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262)

61화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직원들이 우리의 짐 가방을 내려 주었다.

짐 가방이라고 해 봤자 고작 두 개였다.

웬만한 건 ‘그곳’에 준비되어 있을 테고,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사면 되니 번거롭게 막 챙기지 않았다.

“그럼 먼저 나가서 짐을 마차에 실어 두겠습니다, 아가씨.”

에런 경은 커다란 짐 가방을 양손에 들고 씩씩하게 말했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들 수 있습니다.”

“그럼 그래요.”

에런 경이 먼저 나가고, 그 뒤를 따라 플랫폼을 나가려는데, 눈앞에서 5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꼬마가 꽈당, 넘어졌다.

그 바람에 꼬마가 들고 있던 솜사탕이 저만치 날아갔다.

아픔도 잊고 벌떡 일어선 꼬마는 솜사탕을 잡으려는 듯 앙증맞은 손을 뻗었지만, 솜사탕이 굴러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게다가 솜사탕은 행인들의 발에 무참히 밟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우, 으…….”

그걸 본 꼬마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내 양심이 콕콕 찔렸다.

“잠깐만 저 꼬마 좀 봐줘요, 알도르 경.”

나는 알도르 경에게 꼬마를 부탁하고 근처 솜사탕 가게에서 커다란 솜사탕을 두 개 사서 돌아왔다.

“자.”

그중 하나는 꼬마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커다랗고 예쁜 솜사탕을 본 꼬마는 눈물을 뚝 그쳤다.

“감따합니다!”

그리고 아이 특유의 혀 짧은 소리로 내게 인사한 뒤, 사람들 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저러다 또 넘어지는 거 아니겠지.

불안한 눈으로 꼬마를 바라보던 나는 꼬마가 엄마로 보이는 여자의 품에 안기자 그제야 안심하며 다른 솜사탕을 페르데스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페르데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

“이걸 왜 나한테 줘?”

“페르데스 님 거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왜 내 거냐고.”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대요.”

당신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준다는 의미를 내포해서 말하자 페르데스는 혀를 쯧, 차며 솜사탕을 가져갔다.

“내가 어린아이인 줄 알아? 쓸데없는 짓을 하긴.”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솜사탕을 먹는 입술 끝이 부드럽게 풀렸다.

역시 페르데스는 아직 어리다니까.

흐뭇하게 웃으며 페르데스를 보고 있는데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

알도르 경이었다.

나를 보는 줄 알았는데,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페르데스가 들고 있는 솜사탕을 보고 있었다.

“혹시 솜사탕 먹고 싶어요?”

내가 아는 알도르 경은 단 걸 싫어하는 편이었다.

얼마나 싫어하냐면, 생일 케이크도 너무 달다며 겨우 한 입만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설탕 덩어리인 솜사탕을 빤히 보고 있는 게 이상해서 물어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먹고 싶습니다.”

……단 걸 안 좋아하는 게 아니었던 건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반응에 나는 약간 당황하며 알도르 경을 쳐다봤다.

뒤늦게 알도르 경의 시선을 느낀 페르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솜사탕을 그의 시야에서 숨겼다.

“안 줘.”

그 모습이 마치 친구에게 달콤한 사탕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하는 어린아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더 재미있는 건 알도르 경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는 거였다.

“고작 한 입인데, 그 정도도 못 주는 겁니까?”

“내가 왜 당신에게 줘야 하는데?”

“그야 전 페르데스 님의 스승이니까요. 스승에 대한 존경심으로 한 입 정도는 양보하시죠.”

“말도 안 되는 논리 펼치지 말지?”

“그만 싸워요.”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기 싸움을 강제로 종료시켰다.

고작 솜사탕이 뭐라고, 이리도 진지하게 싸우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 이러면 됐죠?”

두 사람이 쓸데없이 싸우는 걸 막기 위해 나는 알도르 경에게도 솜사탕을 사 주었다.

그제야 만족한 듯 알도르 경의 눈가가 풀어졌다.

“…….”

그것도 잠시, 알도르 경은 솜사탕을 한 입 먹더니 다시 인상을 팍 썼다.

아무리 봐도 입맛에 안 맞는 것 같은데.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요.”

“아닙니다.”

알도르 경은 흡사 검술 대련을 앞둔 사람처럼 비장하게 솜사탕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해치웠다.

그걸 본 페르데스도 질 수 없다는 듯 똑같이 솜사탕을 빠르게 해치웠다.

* * *

기차역을 나오자 익숙한 남자가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 전하. 그리고 레오폴드 영애.”

황제의 보좌관인 콜린 브래들리였다.

나는 이전 생을 통틀어 몇 번 본 적 있었지만, 오늘 처음 그를 보는 페르데스는 약간 경계하며 물었다.

“누구?”

“콜린 브래들리라고 합니다, 황자 전하.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페르데스가 나와 약혼하지 않았다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사람이 영광이라면서 아부성 짙은 말을 하니 페르데스의 눈빛이 약간 어둑해졌다.

“으응. 만나서 반가워.”

그것도 잠시, 페르데스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브래들리 자작과 인사를 나눴다.

“여기 오시는 동안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습니까? 공작저에 계시는 동안 어떠셨습니까?”

브래들리 자작은 페르데스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페르데스가 사실 백치가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페르데스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백치와 평범한 사람의 중간 정도 느낌으로 적절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브래들리 자작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언제까지 우리를 여기 세워 둘 거죠?”

브래들리 자작에게 소문의 진상을 알아볼 기회를 주는 건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약간 쌀쌀하게 물었다.

그러자 브래들리 자작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를 뵙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제가 실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참 잘하지.

“황제 폐하께서 두 분을 황궁으로 모시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황궁이요?”

“네. 황자 전하께선 아직 황족이시니 수도에 오셨다면 마땅히 황궁에서 머무는 게 옳다는 것이 황제 폐하의 의견이십니다.”

슬쩍, 본 페르데스의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물론 그의 표정 변화를 알아본 건 나뿐이었다.

“더불어 레오폴드 영애께서도 황궁에서 지냈으면 한다고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역시 이렇게 나오는구나.

이걸 예상하고 하네스에게 수도의 공작저에 연락하지 말라고 말한 거였다.

“마차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브래들리 자작의 뒤에 화려하고 큰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황궁으로 가시겠습니까, 영애?”

페르데스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나한테만 의견을 묻다니.

그가 페르데스를 진심으로 황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그의 질문에는 대답이 정해져 있었다.

“그래요.”

내가 가기 싫다고 발악해도 어떻게든 황궁으로 데리고 갈 게 뻔하기에, 괜한 힘을 빼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 * *

“…….”

솜사탕으로 기껏 기분을 풀어 준 보람도 없이 황궁으로 가는 내내 페르데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고 있으니,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창밖으로 황궁을 둘러싼 높은 성벽이 보이자 페르데스가 중얼거렸다.

“설마 여기 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날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황궁에서 머무는 걸 거절하고 공작저로 가면 안 되겠지?”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그렇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페르데스가 다시 물었다.

“저곳에 황제를 만나게 되겠지?”

“네. 오늘은 늦었으니, 아마 내일 부를 겁니다.”

“우리를 불러서 무슨 말을 할까?”

“우리가 아니라 페르데스 님만 부를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저를 부르겠죠.”

같이 있으면 페르데스가 해야 할 대답을 내가 다 할 수 있으니, 황제는 필시 우리를 따로 부를 것이다.

내 대답을 들은 페르데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보나 마나 얼른 아기를 가지라고 닦달할 게 분명해.”

“그럼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만 말씀하세요.”

“이전처럼 백치 가면을 쓰고?”

“아니요. 브래들리 자작을 대했을 때처럼 적당히 조절해 주시면 돼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마차는 높은 황궁 성벽을 지났다.

그 사실을 깨달은 페르데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손등에 힘줄이 설 정도로 꽉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괜찮아요.”

나는 그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그를 다독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떨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날 응시했다.

“무사히 다시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페르데스 님.”

“…….”

내 위로가 도움이 됐는지 페르데스의 표정이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황궁 안에서 마차를 탈 수 있는 건 오로지 황족뿐이었다.

제아무리 공작이라도 황궁 안에선 걸어 다녀야 했지만, 페르데스가 황자라서 마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선 곳은 봄의 궁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자 전하. 레오폴드 영애.”

봄의 궁 하녀장인 소피아가 살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뒤, 봄의 궁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궁이 아니네.”

그러나 소피아가 확실히 들을 수 있는 어조로.

보통 황족들은 내궁에서 머물렀다.

물론 결혼해서 출가한 황족이라면 외궁에서 머물렀지만, 페르데스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궁이 아니라 외궁에 있는 봄의 궁이라고?

황자이니 수도에 왔으면 당연히 황궁에서 머물러야 한다고 말했으면서?

짧은 문장 안에 그 의미를 전부 내포해서 말하자 소피아가 당황하며 변명했다.

“황자 전하시니 마땅히 내궁에 머무셔야 하지만, 송구하게도 지금 준비된 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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