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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257/262)

76화

“…….”

페르데스의 부탁이 상당히 뜻밖이었는지, 알도르는 보기 드물게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페르데스는 그런 알도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마주했다.

두 사람 사이엔 다소 어색하고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페르데스는 알도르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싫다고 거절…….

“알겠습니다.”

……해야 하는데 알겠다니?

페르데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알도르에게 되물었다.

“방금 알겠다고 한 건가?”

“네.”

“정말 나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페르데스가 좀처럼 믿지 못하고 계속 묻자, 알도르가 약간 성가시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혹시 제가 페르데스 님의 부탁을 받아들인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 믿기지 않아서 그래. 난 자네가 거절할 줄 알았거든.”

“……원래는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저 말인즉, 어떤 이유로 마음을 바꿨다는 의미.

페르데스는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괜히 물었다가 알도르가 마음을 바꾸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나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약속했어.”

대신 알도르에게 재차 확답을 받았다.

“나중에 가서 딴말하기 없기야.”

“그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기껏 가르쳐 드렸는데, 힘들다고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절대 포기 안 해.”

페르데스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알도르가 한쪽 입술을 약간 끌어 올리며 웃었다.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요.”

“…….”

그 얼굴이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처럼 섬뜩하고 무시무시했다.

어떻게든 자신을 혹독하게 굴리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이기도 했고.

‘괜히 부탁한 건가?’

페르데스는 순간 후회했지만,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도 하고, 재능이 없는 부분을 끌어올리려면 혹독하게 배울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절대 기사가 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아델과 알도르에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

‘그러니 배우자.’

설마 알도르가 자신을 죽이진 않을 테니, 한번 해 보자고 페르데스는 투지를 불태웠다.

* * *

“알도르 경에게 검술을 배우기로 했다고요?”

관리들과 이야기를 하고 돌아온 나는 페르데스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정말인가요?”

“그래. 내일부터 아침 7시에 기사단 훈련장으로 오라던데.”

허, 정말인가 보네.

“내 말이 믿기지 않나 봐?”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페르데스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알도르 경이 제자를 들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 거예요.”

알도르 경의 검술 실력은 기사 아카데미를 다녔을 때부터 유명했다.

아카데미 교수들이 제발 이곳에 남아 달라고 애원하는 건 물론, 졸업을 앞뒀을 땐 여러 기사단에서 어마어마한 조건을 내걸며 러브 콜이 왔다고 했다.

그런데 알도르 경이 레오폴드 공작가의 기사단을 선택한 건, 평소 아버지를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아버지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 모습에 반해 기사가 되는 걸 선택했다며 알도르 경은 다른 좋은 조건들을 전부 거절하고 이곳에 들어왔다.

그리고 레오폴드 공작가는 물론 아버지에게도 충성을 맹세했다.

아버지는 그의 맹세를 흔쾌히 받아 주었고.

그렇게 알도르 경은 아버지의 세 번째 기사가 되었다.

두 번째 기사는 올벤 경이었고, 첫 번째 기사는 누군지 본 적이 없을뿐더러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하여간 아버지는 알도르 경을 직접 가르쳤고, 그렇게 레오폴드 검법을 익힌 알도르 경의 검술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의 주변에는 그를 동경하고 선망하며, 그처럼 되고 싶어 하는 기사 지망생들이 몰려드는 법.

“지금까지 알도르 경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이곳까지 찾아온 사람이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수십 명이 넘는데, 전부 거절했거든요.”

그중에 왕세자가 있어 알도르 경에게 태사의 직위를 내린다고 해도,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그런데 페르데스를 제자로 받아 주다니.

“페르데스 님이 무척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절대 그건 아니야.”

페르데스가 질색하며 부정했다.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라면 그딴 소리 안 했을걸.”

“무슨 소리를 했는데요?”

궁금해서 묻자 페르데스가 멈칫하더니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말해 주기 싫다는 거네.

그렇다는 건 알도르 경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라는 의미이니 더 깊게 묻지 않았다.

“인생에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좋은 기회를 잡으셨네요.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해 보세요.”

“그 남자에게 검술을 배우는 게 좋은 기회인 건 나도 인정하지만,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는 아니야.”

대신 진지하게 격려해 줬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이상했다.

의아해서 쳐다보자 페르데스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가 다시 꾹 다물며 집무실을 나갔다.

* * *

레오폴드 공작령은 지금까지 장마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가 내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장마 기간에는 일주일에 나흘 정도 비가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세차게 쏟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가 오는 날에는 야외 활동을 하기가 힘들었다.

“다 젖었네.”

도서관에 갔다가 저택으로 돌아온 페르데스는 젖지 않게 비닐로 싼 책을 하인에게 건네주고, 수건을 받아 젖은 몸을 닦았다.

잠깐 나갔다가 돌아온 건데,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단순히 닦는 것만으론 안 될 것 같아 페르데스는 깔끔하게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페르데스 님?”

그동안 쌓였던 오해를 풀고, 한층 결속이 더 단단해진 잭이 그의 환복을 도와주며 말했다.

“2황자 전하께서 아그로스 왕국으로 유학을 가신대요.”

“뭐?”

황태자가 되지 못한 황자가 타국으로 유학 가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그 대상이 체르노서인 건 상당히 뜻밖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체르노서는 태생이 게을러서 학문이나 견문을 넓히는 데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에 아그로스 왕국보다 더 좋은 곳에 유학 갈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는 귀찮다는 이유로 기회를 걷어찼었다.

그 기회를 낼름 잡은 게 3황자, 이안이었다.

덕분에 이안의 위상은 더욱 올라갔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반면 체르노서는 황후의 소생인 황자인데도 불구하고 제국민 사이에 입지가 굉장히 좁았다.

전부 그가 게으르고 무능력한 탓이건만, 체르노서는 어리석게도 그가 황태자가 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신세 한탄만 했었다.

그런데 체르노서가 유학을 간다고?

그것도 왕국 중에서 가장 힘이 약한 아그로스 왕국으로?

‘쫓겨나는 모양이네.’

샴페인 사건 때문에 황제는 물론 모친인 황후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타국으로 추방하는 모양이다.

유학이라는 그럴싸한 핑곗거리를 만들어서 말이지.

그 일이 있은 지 어언 한 달이 지났는데, 이제야 내쫓다니.

‘그래도 열 달 품어 고생해서 낳은 자식이라고,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네.’

페르데스는 지금쯤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고 있을 황후를 속으로 비웃으며 도서관에서 가지고 온 책을 챙겨 들었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옷 정리를 하는 잭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아델의 집무실로 향했다.

페르데스는 아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녀의 집무실에 자유자재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노크 없이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보기 드문 광경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아델이 책상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도 사람이니 일하다가 피곤하면 졸 수 있긴 하지만, 처음 보는지라 조금 신기했다.

‘하긴 그동안 일을 너무 많이 하긴 했지.’

아델은 항상 페르데스보다 먼저 출근했고, 늦게 퇴근했다.

심지어 침실까지 서류를 챙겨가 밤새 자지 않고 일을 한다며, 사라가 무척 걱정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아델이 해야 할 일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페르데스가 그녀의 일을 어느 정도 나눠 가져갔으니, 아델에겐 여유가 생겨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갈수록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지?

페르데스는 의아했다.

더 의아한 건, 도와준다고 해도 아델이 그 일들을 페르데스와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자서 할 수 있다던가, 이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며 전부 거절했다.

다른 관리들도 모르는 것 같았고.

‘복수에 관한 건가?’

그런 거라면 나랑 공유해도 될 텐데.

페르데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델에게 다가갔다.

잠깐 자더라도 누워서 편하게 자야지, 저렇게 자면 안 자느니만 못했다.

그러니 소파에 누워 편하게 자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책상에 있는 서류가 페르데스의 눈에 띄었다.

살펴보니 연간 영지 운영 계획서였는데, 서류에 적힌 날짜가 내년이었다.

‘내년 영지 운영 계획서를 벌써 만든다고?’

영지 운영 계획서는 보통 그해의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관리들을 소집해서 긴 회의 끝에 만들었다.

그래야지만 한 해 동안 영지를 운영하면서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이 뭐가 있는지, 그걸 내년엔 어떻게 고쳐서 실행할지 등 좀 더 나은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 그것도 아델, 혼자서 이걸 작성하고 있으니 의아했다.

더 의아하고 황당한 건 아델이 내후년 영지 운영 계획서도 같이 작성하고 있다는 거였다.

내년 건 어떻게 이해하겠는데, 내후년 걸 왜 벌써 작성하는 거지?

“으으음.”

“……!”

페르데스는 아델이 잠에서 깨자 재빠르게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앉아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

그 직후, 정신을 차린 아델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페르데스를 발견하고 물었다.

“언제 돌아왔어요?”

“방금. 꾸벅꾸벅 조느라 내가 온 것도 모르더라.”

페르데스가 놀리듯이 말하자 아델은 머쓱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책상에 있는 서류들을 정리했다.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

“괜찮아요. 이건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영지 운영 계획서를 만드는 게 그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 말고.”

역시 아델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페르데스는 그게 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책을 읽는 척 연기했다.

“페르데스 님, 책 거꾸로 잡으셨어요.”

……아델이 그의 이상한 점을 지적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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