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겁에 질린 잭이 두서없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는 페르데스를 지금까지 방치해 둔 게 후회된다며, 이제라도 잘 돌봐 주려고 그런다는 황제의 말에 깜빡 속아 그런 짓을 한 거였다.
혹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의심됐지만, 간절한 목소리와 표정 등을 봤을 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황제에게 연락 수단으로 받았다는 마법 반지를 내놓는 걸 봐서 확실했다.
잭이 황제의 감시역 노릇을 했더라도, 페르데스를 배신한 건 아니었다.
잭을 내보내자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방 안이 소란스러웠다가 조용해졌다.
나는 페르데스가 숨어 있는 침대 쪽을 쳐다봤다.
캐노피를 쳐 놓는 바람에 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페르데스가 나왔다면 어렴풋이 실루엣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실루엣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가 아직 이불 속에 있다는 거였다.
충격받아서 나오지 못하는 걸까.
나는 캐노피를 걷고 침대에 앉았다.
“페르데스 님.”
나지막하게 부르자 이불이 약간 떨렸다.
“충격 많이 받으셨어요?”
“……아니.”
대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 얇은 이불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미 알고 있었어. 잭이 날 배신할 리가 없다는 건 말이지. 그러니까 전혀 충격 안 받았어.”
그런 것치고 목소리가 조금 젖은 것 같은데.
“그럼 왜 그러고 계신 거예요?”
“……내가 한심해서.”
으음?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튀는 거지?
“내가 좀 더 믿음직스러웠다면, 홀로 자립할 힘이 있었다면 잭이 저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 아니야.”
“글쎄요. 제가 보기엔 똑같았을 것 같은데요.”
만약 잭이 황제의 순수한 호의를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황제는 잭을 협박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잭을 없애려고 했겠지.
“그러니 페르데스 님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모든 건 황제가 나쁜 거죠.”
그래, 모든 건 황제가 개자식이라 일어난 일이었다.
내 말에도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페르데스는 여전히 이불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것 참.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한 건데, 오히려 방해된 것 같네.
“……고마워.”
일단 사과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덕분에 마음 정리가 됐어.”
아, 다행히 도움이 됐구나.
“그럼 다행이고요. 그런데 왜 계속 이불 안에 있는 거예요?”
“……서.”
페르데스가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요?”
“……라서…….”
“잘 안 들리는…….”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바람에 못 나가겠다고!”
깜짝이야.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런담.
“그러니까 나 좀 내버려 두고 그냥 가!”
“어,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나는 페르데스가 누워 있는 쪽을 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여긴 제 침실이고, 이건 제 침대인데요?”
“…….”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깐 조금이라도 꿈틀거렸는데, 이젠 아예 움직임이 멈췄다.
민망해서 그러나?
페르데스에게 재차 말을 걸려는 그때.
휘익, 쿵, 푸다닥-
페르데스가 이불을 박차고 나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 * *
“어제 침실로 돌아가서…… 잭한테 전부 털어놓고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어.”
아침 훈련이 끝나고, 잠시 쉬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말했다.
“내가 그동안 왜 잭한테 못되게 대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전부 다 말했어.”
“그랬더니 잭이 뭐래요?”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제가 설마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줄은 몰랐다고, 정말 날 생각해서 그런 줄 알았대.”
그렇겠지.
“그리고 펑펑 울며 두 번 다시 이런 짓 안 하겠다고 하더라.”
어라, 그건 좀 곤란한데…….
잭이 의도치 않게 페르데스의 이중 첩자 노릇을 해 준 덕분에 황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는데, 그가 그만둔다면 그럴 수 없게 된다.
“걱정하지 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페르데스가 말했다.
“잭한테 지금처럼 계속 황제한테 보고해 달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마법 반지 좀 돌려줄 수 있어?”
“저야 상관은 없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아끼는 잭을 사지로 밀어 넣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데?
걱정돼서 묻자 페르데스가 픽, 웃으며 무릎에 팔을 얹고 턱을 괬다.
“내가 영애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입술에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
“나도, 잭도 끝을 보기 전까진 빠져나올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 제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은데요.”
“음,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닌데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
“아니에요. 사실인걸요.”
내가 페르데스에게 복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페르데스는…… 죽었겠지.
사계의 정원에 있는 아름다운 연못에 빠져서.
그 사실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성장한 페르데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봐?”
“……혹시 수영 배우실 생각이 있으세요?”
“뭐?”
내가 무심코 한 말에 페르데스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갑자기 수영은 왜?”
“그냥 해 본 말이니 잊어도 돼요.”
그래야 당신이 연못에 빠져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일어섰다.
“있잖아.”
덩달아 일어선 페르데스가 조금 다급하게 날 불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물론이죠. 뭔데요?”
“기사에 대한 건데.”
갑자기 웬 기사?
“듣자 하니 기사가 되려면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해야 한다고 하던데, 맞아?”
“맞아요. 그게 가장 일반적으로 기사가 되는 방법이죠.”
“다른 방법은 없어?”
“있어요.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면 돼요.”
끙, 페르데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황태자랑 3황자는 아카데미를 다니지 않고 기사 작위를 받았던 것 같은데.”
“그건 황족이라 그런 거예요. 황족은 아카데미를 가지 않아도 일정 실력이 되면 기사 자격을 받을 수 있어요.”
“정말?”
페르데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럼 나도 될 수 있어?”
“페르데스 님도 황족이니 가능하긴 한데…… 왜요? 기사 작위를 받고 싶으세요?”
“아니, 뭐…….”
페르데스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여행 다닐 때 기사 작위가 있으면 좋다는 소리가 있길래…….”
“그렇긴 하죠.”
가장 좋은 혜택은 검문을 빨리 통과할 수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페르데스 님은 검술을 못하시잖아요.”
“…….”
“황족이라도 기사 작위를 받으려면 검술을 어느 정도 할 줄 아셔야 해요.”
물론 아카데미보다는 기준이 낮았지만, 그래도 남이 보기에 검술을 배웠구나 하는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체르노서가 끝까지 기사 작위를 받지 못했었지.
내 말에 페르데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사라졌다.
그는 입술을 툭 내밀며 불만스레 말했다.
“꼭 그렇게 정곡을 찔러야겠어?”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가망이 있어야 될 수 있으니 열심히 해 보라는 말을 하지, 내가 보기엔 페르데스는 가망조차 없었다.
“지금 하네스가 페르데스 님을 가르쳐 줄 마조사를 열심히 찾고 있으니, 그쪽을 공부해서 마조사 자격을 따세요. 그것도 기사만큼 여행할 때 도움이 많이 되니까요.”
나름 위로해 주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 준 건데, 마음에 안 드는지 페르데스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비밀 훈련장을 나갔다.
* * *
아델은 일 때문에 나가고, 집무실에 혼자 남은 페르데스는 서류를 보다 말고 일어서서 만년필을 목검처럼 휘둘렀다.
아델이 가르쳐 준 세로 베기와 가로 베기, 그리고 찔러 넣기까지 전부 몇 번씩 해 봤다.
“딱히 이상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합니다.”
“……!”
페르데스는 난데없이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며 돌아봤다.
언제 온 건지 알 수 없는 알도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알도르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페르데스가 인상을 팍 썼다.
“뭐야. 왔으면 기척을 내야지, 왜 몰래 훔쳐보고 있는 건데?”
“냈습니다. 페르데스 님께서 펜을 휘두르는 데 집중하시느라 눈치채지 못하신 거죠.”
“…….”
정말 기척을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중한 건 사실인지라 페르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알도르는 가지고 온 서류를 아델의 책상에 내려놓고 물었다.
“자세가 형편없던데, 아가씨께서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으신 겁니까?”
“영애는 제대로 가르쳐 줬어. 내가…….”
페르데스는 차마 내가 재능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재능이 없으신 거군요.”
그러나 귀신같이 알아들은 알도르가 정곡을 사정없이 찔렀다.
“아가씨께 검술을 배운 지 오래됐는데 아직 그 정도밖에 배우지 못했다면 끔찍할 정도로 검술에 재능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된 페르데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좀 더 연습하면 잘할 수 있어!”
“안 되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도 용기입니다.”
“된다니까! 반드시 기사 작위를 딸 거야!”
순간 알도르의 입술에 비웃음이 걸린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일까.
“페르데스 님이 기사 작위요?”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알도르는 명백하게 페르데스를 비웃었다.
아델이 절대 기사가 되지 못할 거라고 딱 잘라 말한 것만 해도 충분히 상처인데, 알도르까지 저렇게 나오다니.
‘두고 봐.’
내가 반드시 해내고 만다.
반드시!
페르데스의 마음속에 투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그러려면 저 남자에게 배워야 할 것 같은데…….
페르데스는 흘끗, 알도르를 쳐다봤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알도르의 검술 실력은 무척 뛰어났다.
부단장을 하고 있으니 누군가를 가르치는 실력은 아델보다 확실히 낫겠지.
그런 그에게 배우면 지금보다 실력이 좀 더 빨리 상승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알도르에게 굽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저 남자에게만큼은…….
“제게 감히 당신을 지킬 기회를 주십시오.”
문득 알도르가 아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장면을 떠올린 페르데스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도르 경.”
굽히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굽혀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나한테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