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체르노서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샴페인에 목숨이 위험할 만한 독을 탈 리가 없었다.
그러니 안심하고 랑쇼 후작 영애에게 넘겨준 거였고.
예상했던 대로 체르노서가 샴페인에 탄 건 설사약이었다.
그것도 정량을 넘은 설사약.
체르노서가 탄 설사약은 정량을 넘기면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켰는데, 그중 하나가 일시적 발기 부전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페르데스가 샴페인을 먹었으며, 그래서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래야 황제가 어서 아이를 가지라며 페르데스를 닦달하거나,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분간이긴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시간을 벌었다는 게 중요했다.
페르데스가 샴페인을 먹는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봤기 때문에 이 소문은 진실이 됐다.
문제는 페르데스가 일시적 고자가 됐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를 동정하며 장어 등 그곳에 좋다는 음식이나 보약을 자꾸 가져온다는 거였다.
필요 없다고 해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자꾸만 가져왔다.
“……미치겠군.”
페르데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쌓인 선물들을 보며 혀를 찼다.
“다들 필요 없다는데 왜 자꾸 가져오는 거야?”
“그만큼 페르데스 님을 좋아하는 거죠.”
“이런 마음, 필요 없어.”
페르데스는 기다란 유리병에 담긴 뱀술을 보고 질색하며 말했다.
“이런 거 먹어 봤자 쓸데도 없는데.”
“쓰고 싶으세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난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반응이 이상하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일어섰다.
“준비가 다 되셨으면 이만 나갈까요?”
“그래.”
오늘은 영지 시찰을 나가는 날이었다. 날이 더 무더워지기 전에 영지 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시정할 예정이었다.
하루 만에 영지를 전부 돌아보는 건 무리이니 동서남북으로 구분해서 이틀에 한 지역씩 갈 예정이었다.
이게 끝나면 그다음엔 신입 기사 서임식이었다.
그때 알도르 경에게 충성 서약을 받기로 했지.
그것만 생각하면 두 번째 생의 잔혹한 일들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리고 한숨이 푹푹 나왔다.
“머리 아파?”
내가 머리를 짚고 있자 페르데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약 가져올까?”
“아니에요.”
약을 먹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니 거절했다.
저택을 나오자 마필 관리사가 말을 끌고 왔다.
마차를 타면 영지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말을 타기로 한 것이다.
페르데스는 조금씩 백치 가면을 벗은 덕분에 말을 타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백치가 아니었구나, 하고 신기하게 보는 사람은 몇몇 있지만.
먼저 말에 올라탄 페르데스가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쯤이면 수도는 푹푹 찌는데, 여긴 별로 안 덥네.”
나 역시 말에 올라타며 대답했다.
“대륙의 북쪽이니까요. 높은 산 중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곳도 있어요.”
“그래서 신기하다는 거야. 바로 뒤에 화산이 있어서 무척 더울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레드 드래곤의 축복이라고 해 두죠.”
“이런 걸 축복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페르데스를 두고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같이 가!”
페르데스가 곧바로 따라왔다.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오늘 볼 곳은 영지의 동쪽으로 이곳은 영지민들의 주거 지역이었다.
사는 곳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게 아무리 멀쩡해도 소용없으니 가장 신경 쓰는 곳이었다.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은 걸어가는 등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꼼꼼히 확인하고, 문제점을 발견하면 공작저로 돌아가 관리들과 어떻게 할지 회의했다.
“벽을 좀 더 견고하게…….”
“페르데스 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그러면 예산이…….”
회의에는 페르데스도 참가했다.
처음에는 기함하던 관리들도, 페르데스가 나름 괜찮은 의견을 내놓자 이젠 그가 참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쩌다 그가 회의에 참여하지 않으면 오늘은 어디 가셨냐며 찾을 정도이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렇게 페르데스는 조금씩 백치 이미지를 벗었다.
* * *
페르데스는 백치 가면을 벗은 게 좋으면서도 싫었다.
우선 좋은 건, 기분이 나빠도 바보 같이 웃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싫은 건 싫다고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게 너무 좋았다.
그 외에 바보 연기를 하거나,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싫은 건…….
“이거지.”
페르데스는 산더미처럼 안고 있는 서류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델은 처음엔 한번 해 보라고 줬다가, 페르데스가 잘하자 그대로 떠넘겼다.
그렇게 넘어온 일이 몇 개더라. 셀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공작가와 영지의 일을 모두 떠맡는 건 아닌지 두려울 정도였다.
“이 문제로 이야기 좀 나눠 봐야겠어.”
페르데스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본관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알도르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
페르데스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그와 사제의 연을 맺은 지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페르데스는 아직 알도르가 불편했다.
“…….”
그건 알도르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를 보고 멈춰 섰다.
알도르는 공작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신입 기사들이 입단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내일이 서임식이었지.’
공작가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정을 꿰고 있었다.
내일은 더 바쁠 것 같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어 페르데스는 몸서리를 쳤다.
그사이 지척까지 다가온 알도르가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예전엔 그가 페르데스를 내려다봤는데, 이젠 어느 정도 눈높이가 맞았다.
아직 페르데스가 작긴 했지만.
늘 그랬듯이 무심하게 인사하고 가겠지.
“페르데스 님을 뵙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알도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하긴 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뭔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 알도르의 모습에 거부감이 든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태도가 달라진 거지?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아무것도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뒤에 말을 붙이는 게 이상했다.
어디 말해 보라는 듯 그를 쳐다보던 페르데스는 이어지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 아가씨께 충성 맹세를 할 예정이니, 아가씨의 약혼자이신 페르데스 님을 좀 더 존중하는 것뿐입니다.”
* * *
어정쩡하게 길든 놈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낫다.
아버지는 물론 선대 레오폴드 공작들의 좌우명이었다.
그래서 신입 기사 중 8할은 6월 말에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햇병아리 중에서 뽑았다.
나머지 2할은 경력직이었는데, 경력직 심사가 더 까다로웠다.
기사들은 웬만해선 한 번 들어간 기사단을 옮기지 않았다.
한 번 충성을 맹세한 주군에게 목숨을 다하는 그 날까지 계속 맹세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사단을 옮겼다는 건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고, 그 문제는 대부분 당사자의 잘못인 경우가 많았다.
성추행, 주인 폭행, 절도 등 이유도 다양했다.
더 큰 문제는 경력직 기사들이 이력서를 낼 때, 이 사실을 적지 않는다는 거였다.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적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기사에게 문제가 없는지 일일이 조사해 봐야 했고, 그러다 보니 시간과 돈 낭비가 심했다.
……이번에는 아니었지만.
나는 경력직 기사 이력서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2명 지원한 건가.”
내 가문의 기사단이라서 좋게 보는 게 아닌, 레오폴드 기사단은 정말로 기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신입 기사들에게 정식으로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 일주일간의 적응 기간을 준다는 거였다.
그 이유는 한번 기사단에 입단하면 돌이키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동안 기사단에서 직접 생활하면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입단하기 전에 나가라는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배려를 해주는 기사단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모르는 신입 기사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일단 입단부터 시키고 빡빡하게 굴렸다.
그런데 레오폴드 기사단은 신입 기사들을 배려해 줄 뿐만 아니라, 기강을 잡는다는 핑계로 폭력이나 욕설을 하는 걸 엄격하게 금지했다.
게다가 대우도 다른 기사단에 비해 월등히 좋아서 매년 기사단을 모집하면 경쟁률이 다른 기사단에 비해 기본 4배는 높았다.
그러나 올해는 경력직을 포함해서 지원자가 다른 가문의 기사단보다 월등히 적었다.
경력직을 4명 뽑는데 그 중, 2명 지원한 걸 보면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나마 이번 생에는 많은 거지.”
세 번째 생, 내가 황제에게 공작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은둔했을 때는 경력직은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고, 햇병아리 기사도 고작 3명인가 지원했었다.
이렇게 지원자가 줄어든 건 공작가의 가주이자 기사단장인 레오폴드 공작의 부재 때문이었다.
수장이 없는 무리는 와해할 가능성이 크니, 입단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쌓아 온 이미지가 좋은 데다가, 레오폴드 공작가의 지원을 받아 기사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한 자들이 입단 신청을 한 덕분에 햇병아리 기사 모집 인원수는 채울 수 있었다.
“경력직 쪽은 어떡한다.”
4명 뽑는 데 2명밖에 지원하지 않았으니 둘 다 뽑는 편이 좋긴 한데…….
고민하던 와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페르데스였다.
그는 가지고 온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내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또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앞뒤 다 자르고 무슨 소리냐고 다짜고짜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알아듣죠?”
“그 남자 말이야!”
페르데스가 알도르 경을 언급하자마자 그가 펄쩍 뛰는 이유가 떠올랐다.
“들으셨군요.”
“들었지.”
페르데스가 한 손을 내 책상에 내려놓고 상체를 기울였다.
“그 남자한테 직접.”
알도르 경이 그 이야기를 직접 했다고?
입을 가볍게 놀릴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네.
“정말 충성 맹세를 받아 줄 거야?”
“받아 줘야죠.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요.”
“왜? 왜 그런 약속을 한 건데?”
“그러면 페르데스 님은 제가 알도르 경의 충성 맹세를 받아 주는 걸 왜 이렇게 싫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