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뭐?”
방금까지 눈꺼풀이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거웠는데 한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나는 깜짝 놀라며 사라를 돌아봤다.
“누가 누구랑 싸웠다고?”
“메이랑 잭이요.”
“내가 황궁에서 데리고 온 그 메이?”
“네. 그리고 잭은 페르데스 님의 하인이죠.”
그래, 그렇겠지.
저택에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하인은 없으니까.
그런데 두 사람이 치고받고 싸웠다고?
“무슨 일로?”
“저도 뭐 때문에 싸웠는지는 정확하겐 듣지 못했어요. 두 사람을 불러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말을 안 해 줬거든요.”
“둘 다 침묵한 거야?”
“네. 대신 다른 사람들이 듣기로는 메이가 잭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막 소리쳤대요.”
“흐음.”
들어 보니 단순히 감정싸움을 한 건 아닌 모양이네.
저택에는 수많은 사용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전부 친할 수는 없었다.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이 좀처럼 친해지지 않는 것처럼 몇 년을 같이 일해도 친하지 않은 사용인들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싸웠다는 건, 뭔가 있다는 의미.
거기다 그 두 사람 다 황궁에 있었던 궁인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둘 다 황제에게 특별한 지령을 받았다는 것도.
메이를 데리고 오려면 원래 황실 안살림을 담당하는 황후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전날, 그렇게 속을 뒤집어 놨는데 황후가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 나는 황제를 찾아갔다.
그리고 메이를 데리고 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처음에는 황당해하며 황후에게 가서 허락을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황제 폐하께서도 하지 못하시는 일이 있군요…….’ 라고 몹시 유감이라는 듯 말하자 황제는 발끈하며 데리고 가라고, 황후에겐 그가 말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레오폴드 영지로 떠날 준비를 하는 사이, 메이를 몰래 불러 이것저것 지시했다.
내가 이상한 짓을 하는지 잘 감시하고,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낳게 옆에서 도와 주라는 그런 뻔한 내용의 지시를.
메이는 황제에게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내게 모든 사실들을 알려 주었다.
그 뒤에도 황제에게 연락이 오면, 어떤 연락이 왔는지 말했고.
그리고 황제에겐 내게 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진실만, 필요하다면 거짓을 섞어 보고했다.
그렇게 메이는 페르데스 다음으로 두 번째 이중 첩자가 됐다.
페르데스는 아직 이중 첩자 노릇을 제대로 안 하니 첫 번째라고 해도 무방했다.
아니지, 잭이 배신한 게 아니라면 그가 첫 번째 이중 첩자가 되겠구나.
하여간 그런 메이가 잭이랑 크게 싸웠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메이를 불러 주렴.”
무슨 일인지 직접 물어봐야지.
사라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가 들어왔다.
“안 그래도 아가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었어요!”
메이는 내 얼굴을 보자 분통을 터뜨리며 묻지도 않은 것들을 마구 쏟아 냈다.
“제가 오늘 어떤 일을 겪었느냐면요!”
기세가 어찌나 열렬한지,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황제 이야기가 나오는 걸 봐서 일단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오늘이 황제에게 아가씨의 일상에 대해 보고하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종이에 아가씨의 일상을 적어 늘 그랬듯이 3층 동쪽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기사 동상의 손에 구겨 넣어 뒀죠!”
메이는 이중 첩자가 된 뒤로 내 앞에서 황제 폐하가 아닌 황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돌아가려다 문득 누가 이 종이를 가져가서 황제 폐하께 전해 줄지 궁금해서 숨어서 지켜봤어요!”
“그거라면 처음에 해 봤잖아.”
처음 황제에게 보고할 때도 메이는 쪽지를 넣어 두고 숨어서 지켜봤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도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지친 메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상대는 숨겨 둔 종이를 들고 사라졌고, 그 일로 메이가 며칠 동안 분해하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
“그랬었죠! 그런데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지켜보자, 라는 생각에 숨어서 지켜봤어요. 그런데!”
메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시간쯤 지나니까 범인이 나타난 거예요! 잭, 그 자식이 말이죠!”
역시 잭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
내가 담담하게 반응하자 메이가 꽉 쥔 주먹을 풀며 내게 물었다.
“어라, 별로 안 놀라시네요, 아가씨?”
“그렇지. 잭이 범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거든.”
메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그래. 그래서 말했잖아. 범인을 잡으려고 할 필요 없다고.”
“아아, 그런 의미였구나.”
메이가 의기소침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전 아가씨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좋아했는데……. 이미 다 알고 계셨군요.”
“도움이 되긴 했어.”
잭이 황제의 편에 섰다는 걸 다시 각인시켜 줬으니까.
“그래서 그것 때문에 잭이랑 싸운 거야?”
“네. 잭은 페르데스 님을 모시는 하인이잖아요. 그것도 페르데스 님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모셨죠.”
메이가 발끝으로 바닥을 툭 찼다.
“그런데 황제의 편에 서다니. 너무 괘씸한 거예요. 그래서 가서 뭐라고 해 줬죠.”
그래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소리쳤던 거군.
“그랬더니 그 자식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저보고 오히려 아가씨를 배신한 거 아니냐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자기는 페르데스 님을 위해 그러는 거지만, 전 그냥 배신한 거 아니냐고 오히려 막 뭐라고 했어요!”
“정말로 잭이 페르데스 님을 위해 그러는 거라고 말했어?”
“그렇다니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페르데스 님을 위한다면 그딴 짓을 하면 안 되죠!”
메이는 잭이 잘못을 숨기고자 변명하는 거라고 투덜거렸지만, 내 생각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가정했던 게 맞을지도 몰라.
잭이 페르데스를 배신한 게 아니라 단순히 황제의 부탁을 받았다는 가정.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흥분한 메이를 진정시켜 내보낸 뒤, 페르데스를 불렀다.
“왜 불러?”
페르데스는 어쩐지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혹시 내가 신입 기사 서임식에 부르지 않은 것 때문에 저러는 건가.
그거라면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준 데다가, 지금은 심통이 난 그의 마음을 풀어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무시하고 바로 그를 부른 이유를 말했다.
“잭이 페르데스 님을 배신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페르데스의 표정이 한순간 변했다.
“정말이야? 어떻게?”
“지금부터 알려 드릴 테니, 여기 좀 숨어 계세요.”
내가 침대를 가리키자 페르데스가 설명을 더 요구하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일단 숨어 보시면 알아요.”
“저기 숨어서 뭘 보라고.”
“그런 게 있어요. 얼른 숨어요.”
페르데스는 황당해하면서도 내가 시키는 대로 침대 이불 속에 숨었다.
나는 캐노피를 길게 내려서 밖에서 침대가 잘 보이지 않게 한 뒤, 하인에게 잭을 불러오라고 시켰다.
그런 다음, 전에 마티나 백작에게 받은 검을 들고 소파에 앉아 잭이 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부르셨나…….”
내가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 본 잭은 들어오다 말고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드, 들어갑니다!”
문을 닫고 내 쪽으로 다가와 서는 내내 잭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검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기 앉아.”
“네, 네.”
나는 맞은편에 잭을 앉힌 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메이랑 싸웠다고.”
메이 이야기가 나오자 잭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전 페르데스 님을 배신하지 않았어요!”
그냥 쿡 찔렀을 뿐인데, 날달걀이 깨진 것처럼 말이 줄줄이 쏟아졌다.
“오히려 배신한 건 메이, 그 여자예요!”
“메이가 배신했다고?”
“역시 모르셨군요, 아가씨!”
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여자는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황제 폐하께 보고하고 있었어요!”
“왜?”
“그야 황제 폐하께서 그 여자한테 그렇게 명령했으니까요!”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메이한테 왜 그런 명령을 했냐고.”
“어……?”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잭이 고장 난 기계처럼 멈칫했다.
이렇게 보면 머리가 좋은 애는 아니었다.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
그만큼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다는 의미이니,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내기가 쉬웠다.
나는 턱을 괴고 잭을 지그시 바라봤다.
“넌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게…….”
“메이가 말하길 네가 중간에서 황제 폐하께 그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잭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배신자네?”
“아, 아니에요!”
잭이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펄쩍 뛰며 두 손을 저었다.
“전 절대 배신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전부 페르데스 님을 위해서 그런 거예요!”
“페르데스 님을 위해서 그랬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잭이 또 멈췄다. 다시 굴러가는 눈동자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쾅-
나는 소파 테이블을 세게 내려치며 잭의 주의를 끌었다.
잭이 놀라 날 쳐다보는 그 순간, 꺼내 둔 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스릉, 잘 벼려진 칼날에서 나는 소리가 매서웠다.
“솔직히 말해야 할 거야, 잭.”
조명을 반사한 검날이 예리하게 반짝거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검의 날을 그쪽으로 겨냥하자 잭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다 말해.”
“네, 네. 물론입니다!”
그는 소파가 아닌 바닥에 넙죽 엎드려 발발 떨며, 황제를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줄줄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