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페르데스가 내 파트너인 건, 지나가는 개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저딴 말을 하는 건, 명백하게 페르데스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
그게 너무 기가 막혀 황태자를 빤히 보던 나는 그가 흘끗, 페르데스의 반응을 살핀다는 걸 알아챘다.
설마 어제 일의 연장선인가.
“…….”
그럼 그가 기대하는 반응을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페르데스를 슬쩍 찔렀다.
만약 페르데스가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다면 일이 복잡해졌을 텐데, 다행히 그는 바로 알아듣고 말했다.
“내가 영애의 파트너야.”
느리지만 힘 있는 말투였다.
황태자가 그런 페르데스를 비웃듯이 입술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영애를 생각한다면 파트너 자리는 내게 넘겨주는 게 좋을 거다, 페르데스.”
“그게 무슨 의미죠?”
이번엔 내가 물었지만, 황태자는 페르데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친절하게 설명했다.
“랑쇼 후작이 귀족회에 속한 만큼, 오늘 데뷔탕트엔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올 겁니다.”
“…….”
“듣자 하니 외국 귀족도 온다던데, 그런 곳에 페르데스를 파트너로 데리고 가면 영애께선 귀족들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겁니다.”
그제야 날 돌아본 황태자가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저는 제 목숨을 구해 준 레오폴드 공작의 하나뿐인 자식인 영애가 다른 귀족들에게 욕먹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축축하고 더러운 감촉이 손등에 닿았다.
“그러니 절 데리고 가십시오, 영애. 그게 영애를 위해서도, 그리고…….”
“싫습니다.”
어디까지 개소리를 하나 지켜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어 말허리를 자르며 그에게 잡힌 손을 뺐다.
그러자 황태자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마치 내가 거절할 줄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제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아니요. 전부 이해했습니다.”
그의 개소리를 계속 듣기엔 내 시간이 아까웠다.
“절 위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전 명예보다 제 머리카락이 소중해서요.”
황태자는 제법 반반한 외모와, 높은 직위, 그리고 어마어마한 재력을 이용해서 여자들을 꼬시고 다녔다.
그것 때문에 황태자비가 매일 같이 속앓이를 하는 건 제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한 달 전에는 파티에서 황태자의 애인이 된 어느 백작 영애의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 놓았다지.
그것 때문에 사교계가 한바탕 뒤집혔고, 황태자의 러브콜을 받았던 수많은 여자들은 자신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 몸을 사린다고 들었다.
“…….”
그 이야기를 들먹이자 황태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슬쩍 입술을 비틀며 황태자를 비웃어 준 뒤, 페르데스의 팔짱을 꼈다.
“그럼 가실까요, 페르데스 님.”
페르데스도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손을 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멍청하게 서 있는 황태자를 내버려 두고 봄의 궁을 나왔다.
정문에는 우리가 타고 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손수건을 꺼내 황태자의 입술이 닿은 곳을 박박 문질렀다.
아주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는데도 굉장히 끔찍했다.
그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계속 문지르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만해. 피부 상해.”
“아.”
나는 그제야 벌겋게 변한 손등을 발견하고 멈췄다.
페르데스도 그걸 보고 혀를 찼다.
“그러게 손등은 왜 문질러? 그런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잖아.”
“기분이라도 나아지려고요.”
“미련하긴.”
페르데스는 혀를 계속 차며 내 손등을 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뭐 하는……!
“페르데스 님!”
나는 페르데스의 입술이 빨갛게 변한 손등에 닿자 깜짝 놀라며 그를 불렀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황태자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그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씩, 웃었다.
“이러면 기분이 덜 나쁘려나?”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돌이라도 삼킨 것처럼 이상하게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잡힌 손을 황급히 빼내는 게 전부였다. 나는 그의 입술이 닿은 부위를 문질렀다.
황태자의 입술이 닿았을 땐 몹시 기분이 나빴는데, 페르데스는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서, 이런 느낌이라면 나쁘지 않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페르데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한참 동안 손등을 문질렀다.
* * *
원래는 랑쇼 후작 영애의 데뷔탕트가 열리는 로즈 가든에 가는 동안 페르데스에게 그가 할 일을 되새겨 주려고 했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페르데스가 이상한 짓을 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상한 짓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교계에서 손등 키스는 흔한 편이었으니까.
흔한 일인데 왜 이렇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건지.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손등에 감촉이 선명해져서 나는 계속 창밖을 쳐다봤다.
“내리지.”
그러나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는 법.
그의 손을 잡아야 하는 순간이 오자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그가 내민 손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짙은 장미꽃 향기가 훅 끼쳤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직원을 따라가기 전, 알도르 경을 돌아봤다.
“알도르 경, 그 샴페인 이리 주세요.”
호위 기사는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샴페인을 건네받았다.
“이리 줘.”
그 샴페인은 다시 페르데스의 품에 안겼다.
그는 샴페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선물?”
“네.”
“다른 선물을 준비한 걸로 아는데.”
“그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고, 이건 다른 사람이 준비한 선물이에요.”
그 사람이 체르노서라는 건 구태여 밝히지 않았다.
대신 그를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씩, 웃었다.
“이제야 날 보네.”
“……페르데스 님이 이상한 짓을 해서 그래요.”
“손등 키스가 이상한 짓이야? 그 남자가 말하길 사교계에선 흔히 있는 일이라던데.”
그건…… 그렇지.
할 말을 잃은 내가 고개를 돌리자 페르데스가 쿡쿡, 웃으며 팔짱을 끼라는 듯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 위에 가볍게 손을 얹고 직원을 따라 로즈 가든 안으로 들어갔다.
약 5분 정도 걸어가자 덩굴장미가 얽힌 커다란 여신상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귀족들이 보였다.
한쪽에는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고, 다른 쪽에는 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호화롭게 차려진 식탁이 있었다.
우리를 안내해 준 직원과 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웰컴 샴페인을 나눠 주었다.
나는 물론 페르데스에게도 웰컴 샴페인을 주려고 하자 손을 내저었다.
페르데스는 아직 성년이 아니었으니까.
무알코올 샴페인이라면 모를까, 웰컴 샴페인은 대부분 알코올이 있으니 그는 마시면 안 됐다.
“이쪽은 음료수로.”
“알겠습니다.”
잠시 후, 직원이 페르데스가 마실 음료수를 가져왔다.
그보다 한참 어린 꼬마 손님들과 같은 음료수를 먹게 된 페르데스가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나도 샴페인 먹을 수 있는데.”
“안 됩니다.”
“술이라면 이미 먹어 봤어.”
“그래도 제 앞에선 안 됩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페르데스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저기 봐요, 저기. 레오폴드 영애예요!”
뒤늦게 우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놀라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레오폴드 영애의 옆에 있는 남자, 혹시 4황자 전하이신가요?”
“맞아요, 맞아. 눈동자가 황금색이잖아요.”
“세상에. 그 황자 전하께서 저렇게 성장하셨다고요? 믿을 수 없어요.”
귀족들은 비루하고 볼품없었던 반푼이에 백치 황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성장한 페르데스를 보며 놀라워했다. 이곳저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내가 그를 키운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뿌듯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음료수를 마시는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그동안 검술 연습을 열심히 하느라 피부가 약간 그을린 덕분에 병약하거나 비실비실한 이미지는 완전히 벗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쑥쑥 자란 키와 큰 덩치도 한몫했다.
그 와중에 얼굴선이 곱고, 속눈썹이 웬만한 여자들보다 길어서 섬세하고 단아한 느낌을 풍기니 여자들은 그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인지 그 시선이 약간 기분이 나빠 나는 페르데스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의아해하며 날 돌아봤다.
“왜?”
그냥 기분이 나빠서 당겼다곤 말할 수가 없어, 잠시 생각했다가 그럴싸한 변명을 꺼냈다.
“랑쇼 후작 영애에게 인사하러 가요.”
“그래.”
다행히 페르데스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랑쇼 후작 영애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녀를 금방 발견했다.
그녀가 주인공이라는 걸 뽐내기라도 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했는데, 발견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파티가 무르익기 전에 문제의 샴페인을 그녀에게 전해 줘야 했기에 페르데스와 함께 그쪽으로 다가갔다.
등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은 양쪽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 줬다.
그건 후작 영애의 주변에 있던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우리를 발견한 후작 영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영애의 옆에는 여전히 떠나지 않은 한 중년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랑쇼 후작 부인이었다.
우리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후작 부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페르데스에게 인사했다.
“제 딸의 데뷔탕트를 축하하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페르데스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흔히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바보 같은 미소가 아닌, 뭇 여성의 마음을 흔들 만큼 매력적인 미소지으며.
“당연히 와야 하는 자리에 왔을 뿐이다.”
조금도 더듬지 않고, 예법까지 완벽하게 지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