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밤새 내린 봄비가 땅을 촉촉하게 적셨다.
초록빛의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이 마치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바탕 비를 쏟아 내고 깨끗해진 하늘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밖으로 나왔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빨래터에 모인 아낙네들이 빨랫감을 두드리며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처음에 영주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큰일 났구나 싶었어.”
“맞아. 영주가 없는 영지는 결국 도태되기 마련이니까.”
누군가 터뜨린 주제에 다른 사람들은 크게 공감하며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았다.
“아가씨께서 계시긴 하지만, 후계자 수업을 전혀 받지 못하신데다가 약혼자도 없으니…….”
“어라? 정말? 난 아가씨께서 일을 너무 잘하셔서 받은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가씨께서 후계자 수업을 전혀 받지 못하신 걸 어떻게 아는 거야?”
“그야 아가씨는 기사 아카데미에 가지 않으셨으니까.”
돌아온 질문에 아낙네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했다.
“만약 영주님이 아가씨를 후계자로 임명하실 생각이셨다면, 기사 아카데미를 보내셨겠지.”
“아, 그렇네. 하긴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해도 아직은 여기사가 인정받지 못하니까.”
“그렇지. 영주님이 아가씨를 후계자로 삼고 싶으셨어도, 가신들이 반대했을 거야.”
“불쌍한 아가씨…….”
여기 있는 대부분이 아델이 태어나기 전부터 레오폴드 영지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아델이 태어난 순간과 그녀가 처음 생일을 맞이했을 때 등, 영광스러운 순간을 함께했던 만큼 그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런데 아델이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다들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난 아가씨가 영주님이 되셨으면 좋겠어.”
한 아낙네가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옷감을 세게 두드리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이상한 놈이 대뜸 나타나서 ‘지금부터 내가 영주다!’라고 뻗대는 것보단 아가씨가 영주가 되는 게 열 배, 아니 백 배는 낫잖아.”
옆에 있던 다른 아낙네가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가씨께서 영지 일에 무심하시고,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잖아. 지금 얼마나 잘해 주고 계신대.”
그렇지. 그렇지. 아낙네들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감했다.
“기사가 아닌 게 왜? 우리가 필요한 건 검술을 잘하는 영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보살펴 주시는 영주님이라고.”
“맞아.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영주님이 되셨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부디 아델이 영주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물결처럼 영지민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 * *
알도르 경이 기사단 정비를 끝내면 고생했다는 의미로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나흘 정도 휴가를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사단 정비가 예상했던 것보다 한참 늦게 끝나 그럴 수가 없었다.
벌써 4월 말이었으니까.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무조건 페르데스의 교육을 끝마쳐야 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알도르 경에게 내일부터 바로 페르데스를 교육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불만을 토로할 법도 하건만, 알도르 경은 고맙게도 내 결정을 따라 주었다.
나중에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을 해 줘야겠어.
‘뭘 해 주면 좋을까?’
알도르 경과 결혼까지 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비록 이름뿐인 아내였다곤 해도, 나와 가문을 위해 인생을 희생한 사람에게 참 무심했구나.
지금이라도 잘해 주고 싶어, 뭘 선물하면 좋을지 고민하는데 하네스가 찾아왔다.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아가씨.”
“이리 줘.”
하네스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뭐가 이렇게 많담. 나는 편지들을 쓱 훑어봤다.
대부분 티 파티 같은 사교 모임 초대장이었다.
사교 모임에 참가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지만, 귀족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다.
그렇다고 모두 다 참가할 필요는 없었다.
이 중에서 내게 도움이 될 만한 가문을 선별해서 참가하면 됐다.
귀족회에 속한 가문은 웬만하면 참가해야지.
지금부터 제대로 친분을 쌓아 둬야 나중에 내가 큰일을 하려고 할 때, 적어도 걸림돌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멀리 있는 곳은 가기 힘드니 그중에서도 괜찮은 곳들을 골라내던 와중 눈에 띄는 편지가 있었다.
왕관을 관통한 두 개의 검. 연합국의 상징이었다.
즉, 내가 애타게 기다리던 답장이라는 의미.
나는 다른 편지들을 내려 두고, 그것부터 확인했다.
봉투 안에는 종이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입학 신청서.]
연립 기사 아카데미 입학 신청서였다.
“아가씨……?”
책상 옆에 서 있다가 무심코 입학 신청서를 본 하네스가 깜짝 놀라며 날 불렀다.
나는 뭐라 설명하는 대신 웃으며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들은 하네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 * *
페르데스의 수준을 알아야 앞으로 어떻게 교육을 할지 결정하니, 첫날에는 간단하게 시험을 봤다.
페르데스는 귀족들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이름뿐인 황자라서 지금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기초 과목 수준이 평균?”
같은 이유로 기초 과목도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평가가 나왔다.
“정말로 페르데스 님의 기초 과목 수준이 평균인가요?”
도저히 믿기지 않아 묻자, 알도르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학 쪽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 외에는 평균입니다. 특히 수학은 평균 이상의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어려워하는 수학에서 평균 이상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그에게 기초 과목을 가르쳐 준 스승이 있었을 리는 없고.
독학한 건가?
그러고 보니 페르데스는 예전에 마법사가 꿈이었다고 말했었다.
아무래도 마법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기초 과목을 독학한 모양이다.
독학으로 평균 이상의 수준을 갖춘 건 상당히 놀랍고 대단한 일이었다.
그만큼 페르데스가 똑똑하다는 의미이니,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기초 과목은 빼도 되겠네요.”
“심화 과정을 가르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학자나 관리로 만들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해요.”
특히 수학이 평균 이상인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페르데스가 행정이나 법무 같은 걸 알 리가 없으니, 그 부분은 시험을 치지 않아 보고 받을 게 없었다.
“그럼 기초 과목을 제외한 다른 부분들의 교육을 부탁할게요, 알도르 경.”
알도르 경이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맡겨 주십시오, 아가씨.”
* * *
공식적인 감시역인 개럿을 내보냈으니, 황제가 새로운 감시역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황제는 미안하다는 형식적인 사과문만 보낼 뿐, 새로운 감시역을 보내진 않았다.
황제가 페르데스를 감시하는 걸 포기했을 리는 없고.
역시 공작저에 다른 감시역이 있는 게 분명했다.
최근 공작저에 새로 들어온 사용인은 없으니, 기존에 있는 사용인 중 누군가 나와 가문을 배신했다는 의미가 된다.
“…….”
문득 세 번째 생에서 믿었던 하녀가 날 배신한 일이 떠올라 입 안이 썼다.
그런 일이 두 번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역시 사람 일은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공작저에 일하는 사용인들이 워낙 많아, 그들 중 누가 배신자인지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함정을 파서 그쪽으로 몰아붙이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황제가 의심할 테니 그럴 수가 없었다.
최대한 내 계획이 들키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은 공작저에 머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내가 도서관에 갔을 때, 사서 말고 다른 사람들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어?”
그런데 웬일로 도서관에 사서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페르데스였다. 그는 긴 테이블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었다.
어찌나 집중하는지 바로 뒤까지 다가갔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읽는 거지?
나는 페르데스의 뒤에 서서 그가 읽는 책의 내용을 확인했다.
[제국의 암흑기에 군림했던 13대 황제, 클레맨트 황제는…….]
아, 제국의 역사서구나. 그의 표정이 심각했던 게 바로 이해가 됐다.
제국의 역사서는 더럽게 재미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법무나 행정에 관한 책을 읽는 게 더 재미있었다.
그나저나 열심히 하고 있구나.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의 사이가 좋지 않아, 내심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페르데스가 대견해서 흐뭇하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흐억?!”
그런 내 시선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본 페르데스는 날 보고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입니까!”
어찌나 크게 질렀는지, 사서가 놀라서 달려올 정도였다.
“아무 일도 없으니 가서 하던 일 하렴.”
나는 사서를 보내고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페르데스를 내려다봤다.
페르데스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인상을 팍 쓰며 물었다.
“왔으면 왔다고 말해야지, 가만히 서 있으면 어떡해? 귀신이 온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페르데스 님이 너무 집중하고 계셔서 말을 걸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아니, 뭐. 사과를 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페르데스는 조금 멋쩍은 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일어섰다.
“여긴 어쩐 일이야?”
“찾아볼 게 있어서요.”
“영지 일?”
“네. 여름이 오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페르데스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서류 뭉치에 닿았다.
“도와줄까?”
“마음은 감사하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아직은, 말이지?”
내 말의 숨은 뜻을 바로 알아들은 페르데스가 그 부분을 콕 집어 되물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가지고 온 서류를 그의 맞은편에 내려놓았다.
“지금 보시는 역사서보다 팜뉴의 역사서가 좀 더 읽기 쉬울 겁니다.”
그리고 이 주제로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걸 돌려 표현했다.
“…….”
이번에도 바로 알아들은 페르데스는 날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섰다.
“팜뉴의 역사서라고 했지?”
“네. 찾아 드릴까요?”
“됐어. 내가 찾아볼게.”
나는 거의 뛰다시피 걸어가는 그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