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메이가 아델의 하녀로 정식 발령을 받은 건 그날, 늦은 오전이었다.
전출당했던 하녀가 다시 복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전출당했다는 건 윗사람의 눈 밖에 벗어났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런데 다시 돌아가는 건 물론, 그 소식을 하녀장인 소피아가 직접 전하러 왔으니 다들 놀라워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메이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델이 늦어도 정오 전까진 다시 부를 거라는 말과 함께, 발령 소식을 소피아가 직접 전하러 올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예? 보통 발령 소식은 하급 하녀가 알려 주는데요.”
이에 메이가 당황하며 묻자, 아델이 웃으며 대답했다.
“보통은 그렇지만 이번은 좀 특별해서 말이야. 그러니 소피아 하녀장이 직접 찾아와서 이렇게 말할 거야.”
“네가 가여워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려고 한다.”
“메이가 가여워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려고 한다…… 이렇게 말이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똑같은 말에 메이는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피아는 메이가 겁을 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조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단다. 이번에 네가 해야 할 일은 예전과 달리 아주 쉽거든.”
“해야 할…… 일이요?”
“그래. 예전처럼 너만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일이 있단다.”
“그리고 너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있다며 하녀 일 말고 다른 임무를 맡길 거란다.”
어쩜 하는 말마다 아델이 한 말과 이리 똑같을까.
이쯤 되니 소피아가 아델의 명령을 받고 온 건 아닐까, 의심이 잠깐 들었다가 사라졌다.
아델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아델 레오폴드 영애의 시중을 들면서 밀착 감시하렴.”
그녀 자신을 감시하는 명령을 내릴 리가 없었다.
이 역시 아델에게 미리 들었던 이야기인지라, 전혀 놀랍지 않았지만.
“저, 전 못 해요!”
메이는 처음 듣는 척,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다.
“마, 만약 또 실수하면 그땐 세탁실보다 더한 곳으로 보내실 거잖아요.”
“그럴 일은 없을 거란다.”
거짓말. 진심이 한 스푼도 담기지 않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미 한 번 버림받은 제게 저딴 말을 하다니.
그만큼 저를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한다는 의미이니 메이는 소매 속에 숨긴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역시 아델의 손을 잡기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만약 하지 못하겠다면, 넌 앞으로도 계속 세탁실에서 썩어야 할 거다. 그래도 괜찮겠니?”
“그, 그건…….”
메이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치자 소피아가 다시 달콤하게 그녀를 꼬드겼다.
“하지만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낸다면 다음 진급 때 상급 하녀로 올려 주마.”
상급 하녀는 평민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직위였다.
상급 하녀만 돼도 연봉부터 대우 등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래서 메이는 한때 상급 하녀가 되고 싶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보다 더 좋은 길이 열렸으니까.
메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딴 제안을 하는 소피아를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겉으론 아주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받아들일게요!”
* * *
“메이?”
“전에 사계의 정원에 저랑 같이 갔던 하녀인데, 기억나세요?”
“아, 그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던 하녀 말이지?”
체르노서에게 얻어맞느라 정신이 없는 데다가, 딱 한 번 본 건데 용케 기억하네.
“그런데 그 하녀를 영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네. 그 하녀가 저와 페르데스 님의 식사를 전담할 거예요.”
“흐음?”
페르데스는 콧소리를 내며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흑색 나이트로 내 흰색 폰을 잡아먹었다.
“체르노서의 첩자 노릇을 했던 하녀한테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고? 위험하지 않겠어?”
나는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며 흰색 폰을 한 칸 전진시키며 대답했다.
“전혀요. 그 아이는 체르노서의 첩자 노릇을 했던 게 아니라, 명령을 받았던 것뿐이에요. 일개 하녀는 황자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죠.”
“그렇긴 한데…… 체크.”
이런. 언제 내 진영에 파고든 거지.
나는 룩으로 킹을 보호한 뒤, 역공하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체크메이트.”
“끙.”
체크메이트가 된 순간부터 희망 같은 건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체스판을 쳐다봤다.
그러나 없는 희망이 갑자기 솟아날 리가 없었다.
“졌어요.”
“5판 중 내가 3판을 이겼으니까, 결론적으로 내가 이긴 거 맞지?”
“맞아요.”
“좋았어!”
페르데스가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면 난 조금 떨떠름했다.
페르데스가 좋아하는 것 때문이 아닌, 내가 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도 체스를 배운 지 이제 겨우 한 달도 채 안 된 그에게.
더구나 초반에는 내가 연속으로 이겼던 터라, 당연히 내가 이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는데, 세 번째 판부터 페르데스의 수를 읽기가 어려워졌다.
반대로 페르데스는 내 수를 훤히 읽고 움직였다.
그렇게 세 번째 판부터 내리 졌고, 최종 결과는 보다시피 페르데스의 승리였다.
“이번에 체스를 처음 배우는 거 맞아요?”
“당연한 걸 묻네. 백치라고 소문난 나한테 체스를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이리 잘해요? 재능이 있는 건가?”
“그렇다기보다 경우의 수를 잘 계산해서 그런 것 같은데.”
“경우의 수요?”
“응. 이것도 일종의 수학이니까. 첫 번째 판과 두 번째 판을 통해 영애가 어떤 수를 쓰는지 파악하고, 거기에 경우의 수를 대입해서…….”
머리가 아프고,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나는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그만 이야기해도 돼요.”
페르데스가 웃었다.
“뭐야. 수학에 약한 거야?”
“약하진 않아요.”
“그렇다고 믿어 줄게.”
정말이지 얄밉다니까.
내가 흘겨보자 페르데스는 내 시선을 피하며 체스판을 정리했다.
“그나저나 황제가 아직 소식이 없네. 바로 부를 줄 알았는데.”
그러면서 유연하게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따로 연락 온 거 없지?”
“네. 없어요.”
“흐음. 저녁에 부르려나.”
페르데스는 자기 전에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보면 꿈자리가 흉흉해진다고 투덜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페르데스 님을 부를 테니까요.”
“……그 말 좀 무섭다?”
“자기 전에는 황제를 보기 싫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페르데스 담당 하인이 들어왔다.
“황자 전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페르데스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덩달아 일어선 내게 거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리게 말했다.
“다녀올게.”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다녀오세요, 페르데스 님.”
내가 페르데스의 이름을 부르자 하인이 약간 놀라며 날 흘겨봤다.
난 그런 하인에게도 웃어 보인 뒤, 그들보다 먼저 방을 나와 내 침실로 돌아갔다.
* * *
안 그래도 좁쌀만큼 좁았던 체르노서의 입지는 아델을 만난 뒤로 더 좁아졌다.
다이몬은 체르노서가 그가 내린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가차 없이 버렸고, 다시 찾지 않았다.
그건 상관없었다. 그는 원래 황제의 관심을 받지 못한 황자였으니까.
다이몬은 자식일지라도 철저하게 그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만 관심을 주고 아꼈다.
그러니 다이몬이 자신을 찾지 않는 건 괜찮았지만, 문제는 그의 유일한 구원이었던 황후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황후가 체르노서를 외면하는 이유는 그가 아델에게 사과하라는 부탁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제가 왜 그 여자에게 사과해야 합니까? 오히려 그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 절 가지고 놀았으니까요!”
체르노서가 항의하자 황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유를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황자. 황자가 아델 레오폴드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이 어미의 친가에서 운영하는 막스 상단이 어려워집니다.”
“퓨라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다른 곳에서 구하면 되지요.”
“황자.”
“싫습니다. 저는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겁니다.”
체르노서가 단호하게 나오자, 화가 났는지 황후도 인상을 쓰며 말했다.
“사과할 마음이 들 때까지 두 번 다시 이 어미를 찾아오지 마세요.”
순간 화가 나서 저런 말을 한 거라고.
화가 풀리면 다시 예전처럼 저를 대해 줄 거라고, 체르노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황후는 며칠이 지나도 체르노서를 찾지 않았다.
체르노서가 찾아가도, 하녀를 통해 아델에게 사과할 마음이 들었냐고 묻고 아니라고 대답하면 만나 주지 않았다.
‘모두 아델 레오폴드, 그 여자 때문이야.’
아델을 만나고 잘 풀린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엉망진창이 됐다.
푸시크 토벌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체르노서는 실력도 없는데 오만하고 거짓말까지 하는 황자로 소문났고.
거기에 페르데스에게 밀린 일까지 더해져, 백치보다 못하다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내가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어떻게든 그 여자에게 당한 걸 복수해 주리라.
그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체르노서는 아델과 페르데스가 황궁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봄의 궁으로 향했다.
“둘 다 없다고?”
그런데 하필 두 사람 다 부재중이었다.
“어딜 간 거지?”
“레오폴드 영애께선 황후 폐하를 만나러 가셨으며, 4황자 전하께선…….”
“4황자 전하?”
페르데스가 아델과 약혼하기 전까지 그를 황자 전하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치, 반푼이가 주된 표현이었고, 그나마 조금 존중해 주는 사람은 4황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하녀가 페르데스를 4황자 전하라고 존칭하니, 체르노서가 입술을 비틀며 팔짱을 꼈다.
“언제부터 그 녀석을 황자 대접해 줬다고, 황자 전하라고 부르는 거지?”
“소, 송구합니다, 전하.”
하녀가 황급히 사과했지만, 체르노서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하녀가 페르데스를 황자 전하라고 불렀다는 건, 그와 자신을 똑같이 취급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게 기분 나빠서 하녀에게 뭐라고 하려던 체르노서는 다른 좋은 방법을 떠올라 웃으며 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하녀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메이라고 합니다. 황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