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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59/262)

59화

“빠른 시일 내에 황실과 레오폴드 공작가의 피를 이은 아이를 만들어라.”

탁-

잭의 말을 들으니 황제가 자신을 불러서 했던 말이 떠올라 페르데스는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아주 뜨거운 무언가를 마신 것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서 빨리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속에 담아 두었던 걸 쏟아 낼 것만 같았다.

‘그건 안 돼.’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됐다. 페르데스는 입을 틀어막고 일어섰다.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하며 협탁을 닦던 잭이 의아한 눈으로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어디 가시려고요?”

페르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실을 나왔다.

대답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입을 열면, 목소리를 내면 대답이 아닌 진심을 쏟아 낼 것 같아서.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그도 정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침실을 나왔다.

목적지를 정해 두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던 페르데스는 막다른 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멈춰 섰다.

“하아.”

페르데스는 크게 숨을 토해 내며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잭이 눈앞에 없는데도 마음이 여전히 답답했다.

이걸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

페르데스는 자연스럽게 아델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어제, 아델과 외출해서 즐겁게 놀았던 걸 떠올린 거였다.

잠깐이지만 잭의 일을 새카맣게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무척 즐거웠던 만큼, 그 시간이 그리웠다.

또 그렇게 놀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델과 함께.

그러면 이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가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페르데스의 몸이 움직였다.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무의식 속에 나온 말과 행동이었다.

페르데스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아델의 집무실 근처에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들어가지 못한 건, 관리들이 집무실 앞에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긴 복도를 꽉 채웠다.

다들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이 공작가와 영지의 일을 최종 결정하는 사람이니, 평소 그녀를 찾아오는 관리가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지나치게 좀 많은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이 터진 건가?

걱정하던 페르데스는 곧 관리들이 이렇게 몰려온 이유가 어제 자신이 아델을 데리고 외출하는 바람에 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 이렇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즉, 자신이 아델에게 괜한 부탁을 해서 그녀뿐만 아니라 관리들까지 힘들어졌다는 뜻이었다.

“…….”

그런데도 그녀에게 또 놀러 가자고 제안하러 온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페르데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페르데스 님?”

그냥 돌아가려는데, 하네스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가씨를 뵈러 오신 겁니까?”

“아, 아니야.”

그렇다고 대답하면 아델에게 말할 것 같아 페르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 순간에도 백치 연기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아가씨를 뵙고 싶으실 땐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그, 그래도 돼?”

이렇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데?

페르데스가 슬쩍 곁눈질로 줄지어 서 있는 관리들을 쳐다보자 하네스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페르데스 님은 아가씨의 약혼자시니까요.”

약혼자.

그 단어를 들으니 잭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면서, 다른 의미로 무거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 *

알도르 경은 내가 부탁한 대로 기사들에게 ‘아가씨의 약혼자가 사실은 백치가 아닌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는 평소 과묵하고 말수가 적기로 유명했다.

없는 말을 지어서 퍼뜨리거나, 이상한 소문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헛소문이 아닌 사실이었고.

그런 만큼 사람들은 웬만하면 그가 하는 말을 믿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알도르 경의 말을 믿는 사람보다 의심하고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나는 의심의 바람이 공작저뿐만 아니라 영지 전역에 퍼지자, 본격적으로 페르데스에게 재정 업무를 맡겼다.

원래는 검술 훈련도 비밀 훈련장이 아닌 기사단 훈련장에서 시키려고 했지만…… 그건 너무 못하니까 빼 두자.

괜히 사람들에게 보여 줬다가 페르데스를 욕먹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페르데스에게 재정 업무를 맡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특히 관리들이 어리둥절하며 내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페르데스 님께서 평범한 분이라고 하셔도 재정 업무를 맡기시는 건 너무 섣부른 결정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가 바로 재정 관리인데, 한 번도 이런 일을 해 보신 적이 없는 분에게 맡기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관리들의 말대로였다. 행정, 복지 등 모든 일에 돈이 필요한 만큼 재정 관리를 하는 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 역시 ‘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페르데스에게 재정 업무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전부 도맡아 했겠지.

……그 결과는 황제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일 테고.

“페르데스 님은 잘하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확신을 가지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만큼 페르데스가 재정 업무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덕분이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페르데스는 빠르게 습득했다.

검술과 다르게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페르데스가 재정 업무를 본격적으로 맡게 된 뒤, 내 집무실에는 그의 책상이 들어왔다.

페르데스는 오전엔 알도르 경에게 수업을 받고, 오후엔 여기서 일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서류를 보던 페르데스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이거 좀 이상한 것 같은데 확인해 봐.”

그가 내민 건 퓨라 판매 보고서였다. 보고서에는 각 상단에서 퓨라를 구매한 양이 적혀 있었다.

나는 서류를 쓱 훑어보곤 페르데스에게 다시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이 부분.”

페르데스가 그래프를 가리켰다.

“두 달 전에 갑자기 나타난 ‘코스모스 상단’에서 퓨라를 대량으로 구매했어.”

“그렇게 많이 구매한 건 아닌데요.”

다른 상단이 구매한 양에 비하면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코스모스 상단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규 상단이야. 그런 상단에서 이 정도 구매한 건 상당히 많이 구매한 거라고.”

거기까지 알아본 건가. 나는 속으로 놀라워했다.

그의 말대로 코스모스 상단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황제에게 복수할 기반을 닦기 위해 내가 만든 유령 상단이었다.

퓨라를 야금야금 구매한 것도 복수 때문이었고.

유령 상단이라고 해도 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한 데다가, 내 사비로 퓨라를 구매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퓨라는 실생활에서 아주 유용한 마정석이지만, 그만큼 악용될 가능성도 커.”

그런데 페르데스는 이상하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그런데 퓨라를 원래 거래하지 않았던 상단에서 갑자기 대량으로 사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아?”

“딱히 이상할 게 없는데요.”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페르데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봤다.

“뭔가 알고 있지?”

“네?”

“코스모스 상단에서 갑자기 퓨라를 잔뜩 구매한 이유를 알고 있는 거지?”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페르데스는 눈치가 너무 빨랐다.

“맞지?”

“맞아요.”

여기까지 들켰는데 아니라고 발뺌할 수 없었고, 어차피 조만간 이 일을 그에게 넘겨줄 생각이었기에 순순히 인정했다.

“무슨 이유인데?”

“그건 비밀이에요.”

“또 비밀.”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비밀이 많은 거야?”

“여자는 비밀이 많을수록 아름다운 거, 몰랐어요?”

“……뻔뻔해졌다?”

“전 원래 뻔뻔했어요.”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페르데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서류를 가져갔다.

“요컨대 코스모스 상단에서 퓨라를 얼마나 사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지금은요.”

“나중에는 신경 쓰라는 거네. 왜 그런 건지 이유는 물어봤자 말해 주지 않을 테고.”

“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네요.”

생긋 웃으며 말하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더니 일어섰다.

“난 수업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

“아, 오늘 사교댄스 수업이 있다고 했죠?”

조금 있으면 랑쇼 후작 영애의 데뷔탕트에 참석해야 하니, 페르데스는 그곳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 사교댄스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있었다.

“수업은 어때요? 배울 만해요?”

“수업 자체는 배울 만해.”

수업 자체는?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요?”

“문제라기보단…….”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확 작아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하셨죠?”

“역겨……워서.”

“역겹다고요?”

내가 들은 게 맞는지 의문이 들어 되묻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역겹다는 거예요?”

사교댄스를 배우는 데 역겨울 게 있나?

“…….”

대답해 주기 어려운지 페르데스는 잠시 주저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남자 역이야.”

그렇겠지. 남자니까.

“그리고 그 남자가 여자 역을 맡았어.”

페르데스가 말하는 그 남자는 알도르 경이었다.

그런데 알도르 경이 여자 역을 한다고?

“…….”

문득 알도르 경이 드레스를 입고 여자 스텝을 밟는 모습을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떡 벌어진 입을 가렸다.

그 모습은 역겹다기보다……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한번 보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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