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이걸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하는 거지.
맞는 말이긴 하나, 그의 입으로 직접 저런 말을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머쓱한 듯 헛기침을 했다.
“장난이야, 장난.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제가 어떤 눈으로 쳐다봤는데요?”
난 그저 조금 당황해서 빤히 쳐다봤을 뿐인데?
“그…….”
차마 말할 수 없는지 페르데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책을 보고 배웠어.”
그리고 아까 내가 한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했다.
“도서관에서 이쪽 계열의 일을 한 관리들이 쓴 자서전이나, 역사서, 기록서 같은 걸 찾아보면서 어떤 방향이 좋을지 나름 적용해 본 거야.”
그의 말에 놀란 건, 나 역시 그런 식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서가 개판으로 영지 운영을 하니, 그걸 어떻게든 바로잡기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페르데스가 말한 것처럼 공부했었다.
그러나 독학으론 한계가 있는 데다가, 공작이 된 체르노서의 뜻을 꺾을 수가 없어 아무것도 바로잡지 못했다.
그래서 두 번째 생에선 관리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더 열심히 공부했고.
그 성과는 세 번째 생이 돼서야 겨우 빛을 발했다.
그런데 페르데스는 며칠 만에 그 성과가 빛을 발하니 놀라웠다.
그만큼 페르데스가 이쪽 분야에 천재라는 의미이니,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고.
그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거야.
간단할 줄 알았던 대화는 그가 따로 조사해 온 자료 때문에 길어졌다.
보리 문제는 페르데스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를 보내자마자 실무자를 불렀다.
실무자는 페르데스가 보낸 자료를 보더니 나처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좋은 방법이 있었군요. 이 방법대로 하면 보리를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을 연간 20% 이상 절약할 수 있을 겁니다.”
“내년부터 실행이 가능할까?”
“물론입니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
볼일은 이걸로 끝이었으니, 이만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그런데 실무자는 나가지 않고 내 눈치를 살폈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왜 그러지?”
“저…… 막스 상단에서 보낸 항의 편지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일주일 전부터입니다.”
일주일 전이라. 딱 예상한 시기에 반응을 보였네.
“뭐라고 항의하는데?”
“왜 자신들에게 퓨라를 팔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유를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내가 체르노서 때문에 그렇다고.
체르노서에게 직접 복수할 수 없으니 외가인 그들에게 복수한다는 걸 내 입으로 실토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럼 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씌워 복수하는 이상하고 쪼잔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무시해.”
“정말 무시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혹시 황후에게 직접 편지가 오면 내게 전해 주고.”
황후 이야기가 나오자 실무자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그는 과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부디 그땐 잘 해결해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 * *
“서류가 잘못 왔네.”
필요한 건 지난달 재정 보고서인데, 관리가 가져온 건 지지난달 재정 보고서였다.
나는 하인에게 관리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려다 서류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관리를 불러서 서류를 다시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가서 가져오는 게 훨씬 빨랐다.
관리들은 기사단 숙소 바로 옆에 있는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가씨?”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막 건물을 나오던 관리가 약간 놀라며 인사했다.
내가 찾던 관리는 아니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브룩스 경을 만나고 싶어서 왔는데, 자리에 있죠?”
“아마 있을 겁니다. 브룩스 경의 집무실까지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어디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알고 계신다고요?”
관리가 의아해하는 건, 이번 생에서 내가 이곳에 오는 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후계자 수업도 받지 못한 내가 여기에 올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브룩스 경의 집무실이 어디인지 아는 건, 생을 몇 번 반복한 덕분이었다.
공작가와 영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관리와 헤어지고, 곧장 브룩스 경의 집무실로 향했다.
브룩스 경의 집무실은 2층 오른쪽 끝 방이었다.
중앙 계단을 올라가 복도 모퉁이를 돌려는데,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놀랐다니까. 아가씨께서 행정을 그렇게 잘 보실 줄이야.”
아가씨라면…… 내 이야기인가?
그렇겠지. 이곳에 아가씨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들이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걸 알게 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나서지 않고 기다렸다.
“행정뿐인 줄 알아? 법무에 대해서도 잘 아시더라.”
그들은 내가 몰래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계속 떠들었다.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 빠삭하게 알고 계시는 바람에, 전에 얼마나 낭패를 본 줄 알아?”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만 듣고 누군지 바로 유추할 수 있었다.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아가씨께서 어떻게 그리 행정이나 법무를 잘 알고 계시는 걸까?”
“글쎄. 독학하신 거 아닐까?”
“그런 것치고 실무에 너무 강하신데. 처음엔 아가씨께서 실무를 보신다길래, 걱정 많이 했었는데 이젠 조금도 안 돼.”
내심 내가 잘하고 있는지 불안했는데, 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됐다.
이대로만 하면 가신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혹시 아가씨께서 공작이 되시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걸까.
“설마. 아가씨께서는 기사 작위가 없으시잖아.”
나는 반쯤 뗐던 발을 다시 바닥에 붙였다.
“지금까지 기사 작위가 있는 분들이 공작이 되긴 했지만, 꼭 그래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잖아.”
“법은 아니지만 관습이지. 그리고 레오폴드 공작가는 기사 가문이야. 가문의 수장인 가주가 기사 작위가 없는 게 말이 돼?”
“그건 그렇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를 관리들에게 들으니 조금 뼈 아팠다.
어떻게든 기사 작위를 따야겠다는 오기가 생기기도 했고.
“게다가 아가씨께서는 검술도 못하시잖아.”
“못하는 거 맞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가씨께서 푸시크를 멋지게 물리치셨다던데.”
“아아, 그거 전부 과장된 걸 거야.”
관리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싸움은 병사들이 하고, 총사령관은 뒤에서 지휘만 해도 그 공은 전부 총사령관의 공이 되잖아. 그거랑 같은 이치라고.”
“아아, 그렇네.”
또 다른 관리가 동감한다는 듯 말했다.
“아가씨의 검술 실력이 뛰어났다면, 돌아가신 공작 각하께서 아가씨를 기사 아카데미에 보내셨겠지.”
“그렇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보냈을지는 의문이지만.”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아가씨는 여자잖아. 여기사가 늘어나는 추세라곤 하지만, 그래도 기사단을 이끄는 건 아니지.”
“하긴. 여자의 몸으론 기사들과 합숙 훈련을 하거나 야영 같은 건 못 할 테니까.”
“내 말이 그거야. 공작 각하도 그렇게 생각해서 아가씨가 유일한 핏줄인데도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으신 거겠지.”
지금까지 저런 말을 많이 들어서 무뎌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저들이 뱉은 말도 날카로운 못이 돼서 내 마음에 박혔다.
특히 아버지가 날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부분이 가장 큰 상처가 됐다.
그러나 그들을 원망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저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나 역시 지난 생까진 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가 끔찍하고 지독한 경험을 몇 번 하고 난 뒤에야 생각을 바꾼 거였다.
“그래도 일은 잘하시니, 아가씨께서는 차후 공작 각하가 되실 분을 보좌하면 될 것 같아.”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은데, 조금 걱정되는 건…….”
목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쪽으로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나는 여기 계속 있다가 그들을 만날지, 아니면 돌아설지 잠시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지금 그들을 마주치는 건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썩 좋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만나 봤자 서로 민망할 뿐, 뭔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일단 물러났다가, 나중에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실력으로 보여 줄 생각이었다.
“어?”
그래서 돌아섰는데, 뜻밖의 인물이 내 뒤에 서 있었다.
“…….”
바로 페르데스였다. 그는 다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설마 저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은 걸까?
그렇다는 건 아까부터 내 뒤에 서 있었다는 건데, 관리들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가씨께서 괜히 공작이 되겠다고, 쓸데없이 나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
“맞아. 그랬다가 귀족회나 황제 폐하의 눈밖에 벗어나면, 영지에 불똥이 튈 테니까.”
“불똥도 보통 불똥이 아니지. 영지가 활활 타 버릴 거야.”
난데없는 페르데스의 등장에 놀라 멈칫하는 사이 관리들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이쪽으로 가요.”
그들과 부딪치기 전에 자리를 뜨고자, 페르데스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더욱 화가 난 듯 인상을 팍 쓰며,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쪽으로 가면 관리들이랑 부딪치는데!
“잠깐……!”
나는 당황하며 페르데스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모퉁이를 지나 관리들 앞에 나선 페르데스가 들고 있던 책을 그들을 향해 던졌다.
퍽-
“악!”
일직선으로 날아간 책에 맞은 관리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있는 곳에선 누가 맞았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내가 여자라서 기사단을 이끌 수 없다고 먼저 말했던 관리였다.
“페르데스 님……?”
다른 관리가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를 불렀다.
그를 붙잡을 타이밍을 놓친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페르데스를 보며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나서서 그를 데리고 와야 하나?
여기서 나까지 나서면 분위기가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아, 미안.”
그래도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아 움직이려는데, 페르데스가 특유의 백치미를 뽐내며 웃었다.
“벌레가 보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