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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57/262)

57화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페르데스의 얼굴이 와장창 일그러졌다.

분노, 슬픔, 배신감 등 온갖 안 좋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나 역시 잭이 황제가 붙여둔 감시역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데, 페르데스는 오죽할까.

“페르데스 님?”

“……나가 봐.”

“예?”

“나가라고!”

페르데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잭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저 얼굴을 모든 걸 다 알고 난 뒤에 보니 좀 역겹게 느껴졌다.

페르데스의 명령에도 잭은 바로 나가지 않고 내 눈치를 살폈다. 어찌하면 좋겠냐는 눈빛이었다.

“나가 봐.”

내 목적은 애초에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었기에 잭을 보내 주었다.

잭은 엉거주춤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페르데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고개 숙인 얼굴을 감싼 손과 팔, 그리고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하, 하하…….”

울음인지, 실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게 얼마나 아프고 괴로운 일인지, 익히 경험해서 잘 알고 있었다.

페르데스는 내가 그 하녀를 믿었던 것보다 잭을 더 믿고 있었으니, 아마 고통이 몇 배는 더 클 것이다.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정도겠지.

그런 그에게 괜찮다던가,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그런 의례적인 말을 건네는 것보다.

“…….”

꼭 안아 주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말없이 그를 안고, 잘게 떨리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의 얼굴이 닿은 어깻죽지가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 축축하게 젖었다.

* * *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그를 안고 있는 팔이 저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질 때쯤, 비로소 진정됐는지 페르데스가 떨어졌다.

진정됐다기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겨우 추슬러 치가 떨리는 배신감과 분노를 억누를 수 있는 상태가 됐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내게서 떨어진 뒤에도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페르데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

그는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물건을 사러 갔다가 그곳에서 야광 물질이 묻었을 수도 있어.”

“전에도 말했지만, 그 야광 물질은 파티하는 장소에서 주로 쓰는 거예요.”

그 끈을 잘라 내는 건 너무 잔인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마음의 상처가 될 테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워낙 고가인 데다가, 주문 제작으로만 만들어져서 영지민들이 이걸 가능성은 없습니다. 저도 1년 전에 주문해서 겨우 받은 물건인걸요.”

돌아오는 아버지의 생신에 쓰려고 주문한 거였지만,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페르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잭은 내가 야광 물질을 바르기 전에 영지에 물건을 사러 갔는걸.”

“그 전인지 후인지는 모르는 일이죠. 출입 장부에 이름과 날짜는 기록해도 시간은 기록하지 않으니까요.”

앞뒤에 나간 사람들에게 시간을 물어 얼추 예상할 수 있지만,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핏줄이 설 정도로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말은 정말로 잭이 날…… 배신했다는 거야?”

“사실 배신했다고 하기엔 조금 애매해요.”

그에게 내가 아는 진실을 알려 주는 겸, 충격받은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말했다.

“잭은 페르데스 님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죠.”

“…….”

“그런 그가 페르데스 님을 배신하고 황제 편에 붙었다면, 황제에게 아는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전부 다 말했을 거예요.”

예를 들면 사실 페르데스는 백치가 아니라 똑똑했다든가.

“그런데 황제 측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걸 보면, 잭은 페르데스 님을 배신했다기보다 부탁을 받은 것 같아요.”

“부……탁?”

“네. 가령 페르데스 님이 레오폴드 공작가에 자리를 제대로 잡을 수 있게 얼른 아이를 낳아야 하니 옆에서 잘 도와주라든가, 그런 식의 부탁이요.”

내 말에 뭔가 떠오른 게 있는지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잭이 공작가 내에서 내 입지를 확실하게 다질 수 있게 얼른 후계자를 낳으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그래요?”

“응. 다른 사용인들도 그런 말을 하니, 그걸 듣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글쎄요. 어떨지는 잭에게 직접 물어봐야 알겠죠.”

페르데스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잭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죠. 물론 잭이 솔직하게 대답해 준다는 가정하에서지만요.”

잭이 황제에게 부탁만 받았다면, 페르데스가 진솔하게 물어봤을 때 솔직하게 대답해 줄 테고.

만약 황제의 편에 붙은 거라면 대답을 회피할 것이다.

그리고 황제에게 이 일을 보고하겠지.

그들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그럼 후환이 남는 걸 좋아하지 않는 황제는 잭을 없애고, 새로운 감시자를 심으려고 할 거야.

“역시 잭에게는 직접 물어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일이 복잡해지니, 나는 바로 말을 바꿨다.

페르데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잭은…… 단순히 부탁을 받은 걸 거야.”

페르데스는 내가 자른 마지막 희망의 끈을 새로 엮어 붙잡았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당신이 조금이나마 덜 아플 테니까.

상당히 지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 위로 상당히 볼품없었던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이면서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꼭 그러길 바랄게요.”

그리 말하며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약간 놀란 듯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바라보며 내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그 모습이 비를 맞고 돌아다니는 강아지처럼 너무 처량해 보여서 더욱 그가 안타깝고, 가엽게 느껴졌다.

* * *

그날, 페르데스는 그의 침실이 아닌 공동 침실에서 밤을 보냈다.

힘들 때는 누군가 곁에 있어 주는 게 많이 위로될 테니 그러려고 했는데, 그가 거절했다.

“어차피 내일 같이 밤을 보내야 하잖아. 오늘은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생각하고 싶으니, 혼자 있게 해 줘.”

“그래요.”

그걸 원한다고 하니 그렇게 해줬는데, 몹시 신경이 쓰였다.

정말 괜찮은 게 맞는 걸까.

혹시 혼자 울고 있으면 어떡하지?

나도 너무 힘들고 슬플 땐, 혼자 있기를 자처하며 방에 틀어박힌 적이 종종 있었다.

그때 든 생각은 이런 우울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것과.

동시에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가 나를 꼭 안아주며 괜찮다고 위로해 주길 바랐다.

그러니 페르데스도 그걸 바라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들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건 페르데스가 나와 같은 마음인지 몰라서.

괜히 갔다가 오지랖으로 그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까 봐 신경 쓰여서.

이 와중에 공작가의 사용인 중에 배신자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참 미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밤새도록 뒤척이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떴다.

어제도 일하느라 못 잤는데, 오늘도 못 잔 건가.

“후우.”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5시 30분.

한 시간 정도 잘까 싶다가도.

억지로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일어났다.

창문을 활짝 열고, 새벽녘의 이슬을 머금은 깨끗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아가씨.”

내가 일어나기 전에 조용히 조간신문과 커피를 가져오는 일을 담당하는 하녀였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잠이 안 와서.”

“저런. 지금이라도 숙면에 도움이 되는 차를 가져다드릴까요?”

“됐어.”

이미 해가 떴는데 숙면에 도움이 되는 차가 무에 소용이 있겠는가.

“커피 줘.”

“네, 아가씨.”

하녀가 찻잔에 따뜻한 커피를 따라 가져다주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초여름이라도 이 시간의 공기는 쌀쌀했는데,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온도가 딱 맞는 것 같았다.

하녀가 조간신문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흐트러진 침구를 정리하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전 잠이 많아서 큰일인데, 두 분은 잠이 없으셔서 큰일이네요.”

두 분?

“페르데스 님을 말하는 거야?”

“네. 페르데스 님도 잠이 없으신지 항상 일찍 일어나셔서 어딜 가시거든요.”

그렇지. 내 정원에 있는 비밀 훈련장에서 기초 체력 증진 운동이랑 검술 연습을 하니까.

“오늘도 일찍 일어나셔서 어딘가로 가시더라고요.”

“오늘도?”

설마 비밀 훈련장에 간 건가.

어제 일 때문에 오늘은 안 올 줄 알았는데.

“이거 치워 줘.”

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 남은 커피를 한꺼번에 들이켠 뒤, 잠옷을 갈아입고 비밀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으로 들어가자마자 거친 숨을 내쉬며 훈련장을 뛰고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설마 했는데 진짜 왔구나.

나는 그를 부르려다, 그가 너무 집중하는 것 같아 일단 지켜봤다.

“…….”

꽤 집중하고 있었던 건지 페르데스가 내가 온 걸 알아챈 건, 훈련장을 거의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날 발견한 그는 놀란 듯 우뚝 멈춰 섰다.

우리는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몇 초간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페르데스가 나뭇가지에 걸쳐두었던 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언제 왔지?”

“방금요.”

“왔으면 기척을 내지 그랬어.”

“너무 집중하고 계셔서 괜히 방해할까 봐 그러지 못했어요.”

“방해는 무슨.”

표정과 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눈동자에는 감추지 못한 아픔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려다 말을 삼켰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는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걸 묻는 건, 그에게 괜찮다는 대답을 강요해 내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이기심이었다.

“오늘은 안 올 줄 알았는데.”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더니 페르데스가 쓰게 웃었다.

“와야지. 약속한 건데.”

“하루 정도는 게으름을 피워도 돼요.”

“됐어. 이럴수록 평상시와 똑같이 행동해야지. 아니면…….”

페르데스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개가 휙, 돌아가면서 땀에 젖은 머리가 흔들렸다.

그는 목검을 숨겨 둔 수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목검을 꺼냈다.

“오늘은 세로 베기 가르쳐 줘.”

“아직 가로 베기 마스터 안 하셨잖아요.”

“새로운 게 배우고 싶어졌어.”

한 가지 자세를 마스터하고 다음 자세로 넘어가는 게 바람직한 순서지만.

“검을 이렇게 잡아보세요.”

이럴 땐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군말 없이 세로 베기를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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