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62)

67화

아델이 붉은 석양으로 물든 하늘을 등진 채, 우아하게 돌았다.

석양을 그대로 품은 듯한 붉은 머리칼이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나풀나풀 춤을 췄다.

그 모습이 나비처럼 아름다웠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더 아름다웠고.

춤을 추는 여자는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나.

……아니면 아델이라서 아름다운 걸까?

모르겠다. 여자가 춤을 추는 걸 봤어야 알지.

그가 본 건 알도르가 여자인 척하는 역겨운 모습뿐이었다.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는 거였다.

바람에 하늘거리며 흐드러진 붉은 머리칼이.

허공을 훑는 손동작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아서 페르데스는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델을 바라봤다.

솨아아아-

어디선가 바람이 잎사귀에 부대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아주 견고했던 무언가가.

“괜찮으세요?”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던 와중 문득 뺨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

그제야 정신을 차린 페르데스는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가 바로 아래에서 보이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페르데스 님?”

아델이 의아해하며 불렀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이상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페르데스는 이만 가 보겠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곧장 자신의 침실로 돌아온 페르데스는 세차게 닫은 문에 기대섰다.

그리고 아델의 손이 닿았던 뺨을 훑어 내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직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 뛰며 자꾸만 눈앞에 아델이 아름답게 춤을 췄던 모습이 그려졌다.

성년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어린아이라고는 할 수 없는 16살.

자아가 확립되고, 거기서 뻗어 나오는 감정들이 어떤 게 있는지 확실히 아는 나이였다.

그런데 이건 모르겠다.

그녀를 생각하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좋은 듯하면서도, 안타까운, 그리고 슬픈 이 기묘한 감정의 정체는 도대체 뭔지.

정말…… 모르는 건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바닥에 주저앉은 페르데스는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실소했다.

“……그럴 리가 없지.”

단순한 착각이었다.

지금 의지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어서.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갈 곳 잃은 마음이 기댈 곳이 필요해서.

그런데 마침 그녀가 있어서.

그녀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서.

그래서 이런 감정이 드는 것뿐이라고.

다른 의미는 전혀 없다고 페르데스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 * *

체르노서가 시종을 통해 문제의 샴페인을 보낸 건,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황자 전하께서 이전의 일을 사과하는 의미로 보내시는 겁니다.”

나는 시종이 내민 샴페인을 쳐다봤다.

겉보기엔 아무 이상이 없는 평범한 샴페인이었지만, 체르노서가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했다.

게다가 시종이 가져온 건 보통 축하하는 자리에서 많이 먹는 샴페인이었다.

아무리 체르노서가 멍청하다고 해도 황자였다.

그것도 황후의 소생인 적통 황자.

그런 그가 이런 기본 사실을 모를 리는 없고, 사과한답시고 날 놀리려는 게 분명했다.

막스 상단 일로 자존심 높던 황후가 사과하는 마당에 이런 장난을 치다니.

아주 조금은 황후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나는 샴페인을 받는 대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제게 사과하고 싶다면 좀 더 성의를 보이라고 황자 전하께 말을 전해 주세요.”

“성의……요?”

“네. 샴페인만 달랑 보내는 게 아니라, 사과의 편지 정도는 있어야죠.”

그게 없으면 절대 받아 주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이자 시종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메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돌려보내도 괜찮을까요, 아가씨?”

“괜찮아. 어차피 다시 돌아올 거거든.”

“사과의 편지를 들고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2황자 전하께선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잘못해도 사과하지 않기로 유명하신데…… 대단하세요, 아가씨.”

“그다지.”

이런 걸로 칭찬받아 봤자 기쁘지 않았다.

나는 시종을 맞이하느라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 소파에 내려놓고 침대에 앉았다.

“주무시게요?”

“응. 내일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니 오늘은 일찍 자려고.”

“그럼 2황자 전하의 시종이 오면 어떡하죠?”

“네가 맞이하면 되지.”

“제, 제가요?”

메이가 깜짝 놀라며 검지로 그녀 자신을 가리켰다.

“황자 전하께서 선물을 보내신 건데 일개 하녀인 제가 어떻게 그걸…….”

“괜찮아. 내가 잠자리에 들어서 어쩔 수 없이 대신 받는다며, 일어나면 전해 주겠다고 말하고 받으면 돼. 혹시 사과의 편지가 없으면 돌려보내고.”

“정말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여 주자, 메이는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 * *

예상했던 대로 내가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다시 찾아왔다.

본 건 아니지만, 메이와 시종이 약간 실랑이를 하는 게 두꺼운 문틈 사이로 들렸다.

“……아가씨께서 주무시는데 외간 남자를 함부로 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발을 동동 굴리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메이가 구구절절 옳은 소리만 하니, 시종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레오폴드 영애께서 일어나시면 꼭 전해 주게.”

그 와중에 메이에게 샴페인은 안겨 준 모양이다.

메이가 군말 없이 얌전히 받은 걸 보면 사과의 편지가 함께 온 모양이다.

나는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체르노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황후이거나, 아니면 시종 중 누군가 대필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눈을 뜨자마자, 나는 체르노서가 보낸 편지를 확인하고 조소했다.

편지에 적힌 필체가 체르노스의 필체와 상당히 유사하긴 하지만, 한때 그의 아내였던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거 잘 챙겨 두세요.”

그런데도 군말 없이 받아 알도르 경에 내민 건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체르노서가 직접 쓴 편지가 아닌 건 약간 아쉬웠지만, 그뿐이었다.

저것도 충분히 계획에 이용할 수 있으니, 믿음직한 알도르 경에게 보관을 맡기고 랑쇼 후작 영애의 데뷔탕트에 갈 준비를 했다.

신년제나 건국제 같은 파티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볼 것 없이 마음껏 꾸며도 됐다.

그러나 데뷔탕트처럼 주인공이 정해진 파티는 아니었다. 주인공보다 화려하지 않게 꾸미는 게 예의였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핀과 액세서리에 약간 힘을 주었다.

그렇게 준비가 거의 끝날 때쯤, 페르데스가 찾아왔다.

페르데스는 머리를 말끔하게 넘기고, 나와 세트로 맞춘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준비 다…….”

그는 들어오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섰다. 눈이 약간 동그래졌다.

“왜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페르데스는 놀란 와중에도 말을 느리게 하며 연기를 했다.

“영애가…… 너무 예뻐서 놀란 거야.”

이건 진심인 걸까. 아니면 연기인 걸까.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체르노서의 일로 칭찬을 받았을 때보다 기쁘다는 거였다.

“고마워요. 페르데스 님도 오늘 정말 멋지세요.”

내 말에 페르데스는 쑥스러운 듯 귓불을 붉히며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이런 연기조차 완벽하게 한다니. 대단했다.

새삼 그의 연기 실력에 감탄하며 뒤따라 들어온 에런 경에게 부탁했다.

“준비가 거의 끝났으니 페르데스 님과 함께 홀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아가씨.”

“그럼 있다가 다시 봐요, 페르데스 님.”

“으응.”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서둘러 마무리를 하고 페르데스가 기다리는 홀로 내려갔다.

“이렇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좋구나.”

그러나 페르데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예전에도 이러고 다녔으면 참 좋았을 텐데.”

황태자도 함께였다.

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중앙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황태자를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황태자가 내 쪽을 돌아봤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부딪쳤다.

“레오폴드 영애.”

황태자는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달콤하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얼른 이쪽으로 내려오라는 의미였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페르데스 혼자 호랑이 굴 앞에 던져둘 수는 없으니 일단 내려가 그들의 앞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레오폴드 영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럭저럭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잘 지내신 것 같네요.”

“영애 덕분에요.”

“제 덕분이라뇨.”

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니라 아버지 덕분에 잘 지내신 거겠죠.”

“……!”

“아버지께서 그 자신을 희생하며 황태자 전하를 구해 주셨으니, 부디 뜻깊게 살아 주셨으면 합니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말에 황태자의 표정은 순간 구겨졌지만, 금방 수습하고 내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레오폴드 공작이 구해 준 이 목숨, 평생 제국을 위해 쓸 생각입니다.”

그래서 요즘 열심히 정치 공부를 하고 있다며 황태자가 그의 노력을 피력했다.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은 어차피 3년 뒤에 죽을 거라고.

그러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그러시군요.”

그러나 지금 그 사실을 말해 봤자, 황태자에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할 테니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날이 오면, 그때 잔뜩 비웃어 줘야지.

……그때까지 내가 무사히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이야기지만.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영애가 오늘 열리는 랑쇼 후작 영애의 데뷔탕트에 참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황태자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제게 영애를 에스코트할 영광의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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