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메이를 내보내고, 나는 페르데스를 찾아갔다.
황제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여기서도 변수가 발생했다.
“아직 페르데스 님이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내 질문에 에런 경이 대답했다.
“네, 아가씨.”
나보다 먼저 황제를 만나러 갔던 페르데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니.
황제가 그에게 시킬 게 많아서 여태 붙잡고 있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됐다.
내가 페르데스의 침실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에런 경이 물었다.
“페르데스 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한 번 알아볼까요?”
“알아볼 수 있나요?”
“황궁 기사 중에 아카데미 동기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물어보려고요.”
아, 그러고 보니 전에 알도르 경도 그렇게 5황자의 정보를 알아냈었지.
“괜찮아요.”
솔깃한 제안이긴 하나 황제궁을 파고드는 건 위험했다.
자칫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는 걸로 오해를 받아 잡혀갈 수도 있으니 거절했다.
“페르데스 님이 돌아오시면 곧장 저한테 알려 주세요, 에런 경.”
“네, 아가씨.”
방으로 돌아와 에런 경이나 페르데스가 오길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혹시 에런 경이 알려 주는 걸 잊은 건가 싶어 확인하러 갔으나, 그건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나는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며 생각했다.
에런 경에게 조사해 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랬다가 에런 경한테 불똥이 튀면 어떡해.
그렇다고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하면…….
“……내가 직접 가 볼까?”
생각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내가 문을 열기도 전에 밖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페르데스 님!”
문을 연 사람은 페르데스였다.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을 보니 안도감, 반가움, 기쁨 등 마음속에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페르데스의 뒤로 에런 경도 보였다.
에런 경이 들어오려고 하자 페르데스가 막았다.
“들어오지 마.”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상당히 낮았다.
페르데스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닫고, 날 바라봤다.
황금색 눈동자가 무척 지쳐 보였다. 슬퍼 보이기도 했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
황제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는데, 페르데스가 날 와락 끌어안았다.
“읏.”
어찌나 세게 끌어안는지, 나는 뒤로 밀려나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바닥에 깔린 카펫이 푹신해서 충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덩달아 주저앉은 페르데스는 내가 마치 구원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날 계속 안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렸다.
황제궁에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 보네.
나는 페르데스가 진정할 수 있게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도움이 됐는지 어깨의 잔떨림이 점차 가라앉았다.
페르데스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황제가 내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
“페르데스 님의 어머니요?”
“응.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누가 어머니를 죽였는지도 말해 주더라.”
“네……?”
이게 무슨 소리지?
페르데스의 모친은 그를 낳고, 산후열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등졌을 텐데?
“어머니는 날 낳은 뒤, 산후열에 시달리셨대.”
역시 내가 알고 있는 게 맞았다.
“그렇지만 약을 제때 쓰면 살 수 있었대.”
“…….”
“살 수 있었는데, 약을 한 번만 제대로 써도 살 수 있었는데…… 2황비가 약을 쓰는 걸 막았다고 하더라.”
내 등을 끌어안은 그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아들을 일개 하녀 따위가 낳은 게 질투가 나서 그런 짓을 했대.”
허. 고작 질투심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다니.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혔지만, 없는 일은 아니었다.
특히 황위 다툼이 심한 황궁에선 자주 있는 일이었다.
상대가 가진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2황비처럼 단순히 질투심에 죽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렇다 보니 황궁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황궁이 악마가 없는 지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페르데스는 계속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잭의 일 때문에 힘든 사람한테 그딴 이야기를 해 주다니.
물론 어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이니 아들인 그가 알아야 하는 게 맞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동시에 황제가 페르데스에게 왜 저런 이야기를 해 준 건지 궁금했다.
짐작 가는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페르데스에게 상황 설명을 좀 더 들으면, 황제가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 그걸 물어보기엔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다.
적어도 페르데스가 진정할 때까진 기다려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등을 계속 토닥여 주었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 * *
나를 꼭 끌어안고 있던 페르데스가 떨어진 건, 메이가 저녁 식사 여부를 물어보기 위해 노크했을 때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소파에 앉는 페르데스를 곁눈질로 흘겨보곤, 밖으로 나갔다.
메이에게 지금 페르데스의 모습을 보여 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밖에는 메이뿐만 아니라 알도르 경과 에런 경도 있었다.
“저녁 식사는 침실에서 할 테니 페르데스 님 것도 같이 준비해 주렴, 메이.”
“네, 아가씨.”
“그리고 솜사탕을 구할 수 있을까?”
기차역에서 페르데스가 솜사탕을 먹고 좋아했던 걸 떠올리며 묻자 메이가 말했다.
“글쎄요. 한번 주방에 물어보고, 안 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메이를 보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에런 경이 물었다.
“페르데스 님은 괜찮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페르데스는 쓰러지다시피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 옆에 조심히 다가가 앉자, 페르데스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봐?”
“무엇을요?”
“황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한 건 없는지, 그리고 내가 거기서 어떻게 반응했는지 등등, 물어볼 거 많잖아.”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건가요?”
“물어본다면.”
“됐어요.”
내 대답에 페르데스가 눈을 뜨고 날 쳐다봤다.
“왜 안 물어보는 건데?”
“페르데스 님의 기분이 안 좋으시니까요. 좀 괜찮아지면 그때 물어볼게요.”
내 대답에 페르데스가 픽, 웃었다.
“안 물어보겠다곤 안 하네.”
“제가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물어봤으면 좋겠어.”
페르데스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그래서 나한테 이런 끔찍한 기분을 안겨 준, 황제에게 꼭 복수해 줬으면 좋겠어.”
“그건 약속해 드릴 수 있어요.”
절 믿어 주세요. 그리 말을 덧붙이자 페르데스가 서글프게 가라앉은 얼굴 위로 옅은 미소를 그렸다.
“머리…… 쓰다듬어 줄래?”
그러더니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그는 볼을 긁적이며 두서없이 변명했다.
“그냥.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더니 사람의 체온이 그리워서. 그래서 그런 거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페르데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대신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 건 아니에요.”
“그럼 어떤 눈으로 봤는데?”
그야 가엽고, 불쌍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봤었지.
솔직하게 말하기엔 그를 너무 동정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가 기분 나빠 할까 봐 나는 대답하는 대신 페르데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대답을 회피한다는 걸 바로 눈치챈 페르데스가 내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내게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쓱쓱,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 틈 사이로 흘러내렸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그의 머리칼은 정말 부드러웠다. 진짜 강아지 털 같았다.
“제 머리칼보다 페르데스 님의 머리칼이 더 부드러운 것 같아요.”
“그래서 좋아?”
“네, 좋아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강아지 털 같아서 좋다는 건 빼고.
그러자 페르데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잘해야겠네.”
* * *
저녁 식사가 끝나고 메이는 후식으로 내가 부탁한 솜사탕을 가져왔다.
봄의 궁 주방장의 뛰어난 솜씨는 솜사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곰 모양의 아주 예쁜 솜사탕은 색깔 배열도 예쁘게 잘 되어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페르데스는 솜사탕을 보자마자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영애 짓이지?”
“무슨 말씀인지?”
“솜사탕 말이야. 영애가 만들어 오라고 한 거지?”
“네.”
나는 솜사탕을 페르데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드시고 기분 푸세요.”
페르데스의 입술 끝이 실룩거렸다.
“영애는 내가 진짜 어린아이인 줄 아나 봐.”
“아니었나요?”
“이렇게 큰 어린아이 봤어?”
페르데스가 키 자랑을 하려는 듯 일어섰다.
확실히 키나 덩치만 보면 어린아이가 아니었지만, 그럼 뭐 해. 말과 행동이 어린아이인데.
거기에 한 손에 곰 모양의 솜사탕을 꽉 쥐고 있으니, 더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키와 덩치가 크더라도 저보다 어리시니 어린아이죠.”
그렇게 말하면 페르데스가 삐질 수도 있으니 둘러 말했다.
“그래도 어린아이는 아니야.”
“성인도 아니죠. 페르데스 님은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았으니까요.”
할 말이 없는지 페르데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가 준 솜사탕을 빤히 바라보다가 쿡쿡 찔렀다.
푹신한 솜사탕은 페르데스가 찌르는 대로 꾹 눌러졌다.
“먹는 것으로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장난친 적 없어.”
“지금 치고 계시면서.”
“독이 들었나 확인해 본 것뿐이야.”
“그런 게 들었을 리가 없잖아요.”
독하니까 생각난 건데, 체르노서는 언제 샴페인을 보내는 거지?
벌써 해가 지고, 저녁까지 먹었는데.
혹시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건 아닌지 생각하고 있는데 입 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