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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262)

54화

아델과 페르데스가 껴안고 있는 걸 우연히 본 관리는 입을 가볍게 놀리며 그 이야기를 이곳저곳에 퍼뜨렸다.

“내가 보기엔 두 분, 막 입을 맞추고 난 후였어.”

“정말?”

“그럼!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야릇하고 달콤한 분위기가 날 수 없지. 확실해!”

관리는 자신의 망상을 추가해서 말을 퍼뜨렸고.

그 위에 다른 사람들의 망상까지 더해지니 이야기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변질됐다.

몇몇 사용인들은 아델과 페르데스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귓불을 붉히며 황급히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두 분의 사이가 이렇게 좋으니, 정식으로 결혼을 하기도 전에 아기님이 태어나시는 거 아니야?”

아기 이야기가 나오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흥분해서 떠들었다.

“그러면 아기님이 어느 정도 성장하실 때까지만 페르데스 님이 공작위를 잠시 맡으셨다가 때가 되면 아기님에게 공작위를 넘겨주면 되겠다.”

“그렇네. 그러면 페르데스 님이 조금 부족해도 큰 문제가 없을 테니까.”

“맞아. 그동안 공작가와 영지 일은 아가씨께서 맡아 주시고, 기사단 일은 알도르 경이 맡아 주면 되니까.”

“딱 좋다. 아가씨의 행복도 챙기고, 공작가의 미래도 챙기는 아주 좋은 방법이야!”

다들 행복한 상상을 하며 좋아하는 가운데, 웃지 못하는 몇몇 이들이 있었다.

“…….”

그중 한 명이 알도르였다.

알도르는 기사 중에서도 검술이 날카롭고 예리하다고 정평이 난 실력자였다.

휘익-

“……오늘따라 더 예리한 것 같지?”

“예리하기만 하겠어? 난 살기까지 느껴지는데.”

기사들이 살벌하게 검을 휘두르는 알도르를 보며 수군거렸다.

“부단장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혹시 사기를 당하셨나?”

“에이, 설마. 부단장님 성격에 사기를 당했으면 훈련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계실 게 아니라 범인을 찾으러 가셨을걸.”

“그건 그렇지.”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살기를 풀풀 풍기는 걸까.

기사들은 알도르가 무서우면서도 왜 저러는 건지 궁금해서, 좀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야, 막내.”

결국 그들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기사단에 들어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막내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졸지에 희생양이 된 막내 기사가 벌벌 떨며 알도르에게 다가갔다.

“부단……, 힉!”

막내 기사가 그를 채 부르기도 전에 알도르가 휘두른 검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린 막내 기사는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검을 휘두르는 데 집중하느라 자신의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적이라고만 인식해서 검을 겨냥했던 알도르는 뒤늦게 막내 기사라는 걸 알아보고 날카로운 검 끝을 아래로 내렸다.

“괜찮나?”

그리고 막내 기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막내 기사는 손을 잡을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알도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메튜.”

“아, 아!”

알도르가 제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막내 기사, 메튜가 벌떡 일어서며 훈련장이 떠날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알도르가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 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 선배님들이 부단장님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걱정돼서 가 보라고…….”

“컥.”

“큰일 났다.”

메튜가 대놓고 물어보니,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선배 기사들은 하나같이 기함했다.

“…….”

그러다 알도르가 이쪽을 쳐다보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휙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알도르는 그런 기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메튜에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저, 정말입니까?”

“그래. 그것보다.”

알도르가 검을 검집에 꽂아 놓고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다들 심심한 것 같으니 훈련장을 20바퀴 돌도록 하지.”

계절이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날이 많이 무더워졌다.

북쪽이라 그나마 다른 곳보단 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가 쨍쨍한 낮에는 더웠다.

특히 지금은 해가 중천에 뜬 오후 2시.

이 시간에 훈련장을 돌라는 건, 단순한 훈련 목적이 아닌 괴롭히겠다는 의미였다.

“실시.”

그걸 알면서도 상대가 부단장이었기에.

그리고 자신들이 무덤을 팠다는 걸 알기에 기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훈련장을 무려 20바퀴나 돌아야 했다.

* * *

내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건, 신문을 확인하는 거였다.

신문을 보면 전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소설 같은 장밋빛 로맨스.]

신문 1면에 떡하니 찍힌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사에는 정확히 누구라고 적혀 있지 않고 A양과 B군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A양이 나고, B군이 페르데스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즉, 이건 그 관리의 거짓이 뒤섞인 이야기를 들은 기자가 낸 기사였다.

“요즘은 이런 것도 신문 1면에 나오는구나.”

워낙 자극적이라 사람들이 궁금해서 많이 살 것 같긴 하지만.

이런 기사가 신문 1면에 실린다는 건 그만큼 낼 기사가 없다는 의미였고.

같은 의미로 큰 사건 사고가 없다는 의미이니, 나쁘진 않았다.

나는 조간신문을 내려놓고 페르데스가 기다리는 비밀 훈련장으로 향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페르데스는 나보다 일찍 나와 기초 체력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검술 자세를 알려 주고, 내 훈련도 하면서 틈틈이 그의 자세가 흐트러지는지 확인했다.

“자세 틀렸어요.”

흐트러지는 게 보이면 바로 다가가 수정해 주었다.

자세를 똑바로 수정해 주느라 팔과 어깨, 허리 등을 만지면서 알게 된 건데, 페르데스의 몸이 평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근육이 뭉친 것 같아 그걸 풀어 줄 생각으로 주무르자, 페르데스가 질색하며 도망쳤다.

“뭐, 뭐 하는 거야?”

“뭐 하긴요.”

놀란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질색하니 조금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근육이 뭉친 것 같아서 풀어 주려고 했죠.”

“그런 건 나한테 먼저 말하고 해. 갑자기 주무르면 놀라잖아.”

아, 그렇구나.

“죄송해요. 그럼 풀어 줄 테니까 이리 오세요.”

미리 말했는데도 뭐가 불만인지 페르데스가 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나중에 잭한테 해 달라고 하면 돼.”

“잭보단 제가 더 잘할 텐데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전 마사지 실력을 다른 사람한테 인정받았거든요.”

“누구한테?”

페르데스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혹시 그 남자한테 해 준 거야?”

페르데스가 말하는 그 남자는 알도르 경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지금 생각난 건데, 두 번째 생에서 나는 나 때문에 고생한 알도르 경에게도 마사지를 해 주려고 했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그때도 알도르 경은 페르데스처럼 질색하며 도망쳤었지.

다들 내 마사지 솜씨를 못 믿어서 그러는 거겠지?

이건 이거대로 상처인데.

“그럼 누구한테 인정받았는데?”

“아버지요.”

옷장 구석에 박아 두었던 셔츠처럼 구겨졌던 미간이 쫙 펴졌다.

페르데스는 헛기침을 하며 조금 머쓱한 어조로 말했다.

“크흠, 레오폴드 공작에게 마사지를 자주 해 줬었나 봐.”

“네. 근육이 자주 뭉치시는 편이라서, 마사지를 많이 해 드렸었죠. 그러니 제 실력을 믿으셔도 돼요.”

“처음부터 영애의 실력을 의심한 건 아니었어.”

“그럼 마사지 받으실 건가요?”

“아니.”

역시 의심하는 거 맞잖아.

그래 놓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게 웃겨서 빤히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내 시선을 회피했다.

“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네. 잭에게 뭉친 근육을 풀어 달라고 해야 하니까.”

“입욕제 중에 근육 뭉친 데 도움이 되는 게 있으니, 사용인을 통해 보낼게요.”

“그럼 나야 좋지.”

“그리고 오늘 꼭 해야 하는 일 있는 거, 잊지 마세요.”

오늘은 페르데스가 약을 먹기 전날이자,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쏟는 날이기도 했다.

“잘하셔야 해요.”

이곳은 내 허락 없이 들어오지 못하는 정원이었지만, 혹시 모르니 그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에 페르데스가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저녁쯤에 할 테니, 준비하고.”

“네. 맞춰서 준비하고 있을게요.”

“찾았으면 좋겠다.”

“그러게요.”

이제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 나 역시 이번에 꼭 찾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 * *

여름이 성큼 다가와 그런지 오후 5시인데도 밖은 대낮처럼 환했다.

페르데스는 계획을 실행하기 전, 백치 가면을 쓰고 복도를 마구 활보했다.

평범한 사람이 그러면 이상하게 봤겠지만, 백치라고 알려진 그가 이러니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페르데스 님.”

“과자라도 드릴까요? 아, 저녁 먹기 전이라 안 되려나.”

오히려 페르데스가 만난 사용인들은 그에게 살갑게 말을 걸어 주었다.

‘정말 이 사람들 중에 범인이 있을까?’

그럼 너무 슬플 것 같은데.

……내가 아닌 아델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본 적은 없지만,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문득 아델이 무척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떠올린 페르데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가 자신과 약혼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죄책감이 들었다.

웃긴 건, 그녀가 먼저 약혼하자고 제안한 일인데도 이런 마음이 든다는 거였다.

“진짜 이상해.”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페르데스는 이내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일어섰다.

이럴수록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야 했다.

아델이 그놈에게 마음을 주지 않도록 말이지.

‘좋아, 그렇다면…….’

페르데스는 저녁이 깊어지면서 홀 정리를 마저 하기 위해 속속히 사람들이 모여들자 중앙 계단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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