛰게 해 주는 약이 들어 있지.”

또 침묵이 흘렀다.

반 박자 늦게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코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코비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알도르가 그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알도르 경. 그를 놔줘요.”

아델의 명령에 알도르가 코비를 놔주고 뒤로 물러났다.

다리에 힘이 풀린 코비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앞으로 다가간 아델이 코비가 비운 약병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물었다.

“다시 묻지, 코비 알슈타인. 이 안에 든 게 뭔지 알고 있나?”

아까와 달리 코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에 아델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순간.

“……!”

알도르가 검을 코비의 가랑이 사이에 꽂았다.

검이 조금만 더 위에 꽂혔다면, 소중한 부위가 날아갈 뻔했다는 사실에 코비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발발 떨렸다.

“알슈타인 자작에게 자식이라곤 너 하나밖에 없지.”

더 소름이 돋는 건, 아델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하다는 거였다.

“그런데 네가 불구가 된다면 알슈타인 자작이 얼마나 슬퍼할까.”

마치 진심으로 코비를 걱정한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묻겠다, 코비 알슈타인.”

알도르가 검 손잡이를 쥐었다.

그륵, 바닥이 긁히면서 날카로운 날이 점차 위로 올라왔다.

“이 약병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소중한 부위에 날카로운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화, 황후 폐하께서 시키셨습니다! 그 약에, 페르데스 황자 전하께서 드실 약에 독을 타라고 말이죠!”

코비는 혼비백산하며 알고 있는 걸 전부 다 불었다.

* * *

코비를 추궁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황후가 이번 일의 배후라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코비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체스로 따지면 언제 버려도 상관없는 폰이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코비는 모든 걸 실토한 뒤에는 살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시끄럽네.

내가 곁눈질로 코비를 흘겨보자, 알도르 경이 코비의 목덜미를 내리쳐서 그를 기절시켰다.

그리고 코비가 토끼라도 되는 양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적당한 곳에 치워 둬요. 나중에 써먹어야 할지도 모르니.”

“네, 아가씨.”

코비의 뒤처리는 알도르 경에게 맡기고, 페르데스의 침실로 향했다.

그의 침실에는 잭과 메이, 그리고 주치의가 있었다.

나는 잭과 메이를 내보내고, 주치의에게 물었다.

“페르데스 님의 상태는?”

“해독제를 드신 덕분에 훨씬 나아지셨습니다. 이 상태라면 몇 시간 내로 깨어나실 겁니다.”

“그래요?”

다행이다. 나는 가슴 깊이 안도하며 페르데스를 내려다봤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혈색이 좋아 보였다.

숨을 쉬는 것도 한결 편해 보였고.

“저, 아가씨…….”

주치의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불렀다.

코비 알슈타인이 정말 범인이 맞냐고 물어보고 싶은 거겠지.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치의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는 안경을 벗고, 눈을 지그시 누르며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다시 물었다.

“이제…… 코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요. 제가 대법관이 아니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죽지 않을까요?”

페르데스는 황자였으니까.

감히 황자에게 독을 먹였으니, 코비는 물론 그의 부친과 직계 가족들은 전부 죽게 될 것이다.

내 대답을 들은 주치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코비가 아무리 배신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끼던 조수인 만큼, 그가 죽는 게 안타까운 모양이다.

하지만 내게 코비를 살려 달라던가, 죄를 감해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를 테니 이만 가 보세요, 박사.”

“……네.”

주치의까지 물린 후, 나는 침대맡에 앉아 황후를 떠올렸다.

코비는 황후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말해 주지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퓨라 때문이겠지.’

내가 양팔을 자르는 바람에 막스 상단의 재정은 상당히 힘들었다.

그동안 벌어 둔 돈과 자잘하게 벌여 둔 사업으로 겨우 버티고 있지만, 주 사업인 마법 도구 장사를 못 하게 됐으니 조만간 파산하게 될 것이다.

막스 상단이 무너지면, 자금줄이 끊기게 되니 프라시스 후작가는 물론 황후와 황태자에게도 타격이 갔다.

귀족들을 섭외하는 데는 돈이 많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황후는 이런 강수를 둔 것이다.

만약 내가 코비 알슈타인이 범인이라는 걸 밝혀내지 못했다면.

그래서 코비 알슈타인이 말린 에토스를 숨기는 데 성공했다면, 나는 막스 상단, 정확히는 프라시스 후작가에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에토스는 프라시스 영지에서만 나는 특산물이었으니까.

그게 없으면 해독제를 만들지 못하니, 황후는 그걸 이용해서 다시 퓨라 거래를 하려고 한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후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봤다.

황후와는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다.

황제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어차피 황후는 황태자가 죽으면 알아서 무너질 테니 양팔을 자르는 걸 끝으로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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