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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76/262)

80화

다행히 페르데스가 먹은 독은 소량이었고, 그 정도로는 건강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었다.

대신 체력을 현저하게 저하시키고, 근육통을 일으키며, 지독한 복통과 고열 등 독감과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독 때문에 약해진 몸은 다른 병에 걸리기 쉬워졌고, 그 병 때문에 죽는 경우는 종종 있다고 알도르 경은 말했다.

혹시 알도르 경이 잘못 알아 온 것일 수도 있으니 나는 주치의에게도 약을 주며 독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이 안에 독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해독제를 만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가지고 있는 약재를 확인해 보고 없는 건 주문해야 해서 그게 시간이 좀 걸릴 뿐, 해독제 자체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당장 해독제를 만들도록 해요. 필요한 약재가 있으면 돈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사도록 해요.”

“네, 아가씨.”

“그리고 페르데스 님이 독을 먹은 건 다른 사용인들에게 무조건 비밀로 해야 해요. 그냥 최근에 무리하셔서 몸이 안 좋은 걸로만 하세요.”

“알겠습니다.”

주치의가 나가고, 페르데스와 단둘이 침실에 남은 나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침에 쓰러진 페르데스는 밤이 깊어 가는 데도 여전히 일어나지 못했다.

주치의가 생명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동시에 황제가 어째서 페르데스의 약에 독을 넣은 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했다.

페르데스가 더 이상 쓸모없는 패라고 생각해서 죽이려고 했다면, 서서히 중독시키는 게 아니라 바로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죄는 잭에게 전부 뒤집어씌웠겠지.

실제로 페르데스에게 그 약을 챙겨 준 사람은 잭이었으니, 황제의 입장에선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서서히 중독시켰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해독하기 쉬운 독을 썼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건 마치 내가 페르데스가 중독된 걸 알아채고 그에게 연락하길 바라는 것 같잖아.

“……내가 페르데스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어서, 이걸로 협박하려는 건가?”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두 번째 생에서 그랬으니까.

나는 황제가 체르노서와 결혼하라고 말하자, 알도르 경을 좋아해서 그럴 수가 없다고 핑계를 댔다.

그리고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알도르 경과 결혼을 했지.

물론 황제와 체르노서는 무던히 내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첫 번째 생에서 호되게 당한 나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는 알도르 경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보냈고.

어서 이혼하지 않으면 알도르 경을 죽일 거라며 날 협박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지만,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가장 큰 차이는 알도르 경과 달리 페르데스는 황제가 인정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그럼 황제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걸까?’

그래서 페르데스를 죽이고 다른 황자로 갈아 치우려는 건가?

그건 또 아닌 것 같은 게, 내가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서의 아이를 가진 건 그와 결혼하고 약 3년 뒤였다.

그동안 황제는 체르노서를 죽이려고 하거나, 독을 먹이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럼 황제가 범인이 아닌가?

황제가 범인이 아니라면 누구지?

머릿속이 갑자기 확 엉켜 버리면서 복잡해졌다.

이럴수록 침착하게, 하나하나씩 풀어야 했다.

그러려면 역시 황제 쪽부터 알아봐야지.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나는 곧바로 잭을 찾았다.

현재 저택 내에서 페르데스가 중독된 걸 아는 사람은 나와 주치의, 그리고 알도르 경뿐이었다.

잭도 혹시 모르니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분위기상 페르데스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챈 잭은 울상이었다.

이미 한바탕 울었던 건지 뺨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잭.”

“네, 네. 아가씨. 훌쩍. 말씀하세요.”

“황제한테 연락할 수 있을까?”

“물론이…… 네?”

슬픔에 젖어 있다가 한발 늦게 내 말을 알아들은 잭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화, 황제 폐하께 연락을 해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아, 아가씨께서 직접 황제 폐하와 대화를 나누시려고요? 그, 그럼 제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게 들키는데…….”

“나 말고.”

“네? 그럼 누가…….”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너지.”

“네, 네?”

“그래서 묻는 건데 잭, 우는 연기 잘해?”

* * *

달이 기울어진 밤.

잭이 가진 통신 반지와 연결된 반지가 반짝거렸다. 잭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의미였다.

오늘은 정기 보고 날이 아니었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는 건, 특별하게 보고할 게 있다는 의미.

혹시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건가?

그래, 약혼을 한 지 4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아기가 생길 때가 됐지.

다이몬은 제멋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연락을 받았다.

“그래, 무…….”

[폐하아아아!]

다이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편에서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폐하. 폐하아아아아.]

“무슨…….”

[엉엉엉, 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꺼이꺼이!]

잭이 서글프게 울부짖는 소리에 자꾸만 말이 씹히니 다이몬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진정하게.”

[폐하, 저는, 엉엉, 저는……!]

“진정하라고 했네!”

결국 다이몬은 착한 황제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진정이 된 건지 반대편이 조용해졌다.

후우. 다이몬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우는 걸 보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네, 네. 좋은 일이 아닙니다. 큰일 났습니다.]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하게 무슨 일인지 말해 보거라.”

[그게, 그러니까, 페르데스 님께서 폐하께서 주신 약을 또 깨뜨려 버렸습니다.]

잭이 약간 어색하게 말을 더듬었지만, 다이몬은 방금까지 통곡하느라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나저나 또 약을 깨뜨렸다고?

이전에도 한 번 깨뜨렸는데?

“고의로 그런 것인가?”

[고, 고의라니요! 절대 아닙니, 끄윽!]

잭이 갑자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다이몬은 혹시 잭이 깨뜨리고 페르데스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폐하? 새로 약을 보내 주시는 건가요?]

“아니, 됐다. 약 먹이는 건 이제 중단해라.”

지금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 보면 약이 효과가 없는 것 같고.

이런 귀찮은 연락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은 다이몬은 페르데스에게 약을 먹이는 걸 깔끔하게 중단하기로 했다.

* * *

[아니, 됐다. 약 먹이는 건 이제 중단해라.]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중단됐다. 황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끊은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퓨라가 발하는 붉은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다.

잭은 내가 아까 찌른 옆구리가 아픈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오래 잠수했다가 수면 위로 나온 사람처럼 숨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황제는 범인이 아니네.”

만약 황제가 약에 독을 탄 범인이었다면, 잭이 통곡했을 때 혹시 페르데스가 죽었냐고 물어봤어야 했다.

또, 잭이 약병을 또 깨뜨렸다고 말했을 땐 냉큼 새로 보내 주겠다고 말했겠지.

페르데스를 중독시켜서 어찌할 생각이었다면 말이야.

그런데 다이몬의 행동은 예상을 전부 빗나갔다.

즉, 그는 범인이 아니라는 의미.

그럼 누가 범인이지?

“저, 아가씨.”

고민하고 있는데 잭이 조심스럽게 날 불렀다.

“페르데스 님은 괜찮으신 거죠?”

“그래. 지금은 조금 아프지만, 곧 괜찮아질 테니 걱정하지 말렴.”

“다행이네요.”

그제야 잭은 안도하며 크게 숨을 토해 냈다.

“그럼 전 페르데스 님께 가 볼게요.”

“그래.”

그럼 난 주치의한테 가서 해독제를 만드는 게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봐야지.

달이 한참 기운 늦은 밤.

누군가를 찾아가기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중요한 일인 만큼 주치의도 자지 않고 해독제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망설임 없이 주치의 연구실 쪽으로 걸어갔다.

3층에서 1층 주치의 연구실까지 가는 동안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용인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니 당연했다.

타다닥-

그런데 이 다급한 발소리는 뭐지?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발소리였다.

화장실이 급해서 달려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수상한 발소리인 건 확실했다.

나는 숨죽이며 발소리를 따라갔다.

발소리는 내 개인 정원으로 이어졌다.

개인 정원은 내가 허락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허락을 받은 사람은 페르데스와 정원사, 그리고 알도르 경뿐이었다.

페르데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으니 제외고.

그럼 알도르 경과 정원사, 둘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두 사람 다 아니었다.

“여기다 묻으면 되겠지.”

달빛에 어렴풋이 드러난 얼굴은 본 것 같은데, 누군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내가 자주 보지 못했다는 의미이니 공작저 사용인은 아닐 것이다.

그럼 누구지?

“후우, 힘드네.”

누구길래 여기서 삽질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삽질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봤다.

한참 땅을 파던 남자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더니 가지고 온 물건을 땅에 파묻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주변을 살펴본 뒤, 재빠르게 저택으로 들어갔다.

나는 발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남자가 물건을 묻은 곳으로 다가갔다.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는 땅을 파헤친 흔적이 전혀 남지 않도록 완벽하게 묻어 두었다.

이러니까 더 의심되잖아.

삽이 없으니 손을 이용해서 땅을 팠다.

그 바람에 손톱이 깨지고 손이 더러워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왠지 그 남자가 묻은 물건이 페르데스가 쓰러진 일과 연관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계속 땅을 팠고.

마침내 흙이 잔뜩 묻은 상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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