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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262)

62화

황손이 많이 태어날 걸 생각해서 항상 넉넉히 준비해 두는 내궁에 준비된 궁이 없다니.

지나가던 개도 웃지 않을 만한 개소리였다.

내가 황궁의 사정을 모른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하여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머무시게 된 걸, 황후 폐하께서도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진짜 내궁에 들어가고 싶은 게 아닌, 그들을 골탕 먹이고 싶은 마음에 한 말인지라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넘겼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머무실 침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황제가 페르데스에게 약을 먹여 공동 침실에 밀어 넣는 기함할 짓을 벌였던 만큼.

여기서도 같은 침실을 쓰라거나 비슷한 개짓거리를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그뿐일까. 내 침실은 봄의 궁 동쪽 복도 끝, 페르데스의 침실은 서쪽 복도 끝으로 완전히 떨어뜨려 놓았다.

‘무슨 생각이지?’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황제의 의중이 가늠되지 않아 두려웠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황제?

“환복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생각하고 있는데, 소피아가 보낸 하녀가 들어왔다.

하녀의 얼굴에 촘촘히 박힌 주근깨를 보니 메이가 떠올랐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문득 메이의 근황이 궁금해져 하녀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메이, 맞지?”

진짜 이 하녀가 메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닌, 슬쩍 떠보기 위한 밑밥이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제 이름은 아바에요.”

“아, 미안. 메이랑 비슷하게 생겨서 착각했어.”

“괜찮습니다. 메이랑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하고요.”

“메이랑 친해?”

“그럼요, 아가씨. 지금은 메이가 봄의 궁에서 일하지 않지만, 일할 때만 해도 가장 친했어요.”

지금 메이는 이곳에 없는 건가.

“하녀 일을 그만둔 거야?”

“아니요. 메이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세탁실로 전출됐어요.”

세탁실 같은 곳은 막 궁에 들어온 신입 하녀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전출되다니.

전에 체르노서의 심기를 거스른 게 문제가 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 원인을 그녀가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그뿐이었다.

메이를 구해 줄 생각은 없었다.

환복을 끝낸 나는 페르데스를 찾아갔다.

그와 내 사이가 좋다는 걸 궁인들에게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내게 하녀가 배정된 것처럼 페르데스에게도 하인이 배정됐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하인은 곁눈질로 쓱, 쳐다봤지만.

“오셨네요, 아가씨.”

“네.”

그 옆에 있는 에런 경의 인사는 환하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극명한 온도 차이에도 하인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네.

평범한 하인은 아니라는 의미이니 나는 그의 얼굴을 눈에 새겨둔 뒤, 안으로 들어갔다.

페르데스는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창틀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그가 고개만 돌려 날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제가 정말 무슨 일 때문에 찾아온 건지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닌지 페르데스는 어깨를 으쓱이곤, 창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자, 나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똑똑-

그와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아까 봤던 그 하인이 차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그는 소파 테이블에 세팅을 한 뒤, 공손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페르데스가 찻주전자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독이 들어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절대 아닐 거예요.”

“어떻게 그걸 확신해?”

“황제가 원하는 건 황가와 레오폴드 공작가의 피가 섞인 아이예요. 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진 절대 저를 죽이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아닌 ‘저’라고 표현한 건, 페르데스는 죽어도 대신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령 체르노서와 이안이 그 대신할 사람에 속했다.

정 급하면 황태자를 들이밀 수도 있고.

그러나 나는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내가 죽으면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통은 완전히 끊긴다.

……잠깐만.

그러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생에서 황제는 왜 날 죽인 거지?

두 번째 생이야 알도르 경을 구하다가 잘못된 거라 그렇다 쳐도, 세 번째 생의 결과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중에 이 부분을 되짚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티스푼을 들었다.

티스푼은 독을 감별하기 위해 은으로 만들었다.

“이걸 찻물에 넣어보죠.”

페르데스가 입술을 비틀었다.

“은으로 감별 안 되는 독을 열 개는 댈 수 있어.”

“고작 열 개인가요? 전 스무 개는 더 댈 수 있는데.”

“그래. 잘났다, 잘났어.”

페르데스가 콧방귀를 끼며 팔짱을 꼈다.

“난 그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겠어.”

“그래도 상관없지만, 황궁에 이틀 동안 머물 건데 그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게요?”

“응.”

“배고플 텐데요.”

“괜찮아. 고작 이틀인데, 뭘.”

이틀이 고작이구나.

그만큼 많이 굶어봤다는 의미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에런 경에게 따로 음식을 구해달라고 할게요.”

“괜찮아. 번거롭게 그러지 않아도 돼.”

“제가 안 괜찮아요. 겨우 살찌워놨는데, 다시 빠지면 안 되죠.”

페르데스가 픽, 웃었다.

“누가 들으면 날 살찌워서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네.”

“그럴 생각도 있답니다.”

“뭐?”

페르데스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웃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알도르 경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차를 마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아가씨.”

시선이 저절로 찻주전자에 향했다.

“하인이 저 차에 미약을 탔습니다.”

독은 타지 않았어도, 약은 탔다는 건가.

하인이 차에 미약을 왜 탔는지는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가 시켰겠지.

“왜 그래?”

“아니요, 아무것도.”

안 그래도 황궁에서 주는 음식에 대한 불신의 뿌리가 깊은 페르데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는 건 별로 안 좋을 것 같아 숨겼다.

“전 이만 가 볼게요.”

대신 일어서자 페르데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야, 벌써 가? 이야기하러 온 거 아니었어?”

“생각해 보니,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내일 이야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오래 앉아 있었는데,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 바로 나왔다.

“에런 경, 차를 치워주세요.”

뒤처리는 에런 경에게 맡겼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내 눈에 띈 건 협탁에 있는 주전자였다.

자다가 목이 마르면 바로 마실 수 있게 물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저 물에는 아무것도 타지 않았을까?

장담하건대 무언가를 탔을 것이다. 그게 미약일 가능성은 매우 컸다.

“대책을 구해야겠네.”

알도르 경이나 에런 경에게 따로 음식을 구해달라고 해도 되지만.

그러면 황제가 필시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그럴 수가 없었다.

같은 이유로 페르데스가 말한 것처럼 무식하게 굶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황제의 손을 타지 않은 궁인을 섭외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날이 밝자마자 알도르 경의 도움을 받아 몰래 봄의 궁을 빠져나왔다.

황제의 손을 타지 않은 궁인을 섭외하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황제에게 버림받은 궁인이었다.

황궁 안이라고 생각하기엔 다소 허름한 길을 걸어가자 우물을 끼고 있는 세탁실이 나왔다.

첨벙, 첨벙-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한 여자가 열심히 이불 빨래를 하고 있었다.

바로 메이였다.

나는 메이가 빨래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녀가 지쳐 주저앉을 때쯤 다가갔다.

“아, 아가씨?”

오랜만에 본 건데도 내가 누군지 바로 알아본 메이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여긴 어떻게…….”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궁금한 거요?”

“힘들지?”

대답을 질문으로 돌려 주자 메이가 움찔했다.

“여기서 일하는 거 많이 힘들지?”

“그게…….”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난 네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어서 온 거니까.”

메이는 잠시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힘들어요.”

메이의 일그러진 눈에 억울함과 분노 등 안 좋은 감정들이 고였다.

그것들은 곧 눈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힘들어요.”

“그럼 내가 구해 줄까?”

“……네?”

메이가 눈물을 흘리다 말고 놀라며 날 쳐다봤다.

“물론 공짜는 아니야. 내가 널 구해 주는 대신, 너는 날 위해서 일해야 해.”

“왜 저한테 그런 제안을…….”

그야 넌 버려진 패니까.

메이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를 버린 사람에게 다시 붙을 리가 없으니 내 수족으로 쓰기엔 그녀가 딱 좋았다.

“그게 중요해? 중요한 건 내가 널 이곳에서 꺼내 줄 수 있다는 거지.”

“아가씨…….”

“만약 내 손을 잡는다면, 널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꺼내 주는 것뿐만 아니라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데리고 갈게.”

시원하지만 인위적인 바람이 불어와 메이의 뺨과 머리에 묻은 거품을 훔쳐 갔다.

“그러니 날 위해 일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내 손을 잡아.”

메이는 말없이 내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두 번 다시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 * *

“전에 황궁에 있을 때, 날 잠시 도와줬던 하녀 말이에요.”

아침 식사 후.

소피아가 부족한 게 없냐고 물으러 왔을 때, 나는 메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황궁에 있는 동안 그 하녀를 내 전속 하녀로 쓰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내 요구에 소피아가 무척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 하녀는 얼마 전에 하녀 일을 그만뒀습니다.”

“그만뒀다고요?”

“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럼 내가 세탁실에서 본 하녀는 누굴까.”

“……!”

설마 내가 세탁실에서 메이를 만났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소피아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는 묻지 않을게요, 소피아.”

나는 턱을 괴고, 한쪽 다리를 꼬며 소피아를 바라봤다.

“대신 그 하녀를 내게 데리고 와요.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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