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아침 일찍 일어나 검술 훈련을 하는 건, 평생 검을 휘두르며 살아온 기사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페르데스가 하루 정도는 게으름을 피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지각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먼저 훈련장에 나와 시키지도 않은 체력 단련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페르데스의 체력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상승했다.
이제 슬슬 검을 휘두르는 법을 알려 줄까.
그러려면 그에게 맞는 목검을 제작해야 하니, 하네스를 불러 목검을 만들어 달라고 은밀하게 부탁했다.
페르데스가 검술 훈련을 받는 건 대외적으로 비밀이니, 그의 것이라곤 말하지 않았다.
대충 체구 같은 것만 말했는데, 눈치 빠른 하네스는 페르데스의 것이라는 걸 바로 알아채고 웃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주문하겠습니다.”
끙,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믿음직스럽게 웃는 얼굴을 보니 걱정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그래, 하네스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내가 저택 내에서 마음을 터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하네스와 사라, 알도르 경이 전부였다.
……페르데스도 포함인가?
모르겠다. 그와 가장 큰 비밀을 공유하고 있긴 하나, 믿을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복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믿는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아가씨, 이제 여름입니다.”
갑자기 계절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의아해서 쳐다보자 하네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새로운 옷을 맞추셔야지요.”
내 옷시중을 들어 주는 하녀들이 내 치수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 계절마다 입는 평상복은 신경 쓰지 않아도 그들이 알아서 맞춰 준비해 뒀다.
그러니 내게 하는 말은 아닐 테고…….
“페르데스 님의 옷을 말하는구나.”
“네. 전에 그분의 옷시중을 들었던 하녀들이 말하길, 여름옷이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
“네. 게다가 최근 키가 많이 크셔서 기존의 옷이 작아지기도 했고요.”
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네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바로 의상실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 * *
다음 날, 오전.
공작령 내에서 가장 큰 의상실 마담이 디자이너들을 데리고 공작저를 방문했다.
하네스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페르데스를 찾아갔다.
내가 그에게 반해서 약혼한 설정이니, 적당히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는 편이 페르데스가 공작저에서 생활하기 편할 테고.
똑똑-
“들어갈게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오늘 오전에 찾아갈 거라고 미리 말해 둔 터라 바로 문을 열었다.
페르데스는 소파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책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페르데스 님?”
“…….”
페르데스가 말없이 읽고 있던 걸 내게 보여 주었다.
새하얀 종이에는 붉은색 글씨가 삐뚤삐뚤하게 적혀 있었다.
[얼른 아이를 만들 거라, 페르데스.]
“황제군요.”
“바로 알아보네.”
페르데스가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의 글씨체는 아닌데.”
“이런 말을 할 사람은 황제밖에 없으니까요.”
이걸 적은 사람은 황제의 감시역일 테지만.
그나저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글씨체인데,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정말 악필이구나, 정도가 전부였다.
“이게 어디 있었죠?”
“테이블에. 수업을 받고 돌아왔더니 떡하니 있더군.”
“그사이에 누가 들어왔나요?”
“아니. 방문은 잠겨 있었어. 창문도 마찬가지고.”
사용인들의 방과 달리 나와 페르데스의 방은 특수한 잠금장치를 썼다.
페르데스가 개럿의 방을 따고 몰래 들어갔던, 그런 얕은 수작은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제의 감시역이 잠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쪽지를 놓고, 유유히 다시 빠져나갔다는 건 여분의 키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목격자는 없나요?”
“글쎄. 혹시 그 감시역한테 들킬까 봐 확인 안 해 봤는데.”
그렇지. 괜히 목격자를 찾는답시고 들쑤시고 다니면 감시역이 바로 알아챌 것이다.
그럼 그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갈 테고, 그 뒤의 일은 지금보다 더 복잡해졌다.
“일단 열쇠 가게에 수소문해서 공작저 사용인 중 최근 열쇠를 복사한 사람이 있는지부터 알아봐야겠네요.”
페르데스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한테 잘해 줬던 사용인 중에는 없었으면 좋겠어.”
“그러게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어, 나는 진심으로 그의 말에 공감했다.
똑똑-
“아가씨, 마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그래.”
황제가 남긴 쪽지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린 나는 페르데스에게 말했다.
“그 일은 잠시 잊고, 옷 맞추러 가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머리가 쑥 올라오더니 정면에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침마다 그를 보니 키가 큰 걸 딱히 실감하지 못했는데.
하네스에게 그의 키가 최근 많이 컸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확 실감이 났다.
처음 봤을 땐 내 어깨 정도밖에 되지 않아 내려다봐야 했는데, 이젠 정면에서도 볼 수 있었다.
“진짜 키가 많이 컸네요.”
“그렇지?”
페르데스가 씩, 웃었다.
“잭도 최근 내가 많이 큰 것 같다고, 좋아하더라.”
“그래요?”
“응, 그리고…….”
페르데스가 곁눈질로 슬쩍 날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영애도 내가 큰 게…… 좋지?”
“물론이죠.”
작은 것보단 당연히 큰 게 나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아까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 * *
키가 많이 큰 걸 확인하고 나니, 그의 옷이 작아진 것도 눈에 보였다.
지금 가진 옷은 전부 이럴 테니, 나는 의상실 마담에게 가지고 온 카탈로그의 옷을 전부 제작해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더불어 가을옷과 겨울옷까지 같은 양으로 미리 주문하자 페르데스가 기함하며 날 말렸다.
“너무 돈을 많이 쓰는 거 아니야? 난 이렇게 많은 옷 필요 없어.”
“이 정도면 평범한 거예요. 그리고 돈은 쓰라고 있는 건데, 당연히 써야지요.”
“하지만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지금 누구 앞에서 재정 걱정을 하는 건지. 웃음이 나왔다.
이게 다 레오폴드 공작가가 어떤 가문인지 몰라서 나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것’을 보여 주지 않았구나.
전에 그에게 레오폴드 영지를 구경시켜 줄 때 보여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다음으로 미뤘다.
카탈로그를 보며 옷을 고를 시간을 줄인 덕분에, 여유가 조금 생겼으니 지금 보여 줄까.
“잠시 시간 있어요?”
“왜? 같이 점심 먹게?”
“아니요. 페르데스 님께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내게 보여 주고 싶은 것?”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뭔데?”
“말로 설명해 주기 힘든 거라 직접 보셔야 해요. 한 2시간 정도면 되니, 잠깐 시간 내주세요.”
“알았어. 그럼 외투 가져올게.”
페르데스가 방으로 가려고 하자 그의 팔을 잡았다.
“외투는 필요 없어요. 무척 더울 테니, 그냥 가도록 해요.”
“아직 5월밖에 안 됐는데, 덥다고?”
“네. 무척 더울 거예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하는 페르데스를 데리고 공작저의 후문으로 향했다.
우리가 어디 가는지 눈치챈 하네스가 차가운 물주머니를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나는 그걸 챙겨 들고 후문 앞에 섰다.
후문에도 정문만큼이나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문이 열리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이용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바로 뒤가 화산인데 이용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500년간 폭발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안에 들끓는 열기를 품고 있어서 그런지,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그나마 땅과 맞닿은 부분에 듬성듬성 잡초가 자라 있었다.
“후우.”
아니나 다를까, 조금 등산했을 뿐인데 벌써 숨이 가빠 왔다. 지면을 뚫고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 때문이었다.
“헉, 헉.”
그건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나는 여기 몇 번 와 봤지만, 페르데스는 처음 오는 터라 뜨거운 열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갰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거 마셔요.”
하네스에게 받은 물주머니를 건네주자, 페르데스는 사막 여행을 하다가 오아시스를 만난 여행자처럼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을 먹으니, 조금 괜찮아졌는지 페르데스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도대체 내가 왜 화산을 올라가고 있는 거야?”
“말했잖아요. 보여 줄 게 있다고.”
“이런 곳에 보여 줄 게 있다고?”
페르데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돌아봐도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데, 뭘 보여 준다는 거지? 설마 자갈은 아니지?”
“그럴 리가요. 조금 더 가면 되니까, 힘내요.”
“이상한 거기만 해 봐, 가만히 안 둘 거야.”
페르데스는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따라왔다.
약 20여 분을 더 걷자 목적지인 동굴이 보였다.
동굴은 열기가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기 때문에 바깥보다 더 더웠다.
“와, 정신이 나갈 것 같아.”
페르데스는 동굴 안으로 조금 들어갔을 뿐인데, 기함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이미 미지근해진 물주머니를 그의 볼에 대 주며 말했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힘내요.”
“거의 다 왔다는 이야기를 열 번은 더 들은 것 같은데.”
“다섯 번밖에 안 했어요.”
정정해 주자 페르데스가 눈썹을 치켜들며 날 쳐다봤다.
“도대체 뭘 보여 주고 싶은 거야? 혹시 이 안에 보물이라도 들어 있어?”
“네.”
내 대답에 페르데스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뭐? 정말?”
“정말이에요. 이 안에 ‘퓨라’가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