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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262)

51화

그의 표정 연기가 너무 완벽하기도 했고, 말투가 어눌해서 말을 더듬지 않아도 백치처럼 보였다.

……일단 나서지 말고, 상황을 지켜볼까.

페르데스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까 봐 나서려고 한 건데.

페르데스의 행동을 보아하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 나는 그를 향해 반쯤 뻗었던 손을 거뒀다.

페르데스의 행동에 당황해서 잠시 침묵하던 관리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페르데스에게 되물었다.

“벌레…… 말입니까?”

“응.”

페르데스가 그 어느 때보다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주, 정말, 큰 벌레가 있어.”

“헉.”

“진짜 큰 벌레가 있다고?”

‘있었어’가 아닌 ‘있다’라는 말에 관리들이 황급히 주변을 살펴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큰 벌레가 어디 있다는 겁니까?”

“아무리 둘러봐도 안 보이는데…….”

“여기 있잖아.”

페르데스가 검지로 관리들을 가리켰다.

“아주 큰 벌레.”

“예, 예?”

“아. 벌레들이라고 해야겠네.”

한순간 벌레가 된 관리들이 당황하는 게 벽 너머로 느껴졌다.

“풉.”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통쾌해서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희가 어째서 벌레라는 겁니까?”

그가 던진 책에 맞았던 관리가 약간 발끈하며 물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똑똑한 관리면서 나도 아는 걸 모르는 거야?”

“무슨…….”

“방금 아델을 욕했잖아.”

“……!”

“아델은 너희들의 상사이자 주인인데 비웃고 욕했잖아.”

귀족의 기본 소양 중 하나가 자신의 감정이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귀족들은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대놓고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하는 편이었다.

“그런 사람을 벌레가 아니면 뭐라고 지칭해야 해? 쓰레기?”

그런데 페르데스는 대놓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비난했다.

“…….”

“…….”

익숙하지 않은 화법인 데다가 내 뒷담화를 했던 걸 들켰으니, 관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페르데스는 그런 관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내 책 돌려줘.”

“여, 여기 있습니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관리들은 페르데스에게 책을 건네주고 왔던 길을 돌아서 사라졌다.

페르데스는 뒤꽁무니 빠지도록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날 돌아봤다.

지금까지 봤던 눈빛 중 가장 무서웠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빛이기도 했다.

“이리 와.”

페르데스는 내 팔을 잡고, 근처 방으로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페르데스는 양팔을 뻗어 문과 그 사이에 나를 가두며 내려다봤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눈높이가 같았는데, 언제 이렇게 높아진 거지.

아무리 성장기라지만,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니 조금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 자식들에게 왜 아무 말도 못 했던 거지?”

내 모습을 담은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나한테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왜 그놈들한테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거야.”

“그런 적 없어요.”

“없기는! 내 두 눈으로 영애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 걸 봤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그가 이해하려나.

막막했다. 골똘히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미안.”

화를 내다가 갑자기 사과?

극명한 온도 차이에 그를 빤히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화를 내려던 건 아닌데…… 너무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화를 냈어. 미안해.”

“괜찮아요.”

나를 싫어하거나 욕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날 걱정해서 그런 건데,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지 페르데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땅을 툭툭 찼다.

“난…… 영애가 레오폴드 공작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빈말이 아니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알아요.”

“나뿐만 아니라 이곳 영지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갑자기 영지민들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지?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피력하고자 불특정 다수를 끌고 왔다고 생각하기엔,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진짜인가?

“페르데스 님이 영지민들의 생각을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안내인을 따라 공작령 구경을 나갔을 때, 영지민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페르데스는 나와 공작령 구경을 다녀온 뒤, 안내인과 세 차례 정도 따로 구경을 나갔었다.

“몇 명의 이야기뿐이니 영지민들 전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는 전부 네 칭찬이었어. 다들 네가 영주가 돼서 영지를 이끌어 주길 바랐다고.”

페르데스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딴 놈들 이야기는 듣지 말고 영애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영애는 그럴 자격이 있잖아.”

자격. 그 단어가 가슴에 박혔다.

“아델 레오폴드니까. 유일무이한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니까, 영애가 레오폴드 공작이 되는 게 맞잖아.”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지만,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괜스레 가슴이 찡해졌다.

게다가 영지민들이 나를 믿고 지지한다는 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물론 페르데스가 말한 것처럼 영지민 전체의 의견이 아닌 일부의 의견일 수도 있지만 그게 어디인가.

중요한 건 소수라도 날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페르데스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감동이었지만, 그 감동을 만끽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아까 일은 조금 무모하셨어요.”

그의 잘못을 지적하자 페르데스가 흠칫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자칫 페르데스 님의 진짜 모습을 들킬 수도 있었다고요.”

“……미안.”

“이건 사과를 받아야겠네요. 정체가 들키면 페르데스 님뿐만 아니라 저까지 곤란해졌을 테니까요.”

채찍으로 때렸으면 다음엔 당근을 줄 차례였다.

“그래도 통쾌했어요.”

내가 기분이 좋았던 만큼 달콤한 당근으로.

“고마워요, 페르데스 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자 페르데스가 약간 놀라며 날 쳐다봤다.

“페르데스 님이 나서주신 덕분에 기분이 많이 좋아졌어요.”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 * *

페르데스의 일과는 단순하고 반복적이었다.

5시쯤 일어나 간단하게 세수만 하고 아델의 비밀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델이 오기 전까지 훈련장을 도는 등 기초 체력 증진 훈련을 하고.

그러다 아델이 오면 검을 쥐는 방법이나 자세 등, 검술의 기본을 배웠다.

그렇게 아침 훈련이 끝나면, 방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씻고 아침 식사를 했다.

그다음엔 알도르가 올 때까지 지난 시간에 배운 걸 복습했다.

시간이 남는다면 예습도 했지만, 하루에 배우는 양이 워낙 많다 보니 복습만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수업은 보통 오전에 2시간, 오후에 4시간 정도 했는데, 알도르의 스케줄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장소 역시 알도르가 정했다.

대부분 침실에서 했지만 가끔은 도서관에서.

어떨 때는 기사단이나 담당 관리들이 일하는 건물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방에 틀어박혀 배운 것들을 복습했다.

도서관이 바로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어서 여러모로 편하지만.

백치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수준 높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전에 도서관에서 아델과 만났던 일도 있고.

“…….”

문득 그때의 일을 떠올린 페르데스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때의 일은 그의 인생에서 손꼽히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페르데스는 책을 보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봤다.

그동안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키가 쑥쑥 커서 어느덧 아델은 뛰어넘었다.

그러나 아직 부족했다. 못해도 한 뼘은 더 크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빨리 키가 클 수 있을까.

운동량을 좀 늘리면 되려나?

우유를 지금보다 더 많이 먹을까?

“……몸을 쓰는 쪽이 낫겠지?”

키도 키지만, 최근 검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실력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몇 시간 내내 앉아서 책을 보느라 굳은 몸도 풀 겸 페르데스는 아델의 비밀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풀 속에 숨겨 둔 그의 목검을 꺼내려다 바로 옆에 있는 아델의 목검을 집어 들었다.

목검 손잡이 부분이 그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낡았다.

그만큼 아델이 열심히 검술 훈련을 했다는 의미였다.

‘실력도 무척 뛰어났지.’

페르데스는 검술을 배우면 배울수록 아델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델은 기사가 되지 않은 걸까?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감추는 이유가 뭐지?

기사가 됐더라면, 적어도 실력을 사람들 앞에서 뽐냈더라면 그렇게 무시당하지 않았을 텐데.

페르데스는 문득 전에 관리들이 아델에 대해 험담했던 일을 떠올리고 인상을 팍 썼다.

그가 그곳에 간 건, 알도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그곳에서 수업할 테니 오라길래 갔던 건데, 그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하아.”

다시 생각해 봐도 짜증 나서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그때 그 녀석들을 그대로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가서 복수할까?’

아델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했다는 걸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상대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고 복수하는 방법은 많이 알고 있었다.

황궁에 있었을 때, 체르노서나 다른 이복형제들에게 자주 썼던 방법이었다.

물론 그들만 이상한 일을 당하면, 눈치 빠른 아델은 알아챌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시치미를 딱 잡아떼면 되니까.

이 방법은 증거도 남지 않으니 그러면 된다고 생각한 페르데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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