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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47/262)

47화

페르데스를 따라간 게 아닌 내가 찾는 자료 역시 이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페르데스와 나는 책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내가 책을 찾아 테이블에 가져다 놓고 온 뒤에도, 페르데스는 책장 앞에 계속 서 있었다.

아직 책을 찾지 못한 건가?

나는 책장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의 상황을 확인했다.

책을 찾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높이 꽂혀 있어서 꺼내지 못하는 거였다.

옆에 발 받침용 의자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키로는 무리였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러나 그보다 한 뼘 정도 큰 나는 가능했다.

의자를 딛고 올라가 책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페르데스는 책을 받지 않고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페르데스 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는 책을 받으며,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영애는 키가 커서 좋겠네.”

“제가 큰 게 아니라 페르데스 님이 작은 거예요.”

페르데스는 그동안 잘 먹여서 살도 붙고, 키도 조금 크긴 했지만, 여전히 작았다.

아무리 봐도 16살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 말에 페르데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도와줬는데도 툴툴거리길래 조금 받아친 건데, 저런 표정을 하니 양심이 쿡쿡 찔렸다.

어린애를 괴롭히는 못된 어른이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페르데스 님은 아직 성장기이니 조금만 관리하면 금방 크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양심의 가책을 덜어 내기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페르데스의 표정이 나아지지 않는 걸 보아하니 전혀 위로되지 않은 모양이다.

* * *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두운 밤.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페르데스 님?”

페르데스의 잠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그의 침실에 온 잭은 소파에 앉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아.”

그러나 페르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한숨만 내쉬었다.

말해 주기 싫은가 보네.

그의 성격상 캐묻는다고 말해 줄 리가 없으니 잭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페르데스의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페르데스의 상태를 계속 살폈다.

페르데스는 제 손을 보다가, 다리를 보다가, 목을 쭉 잡아당기는 등 이상한 행동을 계속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상태를 보아하니 누구랑 싸운 건 아닌 것 같고.

“잭.”

그가 왜 저러는 건지 곰곰이 생각하던 잭은 페르데스가 부르자 한 손을 번쩍 들며 그를 돌아봤다.

“네! 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키가 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네?”

갑자기 웬 키……?

“키가 크고 싶어서.”

당황하는 잭과 달리 페르데스는 심각한 얼굴로 머리 위에 손바닥을 펼쳤다.

“여기서 두 뼘 정도는 더 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글쎄요. 잘 먹고 운동을 많이 하면 키가 크지 않을까요?”

그 부분에 대해선 잭 역시 아는 바가 없으니, 가장 교과서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운동을 하면 키가 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기사님들 보면 하나같이 다들 크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페르데스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만큼 훤칠했던 알도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도 여자 중에선 큰 키에 속했다.

그 점을 생각해 봤을 때, 운동, 특히 검술을 하면 키가 크는 게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 * *

“나도 검술 배울래.”

이른 아침.

느닷없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참 황당했다.

“진심이세요?”

“응. 나도 검술을 배우고 싶어졌어.”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을 기사로 만들 생각이냐며 역정을 냈던 그였다.

그런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갑자기 검술을 배우겠다고 하는 걸까.

당황스러웠지만, 나쁜 건 아니었다.

검술을 배우면 기초 체력이 올라가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테니까.

“좋아요.”

손해 볼 건 전혀 없으니,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럼 알도르 경에게 연락해서 내일부터…….”

“그 남자 말고.”

페르데스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자르며 요구했다.

“영애가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제가요?”

“응.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영애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민폐인 건 알지만, 내가 백치가 아니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검술 훈련을 하는 것도 숨겨야 하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기사 훈련장은 쓰지 못할 테고, 남은 곳은 영애가 쓰는 그 비밀 훈련장뿐인데, 거기서 할 거라면 영애가 가르쳐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매번 그 남자한테 거기로 오라고 하는 것도 수상쩍잖아.”

뭔가 이상한 것 같으면서도 반박할 곳이 없는 말이었다.

역시 내가 검술을 가르쳐야 하나.

머릿속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나열되면서 조금 고민됐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해요.”

어차피 난 아침마다 심신 단련 목적으로 검술 연습을 조금씩 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조금씩 가르쳐 주면 되겠지.

어차피 당분간은 기초 체력을 키우기 위해 훈련장 뺑뺑이 같은 것만 잔뜩 하게 될 테니, 어려울 건 전혀 없었다.

* * *

페르데스는 알도르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수업을 듣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제 손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전에 도서관에서 아델이 한 의미심장한 말도 있으니 페르데스는 마법사가 되기 위해 독학했을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알도르도 그의 열정을 알아봤는지, 성심성의껏 페르데스를 가르쳤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가 좋아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들은 수업이 끝나면,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인사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

탁-

“요즘 아가씨께 검술 훈련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오늘도 그러고자 책을 덮었던 페르데스는 알도르가 말을 걸자 그를 쳐다봤다.

“검술 훈련이라면 제가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그녀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건가?”

“정확합니다.”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할 법한데, 알도르는 그러지 않았다.

페르데스는 그런 알도르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험한 속내를 숨기고 착한 척하는 사람들보단 좋게 봤다.

그래도 그가 싫은 건 마찬가지지만.

“싫다면?”

단호한 거절에 알도르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가씨께선 지금 하시는 일만 해도 바쁘신 분입니다.”

“아침에 그녀가 훈련할 때 옆에서 죽도록 훈련장만 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거라면 제가…….”

“이미 그녀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린 거다.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내가 아닌 그녀한테 직접 가서 말하지, 그래?”

차마 그럴 수는 없는지 알도르가 입을 다물었다.

페르데스는 그런 알도르의 태도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비틀었다.

그에게 몇 마디 더 쏘아붙여 줄까 싶다가도 그와 이런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서 페르데스는 책을 들고 일어섰다.

“아가씨께서 왜 당신을 선택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도르가 페르데스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절대 당신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가려던 페르데스는 그 말에 멈춰 섰다.

알도르의 지적은 정확했다. 저 말에 반박할 거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다. 저 남자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글쎄.”

그 마음이 새빨간 거짓말을 만들어 냈다. 페르데스는 오랫동안 갈고 닦은 연기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며 여유롭게 웃었다.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겠지?”

* * *

페르데스의 교육을 알도르 경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페르데스의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갔는지 알아야 교육 단계를 조절할 테니,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보고 날이었다.

페르데스가 알도르 경에게 교육을 받은 지 약 2주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가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등 열심히 했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결과는 아주 훌륭했다.

5세보다 못했던 귀족 소양은 8세 정도까지 끌어올렸고, 행정이나 법무 같은 것도 터득 속도가 빨랐다.

이대로라면 3개월 안에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겠어.

“수고했어요, 알도르 경. 앞으로도 수고해 주시고요.”

“네.”

“내 부탁을 들어준 감사의 뜻으로 뭔가 주고 싶은데, 혹시 원하는 게 있나요?”

그가 원하는 선물을 주고 싶어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아는 게 없으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놓고 물어보는 게 나았다.

내 말에 알도르 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정말로 없어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 있으면 지금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역시 원하는 게 있는지 알도르 경이 멈칫했다.

바로 말할 줄 알았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걸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것 같아 재차 말했다.

“뭐든 말해 봐요. 물건이 아니라 다른 것도 좋아요.”

“……뭐든 말입니까?”

“네. 뭐든.”

웃으며 재차 고개를 끄덕이자, 알도르 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럼…… 아가씨께 충성을 맹세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구인데.

당황한 내가 입을 다물자 알도르 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 말고 제가 원하는 건 없습니다.”

웃으면서 못을 쾅쾅, 박는구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전처럼 거절하거나 무시하자니,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내 입으로 말한 터라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그것 말고 다른 건 없나요, 알도르 경?”

“네, 없습니다.”

“저한테 충성을 맹세해서 좋을 건 없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끄응, 의지가 확고하구나.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좋아요.”

내 입으로 뱉은 말이니 지켜야지.

“대신 지금 말고, 한 달 뒤에 신입 기사 서임식을 할 때, 그때 하도록 해요.”

한 달의 시간을 두는 건, 그동안 어떻게든 알도르 경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알겠습니다.”

알도르 경도 그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받아들였다.

“혹시 그 전에 마음이 바뀌면 꼭 이야기해 줘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슬쩍, 마음을 바꿔 주길 바란다는 의사를 보였건만, 알도르 경은 매정하게 철벽을 치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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