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일부러 위태위태하게 걸어갔더니, 그걸 본 사용인들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하세요, 페르데스 님!”
“그러다 넘어지세요!”
페르데스는 특유의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괘, 괜찮아! 이, 이 정도로는 안 넘……!”
쿵-
“꺅!”
“페르데스 님!”
결국 페르데스가 계단에서 넘어지자, 사용인들이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페르데스는 뒷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병이 깨질 수 있게 일부러 엉덩이에 힘을 세게 주며 한 번 더 깔아뭉갰다.
그러자 와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병이 깨졌다.
깨진 병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바지를 축축하게 적셨다.
“피, 피다!”
“당장 주치의를 불러!”
하필 액체가 붉은색이라 피처럼 보였다.
페르데스가 크게 다쳤다고 생각한 사용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우왕좌왕했다.
그중 정신을 차린 몇몇이 들것을 가지고 왔다.
“여기 누우세요, 페르데스 님!”
“엉덩이를 다쳤으니 엎드려야지!”
“어서요!”
황궁에 있을 때, 페르데스가 다치면 궁인들은 못 본 것처럼 그냥 휙, 지나갔다.
페르데스를 손가락질하며 킥킥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다들 진심으로 걱정해 주니 마음이 찡해졌다.
페르데스는 제발 이 중에는 범인이 없기를 바라며 손을 저었다.
“괘, 괜찮아. 나, 난 안 다쳤어.”
“안 다쳤긴요!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이, 이거 피 아니야!”
페르데스는 뒷주머니에서 깨진 병 조각을 꺼내 사용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 이거야.”
조각 겉면에 묻어 있는 붉은 액체를 본 사용인들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일순간 입을 다물고, 황당하다는 눈으로 조각을 바라봤다.
“……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것도 잠시, 이곳저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것에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법도 한데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부 진심으로 페르데스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아 봐요.”
“그래요. 계단에서 넘어지셨으니 뼈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쳤을 수도 있어요.”
“페르데스 님!”
뒤늦게 페르데스가 넘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잭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피, 피!”
곧 페르데스의 엉덩이가 붉게 물든 걸 본 잭이 기함하자 사용인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설명해 주었다.
저건 피가 아니라 붉은 액체가 든 병이 깨지는 바람에 물든 거라고.
“아아, 다행이에요.”
그제야 잭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직후, 주치의가 도착했다.
“헉, 헉. 다리를 뻗어 보십시오, 페르데스 님.”
저녁을 먹다 말고 숨이 턱에 닿도록 헐레벌떡 뛰어온 주치의는 꼼꼼하게 페르데스의 상태를 살폈다.
“좀 더 자세히 검사해 봐야 확실하게 알겠지만, 지금 상태를 봤을 때 크게 다치신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주치의의 진단 결과를 들은 사용인들은 다행이라고 아우성치듯 말했다.
“그럼 침실로 가시죠, 페르데스 님.”
“여기 앉으세요.”
페르데스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용인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들것을 타고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치의에게 다시 꼼꼼히 검진을 받은 뒤,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조심 좀 하시지, 계단에서 넘어지시면 어떡해요?”
잭이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며 투덜거렸다.
페르데스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 뒤, 쪽지에 필요하지만, 굳이 지금 살 필요가 없는 물건을 적어 그에게 내밀었다.
“잭, 영지에 나가서 이것 좀 사다 줘.”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범인을 찾는 데 혼란을 줄 수 있는 잭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네. 저녁 식사만 챙겨 드리고 곧바로 나갔다 올게요.”
“저녁은 영애랑 같이 먹기로 했으니까, 지금 바로 나가도 돼.”
“아, 그러시군요!”
잭은 그제야 안심한 듯 웃으며 페르데스가 내민 쪽지를 가져갔다.
“페르데스 님과 아가씨께서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가.”
“그럼요! 이대로 후계자까지 낳아서 레오폴드 공작가에 페르데스 님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져요!”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잭이 나쁜 마음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공작저 사람들이 그 소문 이후, 저렇게 떠들어 댄다는 걸 알기에 페르데스는 별말 하지 않고, 손만 휘휘 내저었다.
“여기 적힌 것만 사 오면 되나요?”
“그래.”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니야. 금방 다녀오지 않아도 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녀와.
“잘 다녀와.”
페르데스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잭을 배웅했다.
그리고 약병을 챙긴 뒤, 침실 안쪽 손잡이에 말루스 꽃으로 만든 야광 물질을 발랐다.
“바깥에도 바를까?”
아니야. 바깥은 누구나 만지기 쉬우니까 바르지 말자.
범인이 침실에 몰래 잠입해서 약을 두고 다시 나갈 때 무조건 안쪽 손잡이를 잡아야 하니, 여기만 발라도 괜찮았다.
아델은 가볍게 한 번만 발라도 된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 꼼꼼하게 두 번 바르고.
검지 끝으로 손잡이를 훑어 야광 물질이 제대로 묻어나는지 확인까지 했다.
“좋아.”
완벽해. 페르데스는 손잡이에 바른 물질이 지워지지 않게 조심스레 밖으로 나와 열쇠로 문을 잠갔다.
그리고 근육이 쑤신다는 핑계를 대며 주치의 연구실에서 한 시간 정도 보낸 뒤,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
테이블 위에는 그가 깨뜨렸던 것과 같은 모양의 병과 쪽지가 있었다.
병에 담긴 붉은 액체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 약이 틀림없었다.
페르데스는 쪽지부터 확인했다.
[실수하지 마라.]
짧지만 강렬한 문구가 눈에 박혔다.
페르데스는 쪽지를 휴지 조각처럼 구겨 촛불에 태운 뒤, 침실을 나섰다.
* * *
내게 페르데스의 소식을 가져다준 사람은 사라였다.
“어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어요.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 말은 사라는 페르데스 님이 넘어지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거네.”
“네. 저는 세탁실에서 하녀들에게 일을 지시하다가 소식을 듣고 바로 온 거예요.”
“그래?”
저 말이 사실이라면 사라는 범인이 아닐 테고.
“잠깐 손바닥 좀 보여 줄래?”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혹시 모르니 손바닥을 확인했다.
역시 그녀의 손바닥은 깨끗했다.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갑자기 손바닥은 왜 보여 달라는 건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모두가 페르데스 님이 넘어진 사실을 알고 있니?”
“모두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알고 있을 거예요. 들은 바로는 목격자가 워낙 많았거든요.”
그것참 다행이네.
“혹시 알려지는 게 원하지 않으시면 지금이라도 입단속을 할까요, 아가씨?”
“아니.”
지금보다 더 알려져야 하는데, 입단속을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만 나가 봐.”
사라를 내보내고, 나는 서류를 보며 페르데스를 기다렸다.
만약 페르데스가 여기 온다면 감시역이 침실에 새로운 약을 가져다 놓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까.
한 시간이 넘도록 페르데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침실에 새로운 약이 있었구나.
만약 감시역이 몸을 사렸다면 페르데스가 기껏 몸을 날린 보람이 없어졌을 텐데, 다행이었다.
나는 곧바로 하네스와 알도르 경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손바닥을 보여 줘요.”
두 사람도 가장 먼저 손바닥 검사부터 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하네스와 알도르 경의 손바닥도 깨끗했다.
역시 두 사람은 믿을 수 있어.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나는 마음 깊숙이 남아 있던 일말의 불안감을 털어 내고 그들에게 부탁할 것들을 말했다.
물론 무엇을 목적으로 이런 걸 부탁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페르데스였다면 이유를 물어봤을 텐데, 두 사람은 곧바로 명령을 받들었다.
이런 곳에서 페르데스와 이 두 사람의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은 날 상사 혹은 주인으로 모시고 충성했지만, 페르데스는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계단에서 넘어져 굴렀다고 하던데 괜찮으려나.
내가 페르데스에게 부탁한 건 단순히 넘어지는 거였다.
계단에서 구르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다.
물론 그러면 고의로 했다는 의심을 사지 못할 테지만, 대신 다칠 위험이 컸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니 몹시 신경이 쓰였다.
사라의 말에 따르면 크게 다친 곳은 없다고 했으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확인하러 가야지.
좋은 소식과 함께.
“준비가 다 됐습니다, 아가씨.”
동시에 나갔는데, 먼저 돌아온 건 그나마 가까운 곳에 갔던 하네스였다.
“지금 가죠.”
하네스를 데리고 향한 곳은 사용인 식당이었다.
보통 사용인들은 3개의 조로 나누어서 시간당 한 조씩 식사했는데, 오늘은 특별히 다 같이 식사하도록 했다.
“공작저 내에 있는 사용인들이 전부 다 모인 거 맞지?”
“네. 휴가를 가거나 외출한 5명을 제외한 전부가 모였습니다.”
“그 5명이 공작저에 돌아오지 않은 것도 확인했어?”
“네. 확실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5명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고.
“어머, 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날 본 사용인들이 살갑게 인사했다.
“식사 질이나 양이 어떤지 확인 좀 하려고.”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미리 준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때, 괜찮아?”
“그럼요. 너무 맛있어요!”
“여기보다 맛있는 식당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어요!”
“넌 여기 말고 먹어 본 적도 없잖아.”
평소와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인데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입 안이 모래알을 씹은 것처럼 서걱거렸다.
나는 적당히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며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시간이 됐는데.
파앗-
“앗, 뭐야.”
“정전인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식당을 환하게 밝히던 불이 한순간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