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황제가 원하는 건 레오폴드 공작가와 황실의 피가 섞인 아이였다.
그런데 세 번째 생에서 황제가 하녀를 시켜 날 독살한 것에 대해 깊게 의문을 품고,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와중 나는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혹시 나 말고 다른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이 있는 건 아닐까?
아버지가 외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으니까.
어머니가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뒤, 수많은 영애들이 레오폴드 공작 부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앉기 위해 혼담을 제안했지만, 아버지는 받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혼담을 보낸 가문에게 자신의 인생에 여자는 그녀뿐이니, 이딴 헛짓거리를 하지 말라고 역정을 냈었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사교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그러니 내게 숨겨 둔 이복형제 같은 게 있을 리는 없지만.
아버지에게는 있을 수가 있었다.
전전대 레오폴드 공작,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는 제국 내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바람둥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아랫도리 관리를 잘해서 밖에서 자식을 보지 않았다고 했다.
뭐, 할아버지와 바람을 피운 여자들이 이 아이가 할아버지의 아이라고 데리고 오는 일은 종종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로 인정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아이들은 레드 드래곤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인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곳’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여간 공식적으로 아버지에겐 형제가 없지만, 할아버지의 전적을 생각해 봤을 때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아닌 선대가 그랬을 수도 있고.
정말 나 말고 다른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이 대륙 어딘가에서 숨을 쉬고 있고.
그래서 황제가 그 핏줄을 찾았다면, 세 번째 생에서 날 독살한 게 이해됐다.
“찾아봐야겠어.”
그래서 내 가정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야지.
찾아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나는 알도르 경을 불렀다.
“은밀하게 알아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은 정보 길드를 알고 있나요?”
만약 없다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다행히 알고 있는지 알도르 경이 바로 대답했다.
“에클레시아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에클레시아? 처음 듣는 걸 보니 제국에 뿌리를 내린 길드는 아닌가 보네요.”
알도르 경이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트라소스라는 유랑 민족을 아십니까?”
“네. 알아요. 사막에 뿌리를 둔, 피부가 약간 까무잡잡한 사람들을 말하는 거죠?”
첫 번째 생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맞습니다. 그들이 만든 정보 길드인데, 실력도 제법 괜찮고 비밀 유지도 철저합니다.”
“그래요?”
처음 듣는 정보 길드라서 약간 걱정되긴 하지만, 알도르 경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믿을 수는 있겠지.
“그런데 알도르 경은 그런 곳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 것 같은데,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예전에 공작 각하의 임무를 나갔다가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럼 그곳에 의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의뢰 내용을 적어 주시면 그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직접 그들을 만나서 의뢰 내용을 말하겠어요.”
알도르 경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그저 중간에 사람이 끼어 있으면, 그만큼 이야기가 샐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직접 말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들을 공작저로 부를까요?”
“아니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있으니, 밖에서 조용히 만날게요.”
특히 황제의 눈에 띄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그들이 공작령으로 오면 언제든지 말해요. 바로 시간 빼서 나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얼추 대화가 마무리되고 알도르 경이 나가려는 그때, 집무실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공작저에서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영애, 잠깐…….”
알도르 경을 발견한 페르데스는 들어오다 말고 멈춰 섰다.
알도르 경은 그런 페르데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유유히 집무실을 나갔다.
페르데스는 고개를 격하게 돌리면서까지 알도르 경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날 돌아봤다.
“저 남자랑 무슨 이야기 했어?”
“아무것도요.”
은밀하게 조사하고 싶은 만큼,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 말을 아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영애는 비밀이 너무 많아.”
“저도 항상 말하지만…….”
“여자는 비밀이 많아야 아름다운 법이라고?”
페르데스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가로채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건 됐고. 잭이 실수를 했는데, 좀 도와줘.”
무슨 실수를 했길래 나한테 도와달라는 거지?
의아해서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말을 이었다.
“잭이 황제와 연락 수단인 마법 반지를 떨어뜨렸어.”
“그래서 반지가 깨지기라도 한 건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마법 반지는 보통 말발굽으로 밟아야 겨우 깨질 만큼 아주 단단했다.
“깨진 건 아니고…… 공작저의 지하실로 굴러 들어갔어. 문틈 사이에 작은 공간으로 말이야.”
“아.”
그렇게 된 거구나.
비로소 상황 파악이 된 나는 서랍에 넣어 둔 지하실 열쇠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가요. 제가 반지를 꺼내 드릴게요.”
* * *
고작 하인이 떨어뜨린 반지를 줍는데 내가 나서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레오폴드 공작저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저의 지하실은 오로지 허락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가령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라던가, 혈족과 결혼해서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사람.
그리고 레오폴드 공작의 특별 허락을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좀 더 깊은, ‘그곳’은 혈족만 들어갈 수 있었고.
가장 깊은 곳은 오로지 ‘레오폴드 공작’만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 들어간다면, 발을 들이는 즉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겁도 없이, 혹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들였다가 사라진 사람 중 찾은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위험한 장소이다 보니 사용인들은 공작저에 들어올 때 절대 지하실에 가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다.
내가 페르데스를 공작저로 데리고 올 때 지하실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던 이유였다.
페르데스는 기특하게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내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이다.
뭐, 직접 들어가려고 해도 두꺼운 철문으로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을 테지만.
철문 아래쪽에는 손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틈이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반지가 굴러 들어간 거였다.
끼익-
오랜만에 문을 열었더니 쇠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하네스에게 문을 수리하라고 해야겠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아버지가 하네스에게 내린 ‘특별 허락’이 유효한가?
만약 아니라면 큰일이니, 하네스에게 문을 수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내가 레오폴드 공작이 되고 난 뒤에 말이지.
지하실 문틈으로 굴러 들어간 문제의 반지는 바로 앞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반지를 주워 잭에게 돌려주었다.
“앞으로 조심하렴.”
“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씨.”
잭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며 내게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한 뒤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지하실 문을 잠그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강아지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오던 페르데스는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내게 물었다.
“저 안에 뭐가 있는 거야?”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
하긴 나도 어렸을 땐, 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몹시 궁금했었지.
궁금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대답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대답하기 힘들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페르데스가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저도 잘 몰라서요.”
“모른다고?”
“네. 저 안에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건 알지만,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레오폴드 공작뿐이었다.
그 말인즉, 아버지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있다는 의미이니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알 필요가 없다며 몇 번을 물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땐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날 후계자로 임명할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공작이 아니라면 저 안에 든 무언가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으니까.
“…….”
갑자기 돌멩이 몇 개를 삼킨 것처럼 목이 메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
눈치 빠른 페르데스가 내가 답답해한다는 걸 알고 시원한 물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시원한 물을 먹으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뚫렸다.
아버지가 날 후계자로 임명할 생각이 없었더라도, 난 공작이 될 생각이었다.
아니, 반드시 되어야만 했다.
그게 황제에게 복수하면서 내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려면 지금 하는 일을 얼른 마무리 지어야 하니, 울렁이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책상 앞에 앉았다.
* * *
알도르 경이 에클레시아라는 정보 길드와 약속을 잡아 온 건 그로부터 약 사흘 뒤였다.
늦여름의 축축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나는 사용인들 몰래 공작저를 빠져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런 내 뒤를 알도르 경이 따라왔다.
혼자 가고 싶었지만, 그들과 약속을 잡은 사람이 알도르 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행했다.
비가 오는 데다가 점심시간이 약간 비켜 지나간 식당은 한적했다.
손님은 우리를 포함해서 다섯 명밖에 없었다.
내 붉은 머리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기에 후드를 꾹 눌러쓰고, 자리에 앉았다.
비가 와서 후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어요, 손님?”
딱히 뭔가 먹고 싶은 생각은 없어, 간단하게 맥주만 주문하려고 했는데.
“……!”
남자가 갑자기 알도르 경의 멱살을 잡더니 그대로 엎어 치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