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가 잘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에게 검술의 재능이 없는 것과 아직 가로 베기를 마스터하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마음이 뒤숭숭할 그가 검술 연습에 집중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세 틀렸어요.”
아니나 다를까, 페르데스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오늘 처음 배운 걸 고려한다고 해도, 자세가 굉장히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내 연습을 포기하고 페르데스의 자세를 고쳐 주는 데 집중했다.
“이렇게 해야죠.”
휘익-
“이번엔 여기가 틀렸어요.”
페르데스가 아무리 검술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자세를 몇 번 교정해 주면 당장은 괜찮아졌다.
다음에 왔을 때 몸이 그걸 기억하지 못해서 또 교정을 해 줘야 하는 게 문제였지.
그런데 이번엔 아무리 교정을 해 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더 엉망이 되니 지켜보는 입장에선 답답했다.
페르데스가 왜 이러는지 잘 알고 있어 안쓰럽기도 했고.
연습을 더 해 봤자, 쓸데없이 체력만 소모할 뿐, 좋을 건 하나도 없을 것 같아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페르데스가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좀 더 할래.”
“잡생각이 많을 땐, 검을 잡는 게 아니에요. 그러다 다칠 수도 있다고요.”
“난 안 다쳐.”
“페르데스 님 말고 제가 다쳐요.”
검을 다시 휘두르려던 페르데스가 멈칫했다.
“페르데스 님이 실수로 목검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래서 그 목검이 제게 날아온다면 전 크게 다칠 거예요. 그걸 바라신다면 계속 휘두르세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페르데스가 바로 목검을 내려놓았다.
내가 다치는 건 바라지 않는 모양이지. 그 마음이 기특했다.
페르데스에겐 쉬라고 말했는데, 나만 검술 연습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푹신한 잔디 위에 앉았다.
“앉아요.”
그러면서 옆자리를 두드리자, 페르데스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나는 팔로 상체를 기대고, 고개를 한껏 치켜들며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원한 바람이 하늘하늘 불어오며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페르데스도 하늘을 보고 있었고, 우리 사이에 이렇다 할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무거운 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인 건 아니겠지?
문득 든 의문에 나는 곁눈질로 페르데스의 상태를 살폈다.
매일 아침 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달라 보이는 건, 그의 분위기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나는 아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페르데스의 첫인상은 다른 사람들보다 다소 강렬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16살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작고 왜소한 몸.
그 와중에 반짝거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예뻤었다.
황제가 떠올라서 다소 섬뜩하기도 했고.
그랬던 페르데스가 어느덧 성장해서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었다.
행동이나 말투를 들어 보면 아직 어렸지만, 외모만큼은 청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언제 이렇게 큰 걸까.
내가 그를 키운 게 아닌데도 괜히 뿌듯해졌다.
내 시선을 느낀 페르데스가 날 돌아봤다.
“왜 그렇게 웃어?”
“그냥요.”
“실없긴.”
페르데스가 픽, 웃었다. 그 웃음조차 슬퍼 보이니 안타까운 마음이 커졌다.
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겹쳐 보여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도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뭐든 말하세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말하면 도와주려고?”
“그럼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 드릴게요.”
내 능력 밖의 일이나 터무니없는 일은 안 된다는 밑밥을 미리 깔아 두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날 내려다봤다.
아침 햇살처럼 눈부신 황금색 눈동자가 내 모습을 담았다.
“머리 쓰다듬어 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니. 진심인가?
당황스러워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싫어?”
“아니요, 그런 건…….”
“싫어도 해 줘야 해. 영애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고 영애의 입으로 말했으니까.”
그렇게 말하긴 했지.
“자, 어서.”
페르데스가 내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는 진심으로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당황스럽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가 황자인 건 둘째 치고,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싫어했다.
그런데 이런 걸 요구하다니.
……역시 그는 어린아이인가?
하긴 16살이면 애긴 하지.
그리 생각하니 황당한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덥수룩하고 푸석푸석했던 머리카락은 이제 비단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졌다.
내가 쓰다듬을 때마다 손가락 틈 사이로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이러니까 정말…….
“강아지 같아.”
“뭐?”
아차. 나도 모르게 생각으로만 끝내야 하는 걸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든 페르데스가 다소 황당하다는 듯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강아지 같다고?”
이미 들었는데 아니라고 부정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이었어요.”
약간의 변명을 덧붙이면서.
“페르데스 님의 머리카락이 너무 부드러워서 강아지 같다고 칭찬한 거예요.”
페르데스는 내가 쓰다듬었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확실히 부드럽긴 해.”
“그렇죠?”
“그런데 강아지는 내 덩치와 좀 안 어울리는 표현이지 않아?”
“그럼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데요?”
페르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개.”
개……라고?
짤막하게 나온 대답이 너무 기막혀서 할 말을 잃은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개 같다는 건 칭찬이 아니라 욕 같은데요?”
“그렇게 붙여서 말하니까 진짜 욕 같네.”
진짜 욕 같은 게 아니라, 이건 욕이 맞는데…….
“그럼 그냥 강아지 하자. 덩치는 내가 영애보다 더 커도 나이는 2살 어리니까,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
“……지금 제가 늙었다고 지적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나는 기분 나쁜 티를 내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삐졌어?”
“네. 삐졌어요.”
솔직한 대답에 페르데스가 짧게 감탄을 터뜨렸다.
“보통 이럴 땐 안 삐졌다고 대답하던데, 영애는 역시 다르네.”
“삐진 걸 삐졌다고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죠?”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되돌려 주자, 그가 웃었다.
뭐가 웃겨서 웃는 거지?
곁눈질로 흘겨보자 페르데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놀러 가자.”
그리고 터무니없는 말을 뱉었다.
“어디를요?”
“어디든. 일단 전에 먹었던 그 파이랑 감자 수프가 먹고 싶어.”
페르데스는 눈이 부신 햇살을 등지고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중충하고 어두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덧 원래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오늘 해야 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시기’가 훌쩍 다가온 만큼 나는 평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태연하게 놀러 갈 시간 같은 건 없었다.
“……그래요.”
그러나 거절하지 못한 건, 페르데스가 평소처럼 웃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평소와 같았던 웃음이 오늘따라 눈이 부셔서.
부드러웠던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바닥 안쪽에 남아서.
내 모습을 담은 황금색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그래서.
“같이 가요.”
나도 모르게 대답하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 * *
잭을 처음 만난 게 언제더라.
페르데스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잭은 자아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언제나 자신과 함께였다.
그래서 믿었다.
아니, 믿었었다.
페르데스는 세상 모든 사람을 의심해도, 잭만큼은 믿고 따랐다.
설령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그가 하는 말이라면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잭이 자신을 배신했단다.
배신을, 배신을, 배신을.
“하…….”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말에 페르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짚었다.
이런 충격적인 일을 겪고도 간신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델이 마지막에 했던 말 덕분이었다.
잭이 페르데스를 배신하고 황제의 편에 붙은 게 아니라, 단순히 황제의 부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
아델의 말이 맞다면, 잭은 순수하게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라는 의미이니 아직은 믿을 수 있었다.
……예전처럼 온전하게 그를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페르데스는 책을 읽는 척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방 정리를 하는 잭을 곁눈질로 흘겨봤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 잭을 볼 때마다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를 붙잡고 진솔하게 묻고 싶었다.
정말로 날 배신하고 황제의 손을 잡은 건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 선택을 한 건지.
아니라면 황제가 그에게 어떤 부탁을 했는지.
황제라서 그 부탁을 따르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하나도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한 마음만 커졌다.
그만큼 잭을 레오폴드 영지에 데리고 온 게 후회됐다.
그때 잭을 수도에 두고 왔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와 좋은 추억만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게 그저 한이었다.
“페르데스 님.”
잭을 상대하기 껄끄럽기도 했고.
“왜?”
그나마 오랫동안 연기 실력을 갈고닦은 덕분에 껄끄러운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응대할 수 있었다.
“요즘 아가씨와의 사이는 어때요?”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황제한테 우리의 관계를 보고하려고?
한 번 마음이 삐뚤어지니 한없이 삐뚤어졌다.
페르데스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삐딱한 질문들을 애써 삼키며, 시선을 책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평소와 똑같지, 뭐.”
“사이가 좋다는 의미군요.”
페르데스의 대답을 제멋대로 해석한 잭이 흐뭇하게 웃었다.
“어제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뜨거운 밤도 보내셨으니, 곧 귀여운 아기님이 태어날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