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의아해서 질문을 되돌려 주자 페르데스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가 충성 맹세를 한다는 건, 평생 영애를 섬긴다는 거잖아. 목숨까지 바쳐서 말이지.”
“그렇죠.”
“혹시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도 절대 그만둘 수 없고, 영애나 다른 사람도 그 남자를 해고할 수 없잖아.”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왜?’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페르데스의 입술이 일자를 그리며 닫혔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삐졌다는 티를 풀풀 내면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페르데스는 알도르 경이 내게 충성 맹세를 하는 게 싫은 모양이다.
“제가 전에 부탁한 건 다 됐어요?”
그걸 알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페르데스는 불만 서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거의 다 됐어.”
“어디까지 했는데요? 보여 줘요.”
말을 꺼내기 무섭게 페르데스가 서류를 가져왔다.
생각보다 양이 많네. 나는 서류 뭉치를 넘기며 확인했다.
7월은 장마의 달이라고 불릴 만큼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 장마가 쏟아졌다.
이 와중에 장마 피해를 거의 받지 않은 축복 받은 땅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곳, 레오폴드 공작령이었다.
사람들은 이 역시 레드 드래곤의 가호를 받은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거기까진 모르겠고.
확실한 건 장마 피해는 없어도 피곤한 건 다른 영지와 마찬가지라는 거였다.
피곤해지는 이유는 장마 피해를 받은 영지에서 온 재난 지원 요청 때문이었다.
재난 지원 요청에 응답하는 건 의무가 아니었지만, 응답하지 않으면 나중에 피곤해졌다.
가령 내 영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소문나서 이미지가 안 좋아지기도 했고.
원만한 인맥 관계를 위해서라도 재난 지원 요청에는 응답해 주는 게 좋지만, 문제는 얼마만큼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너무 많이 도와주면 호구로 보여서 다른 영지도 그렇게 도와달라고 할 테고.
그렇다고 적게 도와주면, 쪼잔하다고 도와주고도 욕먹는 상황이 생기니 적당히 도와줘야 했다.
그 적당히는 생을 몇 번 반복해도 감이 잡히지 않아 페르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런 분야에 뛰어난 감각을 가진 그라면 해결책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재난 지원 요청이라고 해도 무료로 도와주는 건 절대 안 돼.”
나는 서류를 보면서 페르데스의 말을 들었다.
“무료로 도와준다면 호구로 볼 거야. 그리고 더 많은 걸 요구하겠지.”
“그렇긴 하지만 재난 지원 요청을 한 건데, 돈을 받으면 욕을 먹을 거예요. 돈을 낼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요.”
“그럼 돈 대신 다른 걸 받으면 되지.”
돈 대신 다른 것?
“영지의 특산물이라도 받자는 건가요?”
그것도 장마 피해 때문에 대부분 쓸려 가서 받기 힘들 것 같은데?
“비슷한데 다른 거야.”
“어떻게 다르다는 거죠?”
“여기.”
페르데스가 손수 서류를 넘겨 표를 보여 주었다.
표에는 지금까지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다른 영지에 어떤 지원을 해 줬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지원해 준 영지가 제국의 서쪽에 있는 테시스 영지던데, 알고 있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테시스 영지의 주 수입원이 뭔지 알아?”
“수송업이죠.”
테시스 영지에 흐르는 에코스 강은 제국 전역에 있는 대부분의 강과 연결되어 있어 강을 이용한 수송업이 굉장히 발달했다.
아, 설마?
“지원 요청에 응답해 주는 대신 수송 비용을 깎아 달라고 말하자는 건가요?”
그 역시 돈 문제가 얽혀 있어,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특히 피해를 받은 영지라면 더더욱.
“비용을 깎아 달라는 게 아니라 다른 물건을 실어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페르데스가 종이에 적으며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예를 들면 테시스 영지에서 레오폴드 영지까지 오는 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파는 상단이 있으니, 그곳에서 물건을 받아 레오폴드 영지까지 옮겨 달라는 거지.”
“아! 그러면 확실히 수송비가 많이 줄어들겠네요.”
“그렇지.”
수송비는 물건의 가격에 20퍼센트 이상 차지할 만큼 비쌌으니, 그것만 빠져도 절감을 많이 할 수가 있었다.
테시스 영지에서 이 사실을 알면 수송비를 조금은 요구하고 싶을 테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다.
구원 물자를 가져가는 겸사겸사해 달라는 거였으니까.
이렇게 좋은 방법을 찾아내다니.
“대단하세요, 페르데스 님.”
진심을 날것 그대로 표현하자 페르데스가 머쓱한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식은 수프 먹기라고.”
“그래요?”
이것도 맡길지 말지 고민했는데, 그의 대답을 듣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한쪽에 챙겨 두었던 서류를 꺼내 페르데스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럼 이것도 보고 정리해 주세요.”
서류를 본 페르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무시했다.
이제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페르데스가 모든 일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 * *
“이제 외출 안 하시는 거죠? 그럼 환복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페르데스가 침실로 들어오자 잭이 자연스레 다가와 그의 환복을 도왔다.
페르데스는 옷을 갈아입는 내내 잭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를 내보내려고 했지만, 막상 그러려니 여러 가지가 마음에 걸려 그러지 못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자신이 잭을 내보내면 황제가 그를 죽일 거라는 거였다.
아델이 말하길 황제는 후환을 두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 증거로 전에 황궁에 갔을 때, 돌려보냈던 개럿이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개럿이 황궁에 가면 죽을 걸 알고 도망쳤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단 황궁에 가다가 황제에게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페르데스는 생각했다.
잭이 미웠지만, 그렇다고 그가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황제와 대화를 나눠 봤을 때, 잭이 황제에게 말해 준 건 극히 일부인 것 같았다.
페르데스가 그동안 백치인 척 연기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 점을 생각해 봤을 때 완전히 배신한 건 아닌 것 같아 내보내진 못하고.
그렇다고 계속 데리고 있기엔 찝찝한 어정쩡한 상태로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갔다.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지.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페르데스 님?”
“……넌 날 배신하지 않을 거지, 잭?”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진심을 말하고 말았다.
“물론이죠.”
난데없는 질문인데도 잭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했다.
“제가 페르데스 님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래.”
거짓일지도 모르는 저 말에 안심하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 * *
따사로운 햇살이 무르익은 7월의 중순의 어느 날.
레오폴드 기사단의 큰 연례행사 중 하나인 신입 기사 서임식이 열렸다.
올해 입단할 신입 기사는 총 12명으로, 전부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햇병아리 기사였다.
“어째서 경력직 기사를 한 명도 뽑지 않으신 거지?”
“듣자 하니 경력직이 2명밖에 지원을 안 했는데, 다 문제가 좀 있었나 봐.”
“저런, 올해는 지원자 자체가 현저하게 적네.”
“어쩔 수 없지. 공작 각하께서 부재중이시니까…….”
웅성거리던 기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 건 기사단복을 차려입은 알도르가 등장했을 때였다.
레오폴드 기사단복은 레드 드래곤을 상징하는 짙은 붉은색이었다.
이 기사단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은 피를 연상시키는 게 아니냐며 꺼렸지만, 막상 직접 보면 너무 근사하다고 감탄을 터뜨리곤 했다.
특히 이 기사단복은 알도르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눈부신 은발과 잘 어울렸다.
기사들은 물론 서임식을 구경 온 사용인과 관리들도 반쯤 넋을 놓고 알도르를 쳐다봤다.
“……!”
“세상에.”
그랬던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건, 알도르의 뒤로 아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델의 붉은 머리는 포니테일 형식으로 높게 틀어 묶고 레오폴드 기사단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허리춤에는 검까지 차고 있으니, 누가 봐도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흩날리는 망토는 레오폴드 기사단장만 걸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녀가 옷깃에 달고 있는 휘장 역시 레오폴드 기사단장의 것이었다.
아델이 기사단복을 입고 나타난 것 만해도 황당한데, 그것들을 발견한 사람들은 더욱 당황했다.
의아하기도 했고.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단장 위에 선 아델은 놀란 와중에도 정자세로 서 있는 기사들을 내려다봤다.
여름의 녹음처럼 싱그러우면서도 모든 걸 꿰뚫어 볼 것 같은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한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알도르 경.”
아델이 호명하자 기다렸다는 듯 알도르가 앞으로 나와 아델의 앞에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신, 알도르 샹크티스, 아델 레오폴드 공작 영애를 뵙습니다.”
알도르는 ‘레오폴드’라는 성을 강조했다.
알도르가 그러는 이유를 바로 눈치챈 기존의 기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아델 레오폴드 공작 영애를 뵙습니다.”
레오폴드 기사단은 공작가에 충성하고 공작가를 위해 일하는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아델 레오폴드는 그 레오폴드 공작가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즉, 그녀가 기사단장이든 아니든 간에, 기사들이 충성해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감히 의문을 가지는 것조차 기사로서 불순한 행동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신입기사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아델 레오폴드 공작 영애를 뵙습니다!”
기사들의 우렁찬 소리가 연무장을 뚫고 공작저에 크게 울려 퍼졌다.
따사로운 햇살이 그보다 더 붉은 기사단복 위로 눈부시게 내리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