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달칵-
상자가 열리는 소리가 어두운 정원에 크게 울려 퍼졌다.
“윽.”
이게 무슨 냄새지?
상자를 열자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인상을 팍 쓰며 코를 틀어막았다.
상자 안에는 종이에 쌓인 무언가가 있었다.
저게 냄새의 근원지인 것 같은데…….
건드리기 싫었지만, 정체를 확인해야 하니 검지와 엄지 끝으로 종이를 살짝 잡고 들어 올렸다.
종이 안에는 정체불명의 말린 꽃이 들어 있었다. 양이 제법 많았다.
보아하니 약재인 것 같은데 이런 걸 왜…….
……설마?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는 상자를 챙겨 들고 주치의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분명 있었는데 어디 갔지?”
주치의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약재 서랍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다급한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모양이다.
“뭘 찾고 있는 거예요, 박사?”
“아, 아가씨.”
그제야 내가 온 걸 알아챈 주치의가 날 돌아봤다.
“페르데스 님의 해독제를 만들 재료를 찾고 있었습니다.”
“도와줄게요.”
그런 거라면 하던 일을 다 뒤로하고서라도 도와주는 게 맞았다.
내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려고 하자, 주치의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 도움이 필요하면 그땐 조수들을 부르면 되니, 아가씨께서 굳이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치의에겐 의술을 배울 겸 그의 일을 도와주는 조수가 3명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전에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의 본 적이 없어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이름이 기억날 리가 없지.
하여간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조수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조수들은 어디 간 건가요?”
“전부 산에 약초를 캐러 갔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산에 갔다고요? 위험하지 않나요?”
“밤에만 나오는 약초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보냈습니다.”
주치의는 최대한 안전하게 보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말을 덧붙였다.
“아가씨께선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페르데스 님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지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해독제를 언제쯤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 그리고…….”
나는 땅에서 파낸 상자를 주치의에게 내밀었다.
흙이 잔뜩 묻어 있는 상자를 가져간 주치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엇입니까, 아가씨?”
“열어 보세요.”
상자를 열어 본 주치의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역시 내가 생각한 게 맞는 모양이네.
“그 약재, 페르데스 님의 해독제를 만드는 데 쓰이는 거, 맞죠?”
주치의는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격하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이게 통째로 사라져서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내가 오기 전까지 약재 서랍을 뒤지고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이걸 왜 아가씨께서 들고 계시는 겁니까?”
“누가 내 개인 정원에 파묻는 걸 보고 가지고 온 거예요.”
“예에?”
주치의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했단 말입니까!”
“글쎄요.”
아까까지만 해도 범인이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주치의와 대화를 하다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주치의의 조수들.
그중에 내 개인 정원에 저 상자를 묻은 범인이 있는 게 확실했다.
“호, 혹시 제 조수 중에 범인이……?”
주치의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물었다.
“제자들은 전부 같은 산에 올라간 건가요?”
“아니요. 전부 다른 산에 갔습니다.”
그럼 3명 다 알리바이가 없다는 거네.
이 야심한 시각에 산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을 리는 없을 테니까.
알리바이가 없어도 범인을 찾는 건 쉬웠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범인을 봤으니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곤 범인이 아니라고 발뺌을 할 가능성이 크니,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조수들은 언제쯤 돌아오나요?”
“지금 나간 지 약 3시간 정도 됐으니, 아마 2시간 내외로 다 돌아올 겁니다.”
“그럼 박사는 조수들이 돌아오면 그 약재를 찾지 못한 척, 연기하면서 조수들을 추궁해 주세요. 그리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나는 주치의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 * *
“다녀왔습니다.”
“저도 다녀왔습니다.”
약 2시간 뒤, 약초를 캐러 갔던 조수들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수고했다.”
주치의, 지스는 아델이 시키는 대로 화가 난 척 연기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조수 중 자신을 배신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실제로 화가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지스의 표정은 누가 봐도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조수들은 어리둥절하며 지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중 조수 경력이 가장 오래된 어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스승님?”
지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에토스를 말려 둔 게 전부 사라졌다.”
“네?”
“정말인가요, 스승님?”
지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수들은 깜짝 놀라며 웅성거렸다.
“헉, 그게 없으면 해독제를 못 만들잖아요.”
“당장 약재상에게 연락해 볼까요?”
“바보야. 지금 시간에 약재상이 문을 열었을 리가 없잖아.”
“아, 그렇네.”
지스는 말없이 조수들이 떠드는 걸 듣다가 물었다.
“난 너희들 중에 누군가 에토스를 숨겼다고 생각하는데, 너희들의 생각은 어떻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연구실이 조용해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합죽이가 된 조수들은 눈을 크게 깜빡이며 지스를 쳐다봤다.
지스는 그런 조수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전부 놀라면서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표정만 보곤 누가 범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됩니다.”
무거운 침묵을 깬 건, 이번에도 어셔였다.
“저희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조수, 브로디가 맞장구를 쳤다.
“저희가 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겠습니까?”
마지막 조수, 코비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들의 말에 동의했다.
“정말로 너희들이 한 짓은 아니라는 게냐?”
“물론입니다.”
“저희는 결백합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손을 좀 보자꾸나.”
지스의 요구에 조수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약초를 캘 땐, 웬만해선 호미 같은 장비를 쓰지 않았다. 날카로운 장비 날에 약초가 상하기라도 하면 효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으로 직접 캐다 보니, 약초를 캐고 나면 손이 흙투성이가 됐다.
손에 묻은 흙은 물로 씻으면 간단하게 지워졌지만, 손톱 안에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꼼꼼하게 손을 씻어도 손톱 사이에 낀 흔적을 지우는 건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몇 번을 씻어야 겨우 사라졌다.
그 증거로 어셔와 브로디의 손톱 안에는 흙을 판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코비의 손톱에는 흙을 판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서 밑창을 내게 보여 주거라.”
그걸 확인한 지스는 다른 걸 명령했다.
산을 탈 때는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밑창에 촘촘한 틈을 낸 특별한 신발을 신었다.
그렇다 보니 산에 타면 틈 사이로 이것저것 이물질이 끼기 마련인데, 이번에도 코비의 밑창은 깨끗했다.
그 모든 걸 확인한 지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크게 마른세수를 한 뒤, 코비를 쳐다봤다.
코비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로 지스를 보고 있었다.
조수 중에서 가장 늦게 들어온 막내였지만, 실력이 괜찮아서 나름 아꼈던 조수였고, 제자였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배신할 줄이야. 믿고 아꼈던 만큼 배신감이 컸다.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자신이 아닌 아델의 역할이었다.
“……코비, 아가씨께서 찾으시니 가 보거라.”
코비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스는 무시하고 돌아섰다.
* * *
지스가 조수들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조수들의 정보가 담긴 서류를 읽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서류만 읽었을 뿐인데 범인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주치의의 마지막 제자 코비 알슈타인.
그의 부친인 알슈타인 자작은 황후의 친가인 프라시스 후작가의 가신으로 막스 상단의 분점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알 만하네.”
굳이 코비를 추궁하지 않아도, 그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 것 같았지만,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그래야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린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수 있을 테니까.
문득 파리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페르데스가 떠올라 속이 발칵 뒤집혔다.
당장 주치의 연구실로 달려가 코비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똑똑-
인내심이 거의 한계에 도달했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갈색 머리에 어수룩한 얼굴.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가씨.”
허락 없이 내 개인 정원에 들어가 상자를 묻었던 범인이 확실했다.
“이름이?”
“코비 알슈타인이라고 합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조수 중에 그만 이곳에 온 이유를 알 터인데, 코비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뻔뻔하게 서 있었다.
그래, 그 정도 배짱은 되어야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지.
“앉아.”
“네, 아가씨.”
코비는 내가 가리킨 소파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똑바로 앉았다.
“내가 이 늦은 시간이 왜 너를 불렀는지 알고 있니?”
“아니요. 모릅니다.”
“그럼.”
나는 상자에서 붉은 약병을 꺼내 코비에게 보여 주었다.
황제가 페르데스에게 준, 그리고 문제의 독이 든 약병이었다,
단번에 약병을 알아본 코비의 눈동자가 약간 떨렸다.
“이게 뭔지는 알고 있니?”
“……아니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코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래?”
연기도 잘하네. 의원이 아니라 배우를 해도 성공했겠어.
나는 입술을 비틀며 약병을 코비에게 내밀었다.
“그럼 전부 다 마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