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262)

60화

알도르 경이 드레스를 입은 건 볼 수 없겠지만, 여자 스텝을 밟으며 페르데스와 춤을 추는 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구경하려고 했지만, 페르데스는 물론 알도르 경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됩니다.”

“잠깐만 구경할게요.”

“절대 안 됩니다.”

정색하며 거절하니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저마다 할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랑쇼 후작 영애의 데뷔탕트가 성큼 다가왔다.

랑쇼 후작 영애의 데뷔탕트는 수도에 있는 ‘로즈 가든(garden)’에서 열렸다.

예전에는 소유하는 저택을 자랑할 겸 저택에서 파티를 열었지만, 요즘은 사생활을 보호한다며 로즈 가든 같은 파티 전용 정원을 이용하는 게 유행이었다.

이틀 전에는 도착해야 늦지 않게 준비할 수 있을 테니, 오늘 밤에 기차를 타고 수도에 갈 예정이었다.

“하네스, 혹시 내가 없는 동안 그곳에서 편지가 오면 잘 챙겨 둬.”

“알겠습니다. 그런데 수도의 공작저에 정말 간다는 연락을 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아가씨?”

“괜찮아.”

어차피 거긴 가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떠나기 전에 하네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찾아왔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사람들 사이에 사실 백치가 아니라는 소문이 돈 뒤, 페르데스는 말을 더듬는 대신 느리고 천천히 말했다.

“하네스, 나가 봐.”

하네스가 나가자 페르데스는 가면을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물었다.

“수도에 갈 때 잭을 두고 갔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지만, 이유가 뭔지 들어 봐도 될까요?”

“그냥.”

페르데스가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며 말했다.

“잭이랑 조금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잭의 감시를 벗어나서 마음 편하게 있고 싶은 거구나.

잭이 진짜 페르데스를 배신했든, 그를 생각해서 황제를 도와주는 것이든 그의 입장에선 껄끄러울 것이다.

“그렇게 해요.”

잭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문제될 건 없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저도 데리고 가세요!”

바로 잭이었다.

페르데스가 저를 두고 간다는 소식을 들은 잭은 그의 팔을 꼭 잡고 말했다.

“제가 가지 않으면 페르데스 님의 시중은 누가 들죠? 저 말곤 페르데스 님의 시중을 들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 절 데리고 가세요!”

마음 약한 페르데스는 필시 잭을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할 터.

그러니 내가 대신하려고 했는데, 페르데스가 잭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자꾸 귀찮게 하지 마”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잭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널 수도에 데리고 가지 않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건데, 왜 자꾸 질척거려.”

“저, 전 그저 페르데스 님의 시중을 들고자…….”

“그건 다른 사람들이 해 줄 거야. 마구간지기인 너보다 이런 일을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말이지.”

“……!”

“괜히 따라와서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이곳에 있어.”

가시가 잔뜩 박힌 말에 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풀썩, 주저앉았다.

페르데스는 그런 잭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침실을 나갔다.

나는 그런 페르데스의 뒤를 황급히 따라갔다.

인기척이 없는 복도 끝자락에 도착한 페르데스는 투명한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참지 못했어.”

쾅, 세게 내려친 유리창이 크게 요동쳤다.

“잭이 저렇게 애원하는 게 내가 아닌 황제를 위한 것 같아서, 그가 날 배신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그래서 짜증이 나서…… 그래서 참지 못했어.”

나는 그런 페르데스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지금까지 차마 말하지 못했던 걸 말했다.

“잭을 내보낼까요?”

“……!”

페르데스가 깜짝 놀라며 날 쳐다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우리 사이엔 다소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페르데스는 날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날 보며 물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어렵게 알아낸 황제의 감시역을 모르게 된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페르데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둘 수단이 없어지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떠올랐지만, 전부 씹어 삼키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 * *

늦은 밤, 황제궁.

“그래, 그 녀석과 아델 레오폴드가 수도로 온단 말이지.”

고급스러운 소파에 기대앉은 다이몬의 검지에는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었다.

반지의 정체는 마법 통신 반지로, 한 쌍의 다른 반지를 가진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네. 방금 수도를 떠났습니다. 저도 함께 가고 싶었는데, 영지에 남길 부탁하셔서 어쩔 수 없이 남았어요.]

다른 마법 통신 반지를 가진 사람은 바로 잭이었다.

아델이 예상한 대로 다이몬은 잭에게 ‘페르데스가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니 주기적으로 보고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잭은 황제가 드디어 페르데스를 챙겨 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에 대해서 이것저것 보고했다.

“그렇군.”

잭이 하는 이야기는 9할 정도가 들을 필요가 전혀 없는 쓸데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괜히 핀잔을 줬다가 잭이 의기소침해서 해야 할 말도 하지 않으면 큰일이니 다이몬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줬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건 됐고,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지?”

다이몬은 잭이 좀처럼 멈출 줄 모르자 말을 잘랐다.

[두 분의 관계는 무척 좋아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같은 침실을 쓰실 정도니까요!]

“일주일에 딱 한 번만 같은 침실을 쓰는 건가?”

[네! 그 외에도 같이 식사하시거나 데이트도 하십니다. 정말 사이가 좋으세요!]

“그래, 그것참 다행이군.”

잭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두 사람의 사이가 무척 좋은 것 같은데, 왜 여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

게다가 페르데스가 사실 백치가 아니라는 소문도 마음에 걸렸다.

다이몬이 본 페르데스는 완벽한 백치였으니까.

‘확인해 봐야겠군.’

잭과의 연락을 끊은 다이몬은 시종장을 불러 명령했다.

“페르데스와 아델 레오폴드 영애가 수도에 도착하면, 곧바로 황궁으로 데리고 와라.”

* * *

당장 잭을 내보내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페르데스는 좀 더 고민해 보고 싶다며 수도에 다녀올 때까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그렇게 공작저를 나온 우리는 곧바로 수도행 기차에 올라탔다.

좌석은 당연히 일등석이었다.

같은 기차에 탔지만 페르데스의 반응은 예전과 180도 달랐다.

예전에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곳저곳 뛰어다녔다면, 지금은 산속에서 수련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책만 읽었다.

그가 읽는 책은 행정과 관련된 책이었다.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같은 페이지를 한 시간 동안 볼 만큼 어려운 책도 아니었다.

“…….”

게다가 책을 응시하는 황금색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했다.

역시 책을 보는 척,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잭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거겠지.

잭을 버려도, 버리지 않아도 페르데스는 자신이 한 선택을 후회하고, 슬퍼하고, 자책하며 살아갈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문득 리네가 떠올라 나는 턱을 괴고 창밖에 내린 어둠을 쳐다봤다.

세 번째 생에서 리네가 날 배신하고, 독살한 것 때문에 그녀를 내보내긴 했지만…… 사실 조금 후회했다.

그때 리네가 날 배신한 건, 진심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기에.

이번 생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내가 잘하면 되는 건데 너무 섣부른 결정을 내린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같은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할 걸 알아서.

그런데도 후회를 하는 내가 바보 같아서 입 안이 약초를 씹은 것처럼 썼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데스는 부디 나와 같은 길을 가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고.

‘그러려면 잭과 황제의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내야 해.’

황제가 잭을 협박해서 강제로 그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인지.

아니면 잭이 달콤한 재물이나 권력욕에 눈이 멀어 황제의 손을 잡은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순수하게 페르데스를 위해 황제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인지 확실히 알아야 페르데스도 마음을 정하기 쉬울 터.

그걸 알아보는 건 말벌이 득실거릴지도 모르는 커다란 벌집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지.

페르데스를 위해 벌집의 정체를 정확하게 밝혀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뿌우-

기차가 힘찬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일등석은 다른 좌석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누워서 쉴 수 있는 푹신한 침대도 있었지만, 그래도 불편했다.

쓸데없이 크고 화려한 새장에 갇혀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건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도 마찬가지인지 어깨와 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알도르 경은 이번에도 내 호위를 맡았다.

그는 레오폴드 기사단의 부단장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실질적으로 기사단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주 자리를 비우는 건 좋지 않으니, 나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호위를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알도르 경이 자신이 호위를 맡겠다며 단호하게 나왔다.

내가 이유를 설명해도 고집을 꺾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그에게 호위를 맡겼다.

“이야, 수도에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페르데스의 호위를 맡은 건 레오폴드 기사 중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인 에런 경이었다.

알도르 경이 얼음처럼 차가운 성격이라면, 에런 경은 불같이 뜨거운 남자였다.

얼굴도 제법 준수했고, 성격도 호탕했으며 유머 감각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여자를 너무 밝힌다는 거였다.

“이야. 수도의 여성분들은 역시 남다르네요!”

지금도 플랫폼을 분주하게 오고 가는 여자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 모습을 본 알도르 경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자중해라, 에런. 넌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라 페르데스 님을 호위하러 온 거다.”

“넵. 잘 알고 있습니다.”

에런 경이 씩, 웃으며 페르데스에게 말했다.

“제가 잘 호위해 드릴 테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세요, 페르데스 님.”

에런 경의 실력을 잘 아는 내가 보기에도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말과 행동에 페르데스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쪽으로 붙으며,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남자, 괜찮은 거 맞지?”

“실력은 괜찮아요. 저래 보여도 레오폴드 기사단에서 손꼽히는 실력자거든요.”

페르데스가 곁눈질로 다시 여자 구경을 하는 에런 경을 흘끗 보곤 중얼거리듯 답했다.

“전혀 믿음이 안 가지만, 영애가 그렇다니 믿어 볼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