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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262)

52화

에이든 자작이 이틀 연속으로 물세례를 받았다고 해요.”

에이든 자작은 내 뒷담화를 하다가 페르데스가 던진 책에 맞은 관리였다.

“그것도 누군가 버린 구정물을 말이죠.”

“그것참 재수가 없었네.”

페르데스는 몹시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며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주며 말을 이었다.

“브로디 자작은 길을 가다가 누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았다고 해요. 그것도 여러 번.”

“그래서 크게 다쳤어?”

“아니요. 다행히 돌이 크지 않아서 혹이 나는 정도로 끝났어요.”

“그렇구나.”

페르데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내가 고쳐 준 자세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의 반응만 보면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럴 리가 없지.

두 관리에게 그런 짓을 할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페르데스가 한 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도 알기에 더 캐묻거나 꾸짖는 대신 말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세요.”

후웅-

허공을 가르던 목검이 멈췄다.

페르데스는 곁눈질로 흘끗 나를 보곤 다시 검을 휘둘렀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네.

그의 성장 과정을 생각하면 자존심이 낮고 고집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셌다.

페르데스가 기초 과목을 독학으로 평균 이상의 수준까지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저 강한 자존심과 고집 덕분이겠지.

빡빡한 교육 일정을 잘 따라가고, 아침마다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훈련을 나오는 것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세 또 틀렸어요.”

다른 건 열심히 하는 만큼 실력이 쑥쑥 나아지는데, 검술은 아니었다.

그가 노력하는 것에 비해 실력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는…….

“검술에 재능이 없나 봐.”

페르데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그가 의기소침해지지 않게 아니라고, 열심히 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보기에도 그는 검술에 재능이 없는 터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페르데스가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뭐야, 그 반응은. 빈말이라도 좀 더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줘도 되잖아.”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하시는데, 어떻게 여기서 더 열심히 하라고 말을 해요.”

“내가 검술에 재능이 없다는 걸 돌려 말하네.”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애초에 검술은 기초 체력을 키울 목적으로 배우는 거였으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페르데스가 꽉 쥔 목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금보다 연습 시간을 더 늘리면 실력이 좀 더 나아질까?”

어떻게든 검술을 잘하고 싶다는 의지가 보이는 말이었다.

“글쎄요.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만, 제가 보기엔 아닐 것 같아요.”

“……대답이 매정하네.”

“안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많으신데, 괜히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페르데스는 입을 삐죽이다가 고개를 훽, 돌렸다.

너무 정곡을 찌르지 말고, 적당히 기분을 맞춰 줄 걸 그랬나.

페르데스를 생각해서 한 말이라지만, 그의 입장에선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그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검술 말고 마법을 배워 보시는 건 어때요?”

“마법?”

역시 그는 바로 반응을 보였다.

“네. 마법이요.”

“하지만 난 마나를 못 느끼는데.”

“마나를 느끼지 못해도 마법사가 될 수 있잖아요.”

“마법 공식이나 마법진을 그리는 마조사를 말하는구나.”

그 직업의 정식 명칭이 마조사구나. 처음 알았다.

“싫으세요?”

“싫을 리가. 당연히 좋지.”

그의 미간 사이에 깊이 잡힌 골은 좋다는 대답과 상반됐다.

“백치인 척 연기한 게 들킬까 봐 걱정돼요?”

정곡이었는지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치가 수학 같은 걸 잘할 리가 없잖아.”

“그럼 백치인 척 연기하는 것을 포기하면 되죠.”

“뭐?”

페르데스가 깜짝 놀라며 내게 물었다.

“진심이야?”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전에는 백치인 게 들키면 어쩌냐고 뭐라고 하더니?”

“지금은 들키면 안 되니까요. 제가 말하는 건 시기가 왔을 때, 그만두자는 거예요.”

“그 시기가 언제인데?”

“아직 정확하게 언제라고 정하지 않았지만, 조만간일 테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계세요.”

페르데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완전한 자유를 찾을 때까지 백치 연기를 계속할 생각이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내 복수를 위한 계획의 세 번째 단추를 제대로 끼우기 위해선 그가 백치 가면을 벗어야 했다.

무조건.

* * *

백치인 줄 알았던 4황자가 하루아침에 평범, 혹은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의심과 의혹도 살 테니, 가랑비에 옷깃이 젖는 걸 모르는 것처럼 서서히 드러내야 했다.

“기사들에게 페르데스 님의 칭찬을 하도록 해요.”

첫 번째 타겟은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그걸 위해 알도르 경에게 부탁했더니, 내게 되물었다.

“어떤 방식으로 말입니까.”

“내 명령으로 요즘 페르데스 님을 가르치고 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영특하더라. 백치가 아닌 것 같더라. 뭐 이런 식으로 칭찬하면 돼요.”

“그럼 그분이 백치라는 걸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길 겁니다.”

“그걸 바라고 하는 일이니 그렇게 해 줘요.”

알도르 경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내가 왜 이러는지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지만…… 언젠가 다 말해 줄 테니, 내 말대로 해 줘요. 알도르 경.”

나는 알도르 경이 이것저것 묻기 전에 선수 쳐서 먼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물어볼 법한데, 알도르 경은 그러지 않았다.

그 충직한 성격이 마음에 들면서도 어깨가 무거웠다.

그만큼 그가 날 믿고 따른다는 의미였으니까.

게다가 곧 있으면 신입 기사 서임식을 할 텐데, 그때 알도르 경이 내게 충성을 맹세할 걸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서약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생각이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괜히 건드리는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알도르 경을 보내고, 서류를 보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들어왔다.

“불렀어?”

“네. 일단 앉으시겠어요?”

페르데스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무슨 급한 일 있어요?”

“아니, 없는데. 왜?”

“급하게 본론부터 물어보시길래요.”

페르데스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라 영애가 날 부를 땐, 항상 무슨 일이 있었으니까,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랬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나는 이전에 빼 뒀던 초대장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한 달 뒤에 여기 가야 하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에서 부른 거예요.”

“한 달 뒤에 열리는 파티 초대장을 벌써 보낸 걸 보면 작은 파티는 아니라는 거네.”

“그렇죠.”

규모가 큰 파티를 열 땐,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최소 한 달 전에 미리 초대장을 보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일정을 미리 빼 둘 수 있으니까.

페르데스는 초대장을 꺼내 확인했다.

“랑쇼 후작 영애가 데뷔탕트를 치르는 건가.”

“랑쇼 후작가는 귀족회에 속한 가문이고, 후작 부인은 사교계에서 제법 유명한 분이세요. 그러니 얼굴도장을 찍을 겸 가는 게 좋죠.”

“이것도 네 계획을 위한 일이야?”

“그럼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하자 페르데스는 초대장을 내 쪽으로 팔랑팔랑 흔들며 물었다.

“단순히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 같이 가자는 건 아니겠지?”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이날, 여기 모인 귀족들에게 페르데스 님이 사실 백치가 아니었다는 걸 보여 줄 겁니다.”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아하니 이미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의 이런 면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이해시키기 위해 번거롭게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아도 되니까.

“이해할 수가 없어.”

“뭐를요?”

“모든 게 다.”

추상적인 대답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달라는 의미로 그를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말을 이었다.

“황제가 이상한 놈이랑 영애를 결혼시키려고 해서 날 끌어들인 것까진 알겠어.”

“…….”

“나한테 그런 교육을 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비단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길어서 일단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짓까지 시키는 거야? 내가 백치 가면을 벗는 게, 영애의 복수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지?”

페르데스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초대장을 세게 내려놓았다.

“오히려 백치인 척 연기하는 편이 낫지 않아? 내가 백치가 아니라는 걸 황제가 알면 지금처럼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하나같이 아직 대답하긴 어려운 질문인지라 나는 침묵했다.

“영애.”

그러자 페르데스가 대답을 재촉하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말해 드릴 수 없어요.”

재촉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곧 전부 다 말해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페르데스가 입술을 비틀었다.

“영애는 매번 기다려 달라는 말만 하네.”

“지금은 그 말밖엔 할 수가 없으니까요.”

“날 믿지 못해서 말을 안 해 주는 거야?”

“그게 아니라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 말을 아끼는 거예요.”

“못 믿겠는데.”

페르데스가 삐딱하게 앉아 팔짱을 꼈다.

“내 눈엔 영애가 날 못 믿어서 자꾸 숨기는 걸로 보여.”

그를 믿냐고 물어본다면 아직은 그렇다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지만.

“믿어요.”

내 생각을 사실대로 말하면, 페르데스가 상처만 받을 것 같아 약간 거짓말을 섞었다.

“믿으니까 페르데스 님께만 이런 이야기를 한 거고, 도와 달라고 부탁한 거겠죠. 믿지 않았으면 제가 그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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