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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262)

64화

생을 몇 번 반복하면서 황후궁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후와 독대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녀의 친아들인 체르노서와 결혼했을 때도, 황후는 나를 따로 부르지 않았다.

어차피 쓰고 버릴 카드인데,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한데 지금 나를 부른 건 막스 상단 때문이 분명했다.

막스 상단의 주 사업은 마법사의 탑에 퓨라 같은 마정석을 공급해서 마법 도구를 만들어 파는 중개업이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대부분 황후가 그녀의 편을 만드는 자금줄로 쓰였다.

그런데 내가 퓨라를 팔아 주지 않으니 애가 닳을 만했다.

물론 다른 마정석을 사도 되지만, 퓨라만큼 효율이 좋지 않아 좋은 마법 도구를 만들 수 없었다.

다른 지역에서 생성되는 퓨라 역시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생성되는 것만큼 효율이 좋지 않았다.

막스 상단에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담당 관리에게 항의 편지를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황후도 내게 편지를 보낼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보내지 않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다른 마정석을 쓰려고 결정을 내린 걸까?

의아했는데, 내가 수도로 올 걸 예상하고 가만히 있었던 거였구나.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쪽이 편지를 보내는 것보다 더 영향력이 있을 테니까.

황후는 각양각색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장미꽃에 둘러싸인 가제보 아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황후의 복장은 알현실에서 봤을 때보단 수수했지만, 여전히 화려했다.

그녀가 제국의 퍼스트레이디인 황후인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가 가제보 위로 올라가자, 황후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얼굴에 장미꽃만큼이나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어서 오세요, 레오폴드 영애.”

“고귀하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내가 격식을 갖춰 인사하자 황후가 손을 내저었다.

“이제 가족인데, 그렇게 격식을 차려 인사할 필요 없답니다.”

가족, 인가. 첫 번째 생에서도 듣지 못했던 단어를 지금 들으니 몹시 웃겼다.

“자, 여기 앉으세요.”

“네, 황후 폐하.”

시종이 빼 준 자리에 앉자, 시녀가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을 채웠다.

쪼르륵, 찻잔이 채워지는 걸 보고 있는데 황후가 말했다.

“일단 고맙다는 인사와 사과부터 해야겠네요.”

황후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꼭 잡았다.

“황태자를 구해 줘서 정말 고맙고, 그 때문에 영애의 부친을 빼앗은 걸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참. 빨리도 사과하네.

아버지가 황태자 때문에 돌아가신 게 2월이었고, 지금은 6월이었다.

4개월이나 지나서 받은 사과는 김이 빠진 맥주처럼 밍밍했다.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딴 맛없는 맥주를 먹은 게 화가 났다.

나는 속이 비틀어진 만큼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녀에게 잡힌 손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는 척하며 뺐다.

“황태자 전하께선 제국의 차기 태양이 되실 분. 그런 분을 구한 걸 저는 물론 아버지도 영광스럽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마음이 한결 놓이네요.”

황후도 화답하듯 웃으며 보기만 해도 단 케이크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황후궁의 최고 주방장이 만든 특제 케이크예요. 영애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으니, 먹어 봐요.”

권유에도 내가 먹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자 황후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 영애를 부른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이제 가족이 됐으니 사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거랍니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잘하네.

“그러니 긴장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있어도 돼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마음이 놓이네요.”

나는 그제야 포크를 들며 말을 이었다.

“사실 막스 상단 문제 때문에 절 부른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대화를 빙빙 돌리며 황후의 애간장을 태워 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런 쓸데없는 것에 내 시간을 낭비하는 게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어머, 그랬군요.”

정곡을 찔렀는데도, 황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막스 상단이 내 친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이긴 하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는 곳이랍니다.”

온통 거짓말로 덧칠된 말은 귀에 담기에도 역겨웠다.

“그래도 조금 궁금하긴 하네요.”

하늘을 품은 듯한 푸른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황후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그야말로 동화 속에 나온 공주님처럼 생겼다.

성격은 공주님처럼 착하지 않았지만.

“어째서 막스 상단에 퓨라를 팔지 않는 거죠?”

“글쎄요…….”

나는 말끝을 흐리며 케이크를 크게 한 입 떠먹었다.

특별하게 준비한 케이크라더니, 정말 맛있었다. 레시피를 알아내서 레오폴드 공작저의 요리사에게도 알려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것보다 더 달콤한 건, 애타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황후의 눈빛이었다.

황후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도 차를 마시고,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대답했다.

“왜 그런지는 담당 관리에게 물어봐야겠네요.”

“…….”

찰나의 순간이지만, 황후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황후는 마음을 가다듬으려는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말해 주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하지 말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왜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야 최고 결정권을 가진 영애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요.”

“어머나, 그걸 알고 계셨군요. 그런데 왜 막스 상단주는 제가 아닌 관리자에게만 편지를 보냈을까요?”

“그……!”

“황후 폐하께서 아시는 걸 막스 상단주가 모를 리는 없고.”

내 질문에 황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무시하고 말을 계속 이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대답을 들으려고 물어본 게 아니었으니까.

“혹시 막스 상단주는 제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고 보내지 않은 거 아닌가요?”

“…….”

“그렇다는 건 황후 폐하께서도 아신다는 의미이고…… 그런데 그분께서 여태 조용하신 게 참 이상하네요.”

내가 말하는 그분이 체르노서라는 걸 모를 리가 없는 황후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딱딱하게 굳었다.

“……그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하겠어요.”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하는 거지요.”

이걸로 황후가 어렵게 한 사과를 거절하면서.

체르노서가 사과할 때까지 절대 막스 상단에 퓨라를 팔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보였다.

물론 체르노서가 사과해도 팔 생각은 없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니 빼놓고.

숨은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황후가 살벌한 눈으로 날 노려봤다.

나는 눈웃음으로 시선을 받아치며 일어섰다.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후가 구질구질하게 붙잡으면 그것도 비웃으려고 했는데, 황후는 그러지 않았다.

그걸 아쉬워하며 황후궁을 나오자 입구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던 알도르 경이 다가왔다.

알도르 경은 나와 같이 왔지만, 호위 기사는 궁에 들어갈 수 없다며 황후궁 기사들이 막는 바람에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괜찮아요. 오히려 기분이 무척 좋은걸요?”

알도르 경은 내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나는 알도르 경의 어깨를 토닥여 준 뒤, 봄의 궁으로 돌아갔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날 발견한 메이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들어와.”

알도르 경은 밖에 두고 메이만 방에 들였다.

메이는 방문을 닫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부재중이실 때, 2황자 전하께서 오셨어요.”

“2황자가?”

설마 막스 상단의 일 때문에 내게 사과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로 왔는데?”

“찾아온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어요. 대신…….”

메이는 굳게 닫힌 문을 슬쩍 쳐다보곤, 말했다.

“곧 샴페인을 보낼 테니 그 샴페인을 무조건 아가씨와 4황자 전하께 먹이라고 했어요.”

체르노서가 보낸 샴페인이라.

말만 들어도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그나저나 체르노서가 메이한테 그런 부탁을 했다고?

“2황자는 네가 전에 그의 임무를 실패한 하녀라는 걸 몰라본 거야?”

“네. 새카맣게 잊으신 것 같아요.”

허어, 얼마나 머리가 나쁘면 그걸 잊는 거지?

아니지. 하녀인데다가 한 번 쓰고 버릴 패라서 처음부터 눈여겨보지 않은 것일 수도.

어쨌거나 체르노서가 메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천운이었다.

만약 체르노서가 그녀를 알아봤다면, 괜한 성질을 부렸을 수도 있으니까.

동시에 메이를 미리 섭외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체르노서가 보낸 샴페인을 먹었을 테니까.

“그것 말고 다른 말은 없었어?”

“네. 아, 만약 실패하면 가만히 안 둘 거라고 협박하긴 했어요.”

그러니까 메이를 구하려면 샴페인을 무조건 먹어야 한다는 거구나.

평소에는 멍청하면서 이런 곳에는 잔머리를 잘 굴리네, 체르노서.

“아가씨, 어떻게 하죠……?”

메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가 그냥 샴페인을 버리거나, 그런 분류의 선택을 해서 체르노서에게 혼날 걸 걱정하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 네가 2황자에게 혼날 일은 없을 테니까.”

“정말인가요?”

“그래.”

이미 그 샴페인을 어떻게 쓸지 생각해 두었다.

“네가 날 배신하지 않는 이상, 내가 널 버리거나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메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아가씨만, 믿고 따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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