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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262)

53화

“……그건 그렇지.”

다행히 기분이 나아졌는지, 굳었던 페르데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내게 줬던 초대장을 슬쩍 가져가더니, 물었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돼?”

이럴 때 보면 참 단순한 성격이라니까.

그런 그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일단 전에 관리들에게 했던 것처럼 느리지만, 또박또박 말하세요.”

페르데스는 목을 가다듬더니 내가 요구한 대로 말했다.

“이렇게?”

“네. 지금처럼요.”

페르데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외에 그곳에 가서 그가 해 줘야 할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페르데스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담아듣더니, 이야기가 끝나자 픽 웃었다.

“뭐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네. 요컨대 내가 여태 백치였던 건, 진짜 어디가 모자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라는 걸 어필하면 된다는 거잖아.”

“정확해요.”

“굉장히 복잡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네.”

부디 저 자신감이 자만감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그렇게 페르데스 님이 원래 백치가 아니었다는 게 귀족들 사이에 알려지면, 그때부터 마조사 수업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마조사 이야기가 나오자 페르데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제가 전에 자주 만나는 사용인들을 적어 두라고 했던 거, 기억해요?”

“응. 안 그래도 물어볼 것 같아서 적어 둔 거 가져왔어.”

페르데스가 반으로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종이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종이를 펼쳐 확인했다.

가장 상단에 있는 이름은 당연하게도 잭이었다.

그야 그의 전속 하인이고 가장 믿는 사람이니까, 당연한 거고.

그다음에 자주 부딪히는 사람은 알도르 경.

이것도 그의 수업을 위해 그런 거니 패스.

이 두 사람 말고 페르데스와 딱히 자주 부딪치는 사용인은 없었다.

그래도 이상할 건 없었다. 굳이 그와 부딪치지 않아도 감시할 방법은 다양했으니까.

“황제가 심어 둔 감시역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나 봐.”

“네. 감시역이 몸을 사리고 나타나지 않으려고 하니, 들쑤셔 봐야겠어요.”

“어떻게?”

들쑤시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뭐가 좋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페르데스에게 물었다.

“황제가 준 약, 얼마나 남았어요?”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는지 페르데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아직 반 이상 남았어.”

“그걸 들고 다니다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실수인 척, 전부 쏟으세요.”

“아. 그럼 황제가 그 감시역을 통해 새로운 약을 전해 주려고 하겠네.”

“바로 그거죠.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먹으라고 했는데, 사흘 뒤가 약을 먹는 날이니, 이틀 뒤에 약을 쏟으면 안달복달해서 어떻게든 조치하려고 할 거예요.”

“가령 새로운 약을 내게 가져다준다든가, 말이지?”

“맞아요. 황제의 성격상 감시역에게 미리 여분의 약을 줬을 테니, 곧바로 가져다주려고 할 거예요. 그러면…….”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에서 원형의 납작 통을 꺼냈다.

그걸 페르데스에게 내밀자 그는 곧바로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통 안에는 연고처럼 약간 점성 있는 새하얀 물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말루스라는 꽃으로 만든 야광 물질이에요.”

나는 검지 끝에 그걸 바르고, 다른 손바닥으로 그 위를 가려 그늘을 만들었다.

그러자 조그맣게 생성된 어둠 속에서 손가락이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 있으면 반짝반짝 빛이 나서, 보통 파티를 할 때 많이 쓰죠.”

“이런 건 처음 봐.”

어지간히도 이 야광 물질이 신기했는지 페르데스는 눈을 반짝거리며 야광 물질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렇게 신기하면, 일이 다 끝나고 남은 건 가져도 좋아요.”

“정말?”

“물론이죠.”

어차피 내겐 딱히 필요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감시역을 찾는 데 쓰겠다고?”

“네.”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약을 쏟은 뒤, 페르데스 님의 침실 문손잡이에 그걸 발라 두세요.”

“아!”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챈 페르데스가 탄성을 뱉었다.

“이게 손에 묻어 있는 사람이 범인이겠구나! 내가 약을 쏟으면, 몰래 약을 내 침실에 가져다 두려고 할 테니까.”

“그렇죠. 다른 곳에 바르면 투명해져서 보이지도 않고, 유지력도 좋아서 한두 번 손을 씻는 것 가지곤 지워지지 않아요.”

저 흔적은 며칠 동안 손을 꼼꼼하게 비누로 씻어 내야 겨우 지워졌다.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그 범인이 다른 사람을 만지면 그 사람한테도 묻잖아.”

“악수하지 않는 이상 손바닥 안쪽에 옮겨 묻을 가능성은 굉장히 적어요.”

다른 곳에 묻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공작가에 있는 사용인들의 손은 어떻게 일일이 확인하려고?”

“일일이 반복할 생각은 없어요.”

공작저에 일하는 사용인만 수십 명이었다.

기사단과 관리들까지 합하면 이백 명이 넘는데 그 많은 사람의 손을 어떻게 다 검사하겠는가.

절대 무리였다.

검사하는 와중 범인이 눈치채고 증거를 인멸할 수도 있으니 한 번에 해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다 방법이 있죠.”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페르데스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방금 그 웃음, 좀 무서웠어.”

“그냥 웃은 건데요?”

“아니야. 살기가 느껴졌어. 마치 범인을 잡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선포하는 듯한 웃음이었다고.”

나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냈나 보네.

나는 약간 올라간 입술 끝을 꾹꾹 눌렀다.

어디 가서 표정 관리를 못 한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페르데스 앞에만 서면 이랬다.

“그래서 그 감시역을 찾으면 어떻게 할 거야? 개럿처럼 내쫓을 거야?”

“범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지금은 누군지 알아 두고 경계만 할 생각이에요. 그래야…….”

“그래야 역으로 감시하고 경계하기 쉬울 테니까.”

페르데스가 내가 하려던 말을 가로챘다.

“그 감시역을 내보내면 황제는 필시 다른 감시역을 보낼 테니, 번거롭게 감시역을 또 찾는 것보다 그냥 아는 놈을 데리고 있는 게 낫다고 말하려고 했지?”

“네, 맞아요.”

그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지만, 저게 주된 이유이니 구태여 그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잘 알고 계시네요.”

“이 정도쯤이야.”

페르데스가 약간 우쭐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이틀 뒤에 영애가 말한 대로 할게.”

“잘 부탁해요.”

볼일이 끝났으니 그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섰다.

덩달아 일어선 페르데스의 머리가 내 위로 쑥 올라갔다.

“그새 키가 또 큰 모양이네요.”

“응. 조금 자랐어.”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봤을 땐 내 어깨 정도밖에 오지 않았던 소년이 이젠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커 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그를 보니 신기하면서도.

이러다 천장을 뚫을 정도로 자라는 건 아닐까, 하는 웃긴 생각도 들어 슬쩍 웃었다.

“왜 웃어? 무슨 재미있는 생각을 한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말하기엔 다소 민망한 내용인지라 숨기려고 했는데, 페르데스가 끈질기게 물었다.

“아니긴. 한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그것보다 얼른 가 보세요. 곧 수업이잖아요.”

“할 말이 없으니 내쫓는 거네.”

“네, 맞습니다. 그러니 부디 나가 주세요.”

그래도 페르데스가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는 그의 등을 떠밀며 강제로 내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키가 큰 만큼 덩치도 커지는 바람에 내보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해선 밤새 밀어도 못 내보낼 것 같은데.”

게다가 페르데스가 날 놀리려는 듯 버티고 있어 더욱 밀어내기가 힘들었다.

“수업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직 한 시간 정도 시간 있어. 오늘 그 남자가 일정이 있어 늦게 온다고 했거든.”

알도르 경을 아직 그 남자라고 부르는구나.

그만큼 그들의 사이가 안 좋다는 의미였다.

보통 사제지간에는 끈끈한 정이 생기는 편이니, 두 사람도 금방 사이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왜 이렇게 사이가 나쁜 거지?

알도르 경은 겉보기엔 차가워 보여도 은근히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성격도 무덤덤해서 적을 만들지 않는 편이었다.

페르데스도 공작저의 사용인들과 지내는 걸 보면 친화력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마치 물과 기름처럼 두 사람은 좀처럼 친해지지 않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다툼이라도 있었던 걸까?

페르데스는 물어봤자 말해 주지 않을 테니, 알도르 경에게 물…….

“아!”

다른 생각을 하면서 그를 밀어내려다 보니 스텝이 제멋대로 엉켜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휘청거리는 몸은 내 의지를 벗어나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심……!”

다행히 페르데스가 앞에서 받아 준 덕분에 꼴사납게 넘어지는 건 면했다.

그 대신 페르데스의 품에 안긴 형태가 된 나는 엉겁결에 그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가 얼굴을 붉히며 눈썹을 찡그렸다.

왜 저러지?

혹시 날 받아 주면서 어딜 다친 건가?

괜찮냐고 물어보려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급한 일이라 잠깐 실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관리였다.

관리는 나와 페르데스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러곤 우렁차게 소리치더니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으음,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관리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네요.”

대낮에 방 안에서 단둘이 껴안고 있는 남녀.

게다가 여자가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 약혼한 상태였다.

남자도 여자에게 마음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고.

그런데 이런 자세로 있었으니 그 관리가 오해할 만도 했다.

하필 이 장면을 본 관리는 입이 가벼운 남자였다.

그래도 충의는 있어 강제로 입을 틀어막는다면 입을 다물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잘됐어요.”

나는 페르데스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제가 다른 마음을 품고 페르데스 님을 선택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이걸로 무마시킬 수 있……, 페르데스 님?”

왜인지 페르데스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안 좋아진 것 같았다.

“어디 아프세요? 주치의를 부를까요?”

“……아니.”

대답과 상반되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그래. 나 이만 가 볼게.”

아까는 등을 떠밀어도 그렇게 안 가더니.

갑자기 무슨 변덕이 생긴 건지 페르데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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