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퓨라. 강력한 마나가 응축된 붉은색 마정석으로, 한 개만 있어도 거대한 마나 증폭 열차를 한 달 동안 운행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못 하게 될 테지만, 그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각설하고.
하여간 퓨라는 마정석 중에 가장 마나 함유량이 많은 데다가 효율도 높아서 기차 말고도 다양한 곳에 사용됐다.
그런데도 생성되는 양이 많지 않아, 가격이 비쌌다.
“퓨라라니. 그거 진짜 귀하고 비싼 거잖아.”
“맞아요. 그럼 퓨라가 어디서 가장 많이 생성되는지는도 알아요?”
페르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이곳인가 보군.”
“네, 맞아요. 대륙에 공급되는 퓨라의 60% 이상이 이곳,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생성돼요.”
“그런 것치곤 주변에 퓨라가 별로 보이지 않는데.”
페르데스가 동굴을 다시 훑으며 말했다.
“여긴 가장 순도 높은 퓨라만 있는 동굴이에요. 시중에 팔리는 퓨라는 산 가장 아래, 채석장에서 캐죠.”
“그 말은 여기서 만들어지는 퓨라는 아주 고가에 팔린다는 거군.”
“아마 그럴 거예요. 팔아 본 적은 없지만요. 여기서 생성되는 퓨라들은 순수하게 공작령을 위해서만 쓰거든요.”
가끔 황궁에서 필요하다고 도움을 요청하면, 마지못해서 주기도 했다.
“알도르 경에게 제국의 역사에 대해 어디까지 배우셨어요?”
“7대 황제까지 배웠어.”
“딱 직전까지 배우셨네요.”
그 일이 일어난 건 8대 황제 때였으니까.
“아주 먼 옛날. 말주변이 뛰어난 것 말고 딱히 특별할 게 없는 기사가 있었어요.”
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며 오래된 설화에 대해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기사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붉은 비늘에 뒤덮인 드래곤을 만나요.”
페르데스는 말없이 내 뒤를 따라오며 이야기를 들었다.
“기사는 뛰어난 화술로 드래곤을 즐겁게 해 주죠. 소멸을 앞두고 있었던 드래곤은 그의 마지막을 즐겁게 해 준 기사에게 드래곤의 가호를 내려요.”
“드래곤의 가호라고?”
페르데스가 반문하자 나는 내 붉은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이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았다는 증거에요.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은 전부 붉은 머리로 태어나죠.”
모친이나 외가 쪽에 다른 머리 색이 있다면 한 명쯤은 그 머리 색으로 태어날 법도 한데, 레오폴드 공작가는 아니었다.
밖에서 들여온 자식을 제외한, 레오폴드 공작가의 피를 이은 사람들의 머리 색은 전부 붉은색이었다.
“그 말은 그 기사가 초대 레오폴드 공작이란 말이네.”
“맞아요. 드래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가 살던 지역을 기사에게 주었고, 그 지역이 이곳, 레오폴드 공작령이 됐죠.”
이야기가 끝나는 타이밍에 딱 맞게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
사방에서 붉게 반짝이는 퓨라를 본 페르데스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예쁘죠?”
“그러게.”
벌어진 입술에서는 거짓이 한 스푼도 담기지 않은 진심 어린 감탄이 흘러나왔다.
“정말 예쁘다. 정제되기 전의 퓨라는 처음 봐.”
당연히 그렇겠지. 광산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이 장면을 볼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여기서 질문. 하필 왜 레오폴드 공작령에서만 이렇게 많은 퓨라가 생성되는 걸까요?”
“……초대 가주가 만났다던 드래곤의 축복 덕분인가?”
“맞아요. 전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이 화산 속에는 그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고 해요.”
나는 높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 탓에 드래곤의 마나가 화산 전체에 깃들어 퓨라로 생성되는 거고요.”
“진짜 전설 같은 이야기네.”
페르데스가 동굴 벽에 있는 퓨라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자 퓨라가 더욱 밝은 붉은빛을 뽐내며 반짝거렸다.
“그래서 레오폴드 공작가가 위험해도 이 화산을 등지고 저택을 지은 거네? 여기에 퓨라에 레드 드래곤까지 있으니까.”
“맞아요.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위험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래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 말은 드래곤이 화가 나면 화산이 폭발한다는 건가?”
“제가 알기로 그래요.”
“대답이 모호하군.”
“책에서만 읽은 내용이고,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레드 드래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것 역시 책으로만 봤었다.
그는 말없이 퓨라를 바라보다가 내게 물었다.
“혹시 황제가 레오폴드 공작가를 노리는 이유가 이 퓨라 때문이 아닐까? 퓨라를 팔면 돈이 되기도 하고, 다양한 곳에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첫 번째 생과 두 번째 생을 경험한 뒤, 어쩌면 퓨라 때문에 이러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퓨라 소유권을 황제에게 넘기려고 했었다.
그러나 황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전 생에서도 그는 퓨라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말 아니야?”
“아니에요. 만약 황제가 퓨라가 욕심나서 그러는 거라면 페르데스 님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저한테 온갖 핑계와 이유를 다 대며 퓨라 채굴권을 달라고 했을 걸요?”
“그건 그렇네.”
페르데스가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공작가의 핏줄에 관련된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없어?”
“제가 아는 건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은 붉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뿐이에요.”
“붉은 머리 아기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 테고.”
모르겠단 말이지.
페르데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 위로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제 알게 된 건데 페르데스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었다.
슬슬 한계가 온 모양이네.
나는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덕분에 보통 사람보다 더위에 강했지만, 페르데스는 아니었다.
더 있으면 위험할 테니, 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구경은 이쯤 하고, 남은 건 저택에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 * *
공작령에 있는 모든 열쇠 집을 수소문해 봤지만, 최근 레오폴드 공작가 사용인 중 열쇠를 복사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마스터키를 들고 있어서, 열쇠를 복사할 필요가 없었거나.
다른 사람에게 열쇠를 복사해 달라고 시켰거나.
저택 내에 마스터키를 가진 사람은 나와 하네스, 그리고 하녀장인 사라가 전부였다.
아무리 3번째 생의 일 때문에 불신의 벽이 두꺼워졌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예외였다.
페르데스의 전속 하인인 잭도 여분의 열쇠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 역시 페르데스가 믿는 사람이니 예외로 둬야지.
‘그럼 후자겠지.’
여러 가지 경우를 따져 봤을 때, 후자가 가장 가능성이 크기도 했고.
후자라면 일이 상당히 복잡해졌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터라 더욱 범인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어쩔 수 없지.’
이 일은 여기서 묻는 수밖에.
그리고 좀 더 주변을 경계해야겠어.
특히 페르데스의 주변을 조심해야 했다.
나는 페르데스에게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라고 말했다.
그중 감시역이 있다면, 쓸데없이 겹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일단 이건 이렇게 하고, 다음은…….
“찾았다고 들었는데.”
“제때 찾아오셨네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따로 빼 두었던 서류를 그에게 내밀었다.
페르데스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내가 내민 서류를 내려다봤다.
“이게 뭐야?”
“뭐긴요. 영지 재정 보고서죠.”
“그건 나도 알아.”
서류의 앞장을 빠르게 훑은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데.”
“알도르 경에게 듣자 하니 페르데스 님이 수학을 잘하신다고 해서요.”
“그런데?”
“그러니 도와달라는 거예요. 재정 보고서에 계산이 틀린 부분이 없는지, 전부 제대로 기입된 건지 확인해 주세요.”
내가 이야기를 할수록, 페르데스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못 본 척 계속 말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양식에 맞게 다시 작성해 오시면 됩니다.”
“……이럴 목적으로 교육을 한 거지?”
“겸사겸사 한 거죠.”
페르데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인건비는 비싼데.”
그러면서도 서류를 가져가는구나.
“서류를 봐주시면 맞게 수당은 쳐 드릴게요.”
“얼마나?”
“글쎄요. 그것도 계산해 봐야 하는데, 직접 계산해서 오실래요?”
“됐거든?”
페르데스는 은근슬쩍 일을 더 시키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 뒤, 휙 방을 나갔다.
아, 들켰네.
* * *
페르데스에게 재정 보고서를 준 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가 과연 앞으로 내가 시킬 일을 잘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
시험을 하긴 했지만, 잘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분명 엉망진창이겠지.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처음 하는 일을 못하는 건 당연한 거였으니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면 됐다.
그러니 그가 해 온 결과물을 토대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고칠 점을 알려 주려고 했는데.
“…….”
그는 놀라울 정도로 괜찮은 보고서를 작성해 왔다.
고칠 곳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이 정도면 아주 훌륭했다.
처음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의 솜씨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보리 말이야. 찾아보니까 상단을 거치지 않고 남쪽 벨부르 영지에서 바로 구입하면 30% 더 싸게 살 수 있더라고.”
그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보고서에선 완벽하지만, 좀 더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의견도 내놓았다.
진짜 처음 하는 거 맞아?
놀라서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상해?”
“이상하긴요. 너무 잘해서 놀랐는걸요.”
“정말?”
그럼 다행이라며 페르데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벨부르 영지에서 보리를 바로 구입하는 건, 수송 때문에 힘들 것 같아요. 남쪽 지역에서 여기까지 보리를 몇 톤씩이나 옮기는 비용이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그것도 계산해 봤는데…….”
페르데스는 기다렸다는 듯 다른 서류를 보여 주었다.
내가 부탁한 것과 별개로 조사한 일이었다.
진짜 일 잘하는구나. 그가 가져온 보고서를 볼 때마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정말 이런 일 처음 하는 거 맞아요?”
도저히 믿기지 않아 물어보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걸 묻네. 나한테 이런 걸 시킬 사람이 황궁에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잘해요?”
신기해서 묻자 페르데스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좀 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