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이에 후작 부인은 물론 귀족들은 하나같이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곧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자 전하께서 사실 백치가 아니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요.”
“그러게요. 듣자 하니 여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런 거라면서요?”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그동안 보여 주셨던 모습은 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소문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보다 믿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상관없었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건 사람들이 페르데스가 백치인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어서.
나중에 그가 백치 가면을 벗어 정상인처럼 행동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거였고.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린 후작 부인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후작 영애에게도 인사했다.
“성년이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랑쇼 후작 영애. 이건 제가 드리는 축하 선물이에요.”
우선 내가 준비한 선물부터 내밀었다.
선물은 받는 즉시 열어 보는 게 예의였기에, 그녀는 바로 상자를 열었다.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에는 큼지막한 붉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그 주변으로 비싼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붉은 보석이었다.
랑쇼 후작가는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으로, 랑쇼 후작 영애도 마법사의 자질이 있었다.
“이 보석은 설마……!”
그러니 이 붉은 보석이 뭔지 바로 알아볼 거라고 예상했는데, 역시나.
“퓨라에요.”
나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랑쇼 후작 영애를 대신해서 친절하게 붉은 보석에 관해 설명했다.
“영애의 데뷔탕트 선물로 뭐가 좋을지 고민하다가, 영애가 마법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걸 준비했어요.”
내가 평소 랑쇼 후작가에 관심이 많다는 걸 어필하는 것과 동시에, 레오폴드 공작가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주변 사람들에게 확실히 알리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저렇게 비싼 걸 덥석 선물하다니. 레오폴드 공작가의 재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정말인가 보네요.”
“퓨라가 나는 지역이니까 당연하죠. 게다가 레드 드래곤의 가호 덕분에 영지도 평화로워서…….”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신 뒤로 위태로운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어머, 그 이야기 듣지 못했어요? 레오폴드 영애가…….”
아버지가 없어도 레오폴드 공작가가 건재할 수 있는 게 내 덕분이라는 걸 알리는 것이기도 했고.
원하는 대로 적당히 알렸겠다, 이제 다음 계획을 실행해 볼까.
수도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럴 생각은 없었지만, 체르노서가 괜한 짓을 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받으세요.”
나는 페르데스에게서 건네받은 샴페인을 랑쇼 후작 영애에게 내밀었다.
“체르노서 황자 전하께서 주시는 선물이에요.”
“어머나, 황자 전하께서요?”
“네. 영애의 데뷔탕트를 직접 축하하러 오지 못한 게 미안했는지 어제 이 카드와 함께 제게 보내시더라고요.”
나는 체르노서가 보낸 카드도 함께 후작 영애에게 주었다.
카드에는 [미안한 마음에 선물을 보냅니다.]라고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이나, 무엇이 미안한지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적당히 포장해서 줘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랑쇼 후작 영애는 한때 체르노서와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두 사람 다 부정했고, 한 달 뒤에 후작 영애가 다른 남자와 약혼하는 바람에 다들 뜬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머,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후작 영애의 볼이 살짝 발그레 붉어진 걸 보아 뜬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없지.
“황자 전하께서 주신 건 마셔 봐야죠.”
후작 영애는 직원에게 샴페인을 건네주며,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영애.”
원하는 것도 다 이뤘겠다, 오래 그곳에 있어 봤자 귀찮아지기만 할 뿐, 좋을 건 없으니 적당한 타이밍에 빠졌다.
그리고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닿지 않는 변두리로 빠졌다.
그때까지 말없이 따라오던 페르데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샴페인, 그 자식이 영애한테 준 거지?”
“그 자식이 2황자를 말하는 거라면 맞아요.”
“그런 걸 다른 사람한테 줘도 돼?”
“네. 어차피 2황자는 이 일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 할 테니까요.”
“무슨…….”
페르데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그때, 음악이 바뀌었다.
춤을 출 시간이라는 의미였다.
랑쇼 후작 영애을 비롯한 귀족들은 저마다 파트너의 손을 잡고 중앙으로 향했다.
페르데스가 콧잔등을 찌푸린 채, 생각이 많은 얼굴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왜 저러지?
아, 혹시 춤을 추기 싫어서 그러는 건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런 게 확실했다.
“춤추기 싫으면 안 춰도 돼요.”
페르데스가 춤을 추는 것도 백치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한 거였지만, 저리 싫어하는데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말을 꺼냈더니 페르데스가 의아한 눈으로 날 돌아봤다.
“정말?”
“네.”
“하지만 그 남자가 파티에 참석했으면 파트너와 춤을 한 번 정도는 추는 게 예의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예의지,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니 꼭 따를 필요는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사정이 있다면, 춤을 추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래……?”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그럼 우린 여기서 계속 구경만 하는 거야?”
“아니요. 전 춤을 춰야죠.”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페르데스는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날 빤히 쳐다보다가 되물었다.
“영애는 춤을 춘다고?”
“네.”
“그럼 나는?”
“페르데스 님은 여기 계세요. 전 다른 사람이랑 추고 올 테니까요.”
페르데스는 아직 춤추는 게 서툴러서 그렇다고 변명을 댈 수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도 같이 춤을 추는 게 맞았다.
“…….”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페르데스의 입술 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고집스럽게 굳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또 뭐가 불만인 거지?
의아해서 물어보려는데 페르데스가 내게 팔을 내밀었다.
“가자.”
“네?”
“춤추러 가자고.”
어라? 갑자기 이야기가 왜 이렇게 되는 거지?
황당했지만, 페르데스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고 간절해 보여서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가 내민 팔 위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중앙으로 걸어가자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지금까지 교육을 받지 못했던 페르데스가 과연 제대로 춤을 출 수 있을까, 궁금해하는 시선이었다.
잠시 멈췄던 음악이 다시 흐르고, 페르데스가 선율에 맞춰 스텝을 밟자 이목이 더욱 집중됐다.
놀랍다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나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페르데스가 어제보다 더 춤을 잘 췄기 때문이다.
여전히 시선 처리는 미흡했지만, 그 부분은 마주 보고 서 있는 파트너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괜찮았다.
“다른 영애와 춤을 출 땐 시선 처리도 확실하게 해요.”
그래야 나쁜 소리를 듣지 않을 테니,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아까처럼 불만 섞인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왜 그래요?”
“영애는 내가 다른 여자랑 춤을 췄으면 좋겠어?”
그 부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면 상처받을 것 같은데.
“정말 그러길 바라?”
“아니요. 싫으시면 안 해도 돼요.”
“싫어.”
페르데스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절대로 다른 여자랑 춤을 추지 않을 거야.”
의아할 정도로 과한 거부 반응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됐다.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춤을 춰 본 적 없으니 혹시 발이라도 밟을까 불안하겠지.
“그러니까…….”
때마침 그와 떨어져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차례인지라 페르데스가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방금 무슨 말씀 하셨어요?”
그래서 다시 붙었을 때 물어봤지만, 페르데스는 다시 말해 주지 않았다.
* * *
나는 춤을 춘 뒤 변두리로 나오자마자 후작 영애를 찾았다.
가장 화려하게 꾸미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여자를 찾으면 되니, 그녀를 찾는 건 무척 쉬웠다.
내가 후작 영애를 발견한 것과 동시에 내가 준 샴페인을 챙겨갔던 직원이 샴페인 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직원은 그 샴페인 잔을 후작 영애와 부인에게 각각 주었다.
남은 샴페인 잔은 5개.
여기 있는 손님들에게 전부 나눠주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러니 후작 영애는 중요하거나 아주 친밀한 손님에게만 샴페인을 나눠줄 것이다.
그 중요한 사람엔 당연히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역시.
“고마워.”
나는 싱긋 웃으며 직원에 내민 샴페인 잔을 받았다.
그럼 샴페인을 먹어 볼까.
물론 먹는 척만 하는 거였다.
그리고 나중에 이 샴페인을 먹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이상 반응을 확인하고, 그 반응이 똑같이 나타난 것처럼 연기를 할 생각이었다.
“어?”
그러려고 했는데, 페르데스가 빼앗다시피 샴페인 잔을 가져갔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숙여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또 이상한 계획 세우고 있지?”
하여간 눈치가 빠르다니까.
“그렇다면요?”
“내가 할게. 뭘 하면 되는지 말해 줘.”
“자세히 설명해 줄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그거 술이에요.”
“어차피 먹는 척만 할 거잖아.”
……그것도 눈치챈 거야?
약간 당황하며 쳐다보는 그 순간, 말릴 틈도 없이 페르데스가 샴페인을 쭉 들이켰다.
저러다 삼키면 어쩌려고!
나는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살짝 머리를 갸웃거리며 내 어깨에 기댔다.
그런 다음,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걸 다시 잔에 뱉었다.
내 어깨에 기댄 건, 다른 사람이 이 장면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페르데스는 뱉은 샴페인을 바닥에 버렸다.
모든 건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
맹물로 입 안을 완벽하게 씻어내기까지 한 페르데스가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이러면 됐지?”
위험천만한 그의 행동에 무척 화가 났었는데, 웃는 얼굴을 보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이래서 웃는 얼굴엔 침도 못 뱉는다고 하는 걸까.
“……다음부터 이러지 마세요.”
대신 경고를 했더니 페르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장담하지 못하겠는데.”
“페르데스 님.”
“난 영애가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면 또 나설 거야.”
“……!”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영애도 위험한 일을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