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262)

73화

페르데스는 신입 기사 서임식이 열리는 연무장에 가지 않고, 근처 나무 위에 올라가 구경하고 있었다.

그가 가지 않은 건, 그의 의지가 아닌 아델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페르데스 님은 서임식에 오지 마세요.”

페르데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내색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많이 당황했다.

관리 회의, 영지 순찰 등 다른 일에는 데리고 가면서 신입 기사 서임식에는 왜 오지 말라고 한단 말인가.

“이유가 뭐지?”

의아해서 묻자 아델이 약간 서글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들은 페르데스 님이 성년이 되면 레오폴드 공작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실이었다.

페르데스가 사실 백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그가 영지와 공작가의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저 소문은 거의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페르데스가 기사 작위가 없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기사 작위는 나중에라도 따면 되는 거니 사람들은 그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페르데스 님이 서임식에 오시면, 그들은 저보다 페르데스 님에게 충성을 맹세할 거예요.”

“설마.”

“설마라는 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정곡을 찌르는 말에 페르데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오지 마세요. 레오폴드 기사단에 입단할 기사들이 은연중에라도 레오폴드 공작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녀가 저렇게 말하는 게 이해가 되면서 한편으로 섭섭한 감정이 드는 건, 자신은 레오폴드 공작가 사람이 아니라고 딱 잘라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

내 성은 레오폴드가 아니니까.

그러니 섭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페르데스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왜 자꾸 생각나는 건지, 기분이 나쁜 이유가 뭔지 모르면서도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뒤숭숭하고 머릿속이 뒤죽박죽됐다.

그래서 멀리서라도 서임식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괜히 봤다가 더 기분 나빠질 것 같아 저택에서 얌전히 서류를 보고 있으려고 했는데, 저택에 남은 사용인들이 그가 서임식에 가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라고 변명하자 일이 많아도 이건 꼭 봐야 한다며 성화이니 페르데스는 내쫓기다시피 저택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신입 기사 서임식은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걷다 보니 기사단 숙소 근처였다.

“레오폴드 공작가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와아아!”

기사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구경꾼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귀에 꽂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다.

‘조금만 볼까.’

어떻게 진행되는지만 보고 가는 거야.

그리 생각한 페르데스는 근처 커다란 고목 나무에 올라가 서임식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검무, 대련 등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니 결국 끝까지 보게 됐다.

특히 머리칼과 똑같은 붉은색 기사단복을 입은 아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약혼식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봤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녀는 붉은색이 너무 잘 어울렸다.

마치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색깔 같았다.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아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마지막 신입 기사가 아델에게 공손히 경례한 뒤 초대 레오폴드 공작의 동상 앞에 그의 검을 꽂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가 무릎을 꿇는다는 건 그 대상에게 영원히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대상은 아델 레오폴드가 아닌 ‘레오폴드 공작가’이니 초대 레오폴드 공작의 동상에 충성 맹세를 하는 것이다.

“……를 레오폴드 공작가의 기사로 임명한다.”

아델이 그 옆에 서서 임명장을 읽었다.

“레오폴드 공작가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제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공작가를 위해……!”

신입 기사는 연무장이 떠나가도록 크게 충성을 맹세한 뒤, 아델에게 임명장을 건네받았다.

그다음엔 아델의 뒤에 서 있던 알도르가 앞으로 나와 신입 기사의 가슴에 레오폴드 기사단 배지를 달아 주었다.

이로써 정식 레오폴드 공작가의 기사가 된 신입 기사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마지막 신입 기사까지 입단했으니, 이로써 서임식은 끝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건, 알도르가 돌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아델의 앞에 꽂았기 때문이다.

설마……?

사람들의 머리 위로 공통된 생각들이 떠돌아다녔다.

“…….”

알도르가 왜 저러는지 아는 페르데스도 긴장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알도르는 아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알도르 샹크티스,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이신 아델 레오폴드 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매년 신입 기사 서임식을 하는 만큼, 기사가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다.

가문이 아닌 한 사람에게 맹세하는 건 보기 드물었지만, 없는 경우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충성 맹세도 지금처럼 경건하지 않았다.

알도르는 마치 이 공간에 아델과 그밖에 없다는 듯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한 구절, 한 구절 힘주어 말했다.

“영원히 당신을 주군으로 모시며, 당신을 위해 검을 휘두르고,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런 알도르를 내려다보는 초록색 눈동자에는 여러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지만, 기쁨은 보이지 않았다.

“제게 감히 당신을 지킬 기회를 주십시오.”

여름의 뜨거운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

페르데스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아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알도르를 쳐다봤다.

공작저 사람들과 심지어 아델을 뒷담화하던 그 관리들과도 어느 정도 친분을 다졌는데 알도르와는 좀처럼 친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냥 그가 싫었다.

그랬는데 당신이 더 싫어질 것 같아.

……동시에 부러운 건 왜일까?

“당신의 검과 방패가 될 영광을 주십시오.”

굳은 의지가 담긴 맹세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아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결국 이 순간이 오고 말았구나.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또 당신의 목숨을 손에 쥐는 일이 없기를 바랐는데.

진작 그를 내보낼 걸 그랬나.

당신이 저택에 돌아온 그날, 공작저를 떠나라고 그럴 걸 그랬어.

그 뒤에라도.

조금만 더, 라고 외치지 말고 미련 없이 놓을걸.

그랬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때늦은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누굴 탓하겠는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탓인 것을.

그래 전부 내 탓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며 알도르 경을 내려다봤다.

긴 서임식 동안 흐트러진 은발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눈을 보니 이런 후회를 하는 내가 더 바보 같아서 입 안이 썼다.

“……알도르 샹크티스.”

이제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 가엽고 어리석은 생명을 내 손으로 또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이번만큼은 지킬 수 있도록 두 손발이 닳도록 바라고 또 바라는 방법 말곤 없었다.

“그대의…… 맹세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스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유난스럽게 귀에 꽂혔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기사입니다.”

날카롭지 않은 의례용 검으로 그의 양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대의 신념, 신의, 충성, 그리고 모든 것을 나를 위해 바치세요.”

원하지 않는, 의례적인 말을 뱉으며.

“그대에게 내 검과 방패가 되는 영광을 선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내밀자 알도르 경이 옅게 웃으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미소는 지금까지 내가 본 알도르 경의 미소 중에서 두 번째로 행복해 보였다.

첫 번째는…… 그래, 나와 결혼할 때였어.

* * *

신입 기사 서임식처럼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땐, 그 일정에만 집중하기 위해 다른 일정은 잡지 않았다.

다른 일정을 수행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도 않았고.

서임식이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오자, 사라가 웃으며 다가왔다.

“바로 씻으실 수 있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가씨.”

“고마워.”

“별말씀을요.”

흙먼지를 뒤집어쓴 기사단복을 벗고 욕실로 향했다.

허브 향이 나는 입욕제를 푼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니 피로가 노곤하게 녹았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렇게 한참 정리하다 보니,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웃던 알도르 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두 번째 생에서 나와 결혼할 때 알도르 경이 보여 주었던 미소도 떠올랐다.

“왜 그렇게 웃었던 거지?”

나는 물 위로 떠오르는 거품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설마 알도르 경, 날 좋아하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만약 그렇다면 나와 결혼했을 때, 뭔가 행동을 보였어야 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항상 날 주군의 딸로 생각하고, 아가씨라고 부르며 정중하게 대했다.

……아까처럼 의미 모를 미소를 가끔 짓긴 했지만.

“끙, 머리 아프네.”

알도르 경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으나 맞다고 해도, 아니라고 해도 골치가 아파져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냥…… 이 일은 모르는 척 묻자.

알도르 경이 만약 날 좋아한다고 해도, 고백하지 않는 걸 보면 나랑 잘되려는 그런 마음은 없는 것 같으니까.

나 역시 알도르 경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고.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없는 거였다.

똑똑-

“아가씨, 혹시 주무시는 건 아니죠?”

“아니야.”

“다행이에요. 너무 오래 계셔서 주무시는 건 아닌지 걱정했어요.”

그렇게 오래 있었나.

그러고 보니 물이 조금 차갑게 식었다.

더 있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 이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목욕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여기 차 드세요.”

“고마워.”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차를 마시는 동안 사라가 젖은 내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따뜻한 차를 먹으니 조금씩 잠이 쏟아졌다.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잠을 깨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사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어, 아가씨.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

“기사 서임식 때, 메이와 페르데스 님의 하인인 잭이 치고받고 싸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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