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아무것도 아니야.”
아닌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음식 식겠다. 어서 먹자.”
빤히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회피하듯 말을 돌리며 감자 스튜를 크게 떠먹었다.
“맛있다.”
곧 눈동자가 커지더니 벌어진 입술에서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내심 그의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렇죠? 이 가게의 특제 스튜에요. 파이는 더 맛있어요.”
페르데스는 파이도 먹더니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러네. 이것도 정말 맛있네.”
“오호호호, 칭찬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지나가던 앰버가 그의 칭찬을 듣고 감사의 윙크를 날렸다.
이에 페르데스는 흠칫 놀라더니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4황자인 걸 다들 알게 됐는데, 백치인 척 연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는 괜찮아요.”
“정말?”
“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페르데스는 비로소 안심한 듯 굳은 얼굴을 풀며 감자 스튜를 떠먹었다.
정말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페르데스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빠르게 해치우고 한 그릇을 더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앰버가 잘 먹는 분이라서 좋다며 호탕하게 웃을 정도였다.
그렇게 식사를 끝낸 뒤에는 약속한 대로 영지 안내를 해 주었다.
전부 다 세세하게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광장같이 중요한 곳만 안내했다.
그래도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고작 영지를 반 바퀴 돌았을 뿐인데,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오늘은 이쯤 하고 돌아갈까요?”
“잠깐만.”
페르데스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더니, 근처 꽃집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꽃집에는 왜 들어가는 거지?
“아.”
의아했는데 꽃집에서 나온 페르데스가 안고 있는 새하얀 국화꽃 다발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내가 국화꽃 다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페르데스가 약간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영지에 온 지 일주일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 레오폴드 공작에게 인사를 안 했더라고.”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 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인사하려는데…… 너무 늦었을까?”
“……그럴 리가요.”
목이 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애써 꺼내며 국화꽃 다발을 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께서…… 굉장히 좋아하시겠어요.”
그제야 안심한 듯 페르데스가 웃자, 나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새삼 그를 조력자로 선택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안 쓰려고 했는데…….”
저택으로 돌아온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홀쭉해진 잭이 준 가죽 주머니를 내려다봤다.
잭이 힘들게 모은 돈이니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레오폴드 공작의 무덤에 놓을 꽃다발을 사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쓰게 됐다.
그 돈을 아델에게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황궁에 있을 땐 돈을 주고 물건을 살 일이 없었으니, 딱히 돈이 필요 없었다.
그랬는데 황궁을 나오니 돈이 필요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자신이 먹고, 입고, 자는 등 생활하는 모든 곳에 돈이 들어갔다.
그것도 아델의 돈이.
그 사실을 몰랐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자각하고 나니 몹시 민폐처럼 느껴졌다.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돈을 번단 말인가.
잭처럼 간단한 잡일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황자가 그런 일을 하는 걸 주변에서 용납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황족에겐 매달 품위 유지비가 나오는 걸로 아는데.’
황족이지만 황족으로서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해, 지금까지 품위 유지비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감히 받을 생각을 하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이라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페르데스는 감시역으로 따라온 하인인 개럿을 찾았다.
감시 말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조차도 허술하게 하는 개럿은 그의 방 침대에서 느긋하게 뒹굴뒹굴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전하?”
그러다 페르데스가 그를 찾아오자 몹시 귀찮다는 듯 물었다.
페르데스도 그와 오래 상종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 바로 본론을 말했다.
“화, 황실에서 매달 돈이 나온다고 드, 들었는데, 그, 그걸 받을 수 있을까?”
“돈……이요?”
찰나이지만 개럿의 눈 밑이 떨렸다.
그걸 본 페르데스는 바로 알아챘다.
이 자식이 품위 유지비를 빼돌렸구나.
생각해 보면 옷이나 보석 같은 걸 챙겨 준 황후가 품위 유지비를 챙겨 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제대로 다 챙겨 주진 않았어도, 어느 정도는 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빼돌렸단 말이지.
“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한번 알아볼게요.”
그래 놓고 시치미까지 딱 잡아떼고.
페르데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개럿은 페르데스가 백치라고 생각하고 막 나가는 것 같은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참에 복수 좀 해야지.
“그, 그래? 그럼 내가 여, 영애한테 물어볼게. 바로 화, 황제 폐하께 연락을 해 달라고 말이야.”
“잠깐만요!”
개럿은 페르데스가 곧바로 아델에게 갈 것처럼 굴자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생각해 보니까 황후 폐하께서 황궁을 떠나시기 전에 조금 주신 돈이 있어요!”
조금이라.
“지금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개럿은 허겁지겁 방을 뒤지더니 고급 가죽 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여기 있어요!”
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제법 들어 있었지만, 페르데스는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담컨대 황후가 준 돈의 반의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며칠 만에 그 많은 돈을 다 썼을 리는 없고, 다른 곳에 꿍쳐 둔 거겠지.
“내, 내가 듣기로 이것보다 많았던 것 같은데…….”
그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알았는데 그냥 넘어갈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여, 역시 영애한테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 달라고…….”
“그러고 보니 혹시 잊어버릴까 봐 나눠 뒀는데, 내 정신 좀 봐!”
개럿은 깜빡했다며 다른 가죽 주머니를 가져왔다.
그 안에는 처음 받은 가죽 주머니에 든 만큼 금화가 들어 있었다.
“이게 전부예요. 더는 없어요.”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페르데스는 속으로 개럿을 비웃었다.
아무래도 그는 도둑이 제 발을 저린다는 명언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 그래. 지, 지금이라도 말해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페르데스가 넘어간다고 생각했는지, 개럿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웃었다.
‘지금 많이 웃어 둬.’
나중에는 웃지 못할 테니까.
“나, 난 이, 이만 가 볼게.”
페르데스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며 일단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개럿이 저녁을 먹으러 간 틈을 타, 다시 그의 방을 찾았다.
개럿은 치밀하게 방문을 잠갔지만, 페르데스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페르데스는 날카롭고 얇은 핀으로 손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황궁에 있을 때, 짓궂은 황자들이 그를 가두고 문을 잠그는 경우가 많아, 살려다 보니 터득한 기술이었다.
개럿의 방은 여느 사용인들의 방처럼 깔끔했다.
페르데스는 쭉, 방을 훑어봤다가 침대 밑을 확인했다.
“빙고.”
침대 밑에 누가 봐도 수상쩍은 상자가 있었다.
상자에도 자물쇠가 걸려 있었으나 이 역시 페르데스를 막지 못했다.
페르데스는 쉽게 자물쇠를 풀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백금화 두 개와 금화가 들어 있었다.
백금화 하나가 백 골드니, 아까 받은 것까지 전부 다 합치면 대략 이백오십 골드 정도 됐다.
‘역시 반의반도 주지 않았잖아.’
페르데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원래 계획은 돈만 쏙 빼돌리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페르데스는 어제 하녀들이 달아 주었던 브로치를 개럿의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그런 다음, 돈이 든 상자를 챙겨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지금 바로 혼쭐을 내고 싶은 마음은 컸으나, 일단 개럿이 마음고생을 하는 걸 보고 싶어 이틀 정도 기다렸다.
그 이틀 동안 개럿은 똥 마려운 개처럼 끙끙 앓으며 돌아다녔다.
“왜 그래?”
그 이유를 물어보자 개럿은 뭐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벙긋거리면서도 끝내 말하지 못했다.
몰래 꿍쳐 둔 돈이 사라진 거니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속으로만 끙끙 앓는 게 눈에 훤히 보여 비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면 됐겠지?’
더 놀려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그보단 저 재수 없는 자식을 얼른 눈앞에서 치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결론을 내린 페르데스는 아델을 찾아갔다.
“영애.”
“페르데스 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던 아델이 의아해하며 일어섰다.
“무슨 일이세요?”
페르데스는 말없이 다가가 가지고 온 상자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상자 안에 든 금화를 본 아델의 눈이 약간 커졌다.
“훔치셨어요?”
페르데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영애는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잘 튀는 것 같아.”
“빈털터리였던 페르데스 님이 갑자기 이렇게 큰돈을 가져오셨는데, 그럼 뭐라고 생각해야 해요?”
“황실에서 품위 유지비가 나왔을 수도 있잖아.”
“아, 품위 유지비.”
그런 게 있었지.
아델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상자 안에 든 돈을 보다가 페르데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걸 왜 저한테 가지고 오신 거죠?”
“감시역으로 따라온 하인이 그 돈을 몰래 꿍쳐 뒀더라고.”
“이런, 손버릇도 나쁜 놈이었네요.”
“그래서 말인데 전에 영애랑 함께 영지 구경을 나갔을 때, 내가 착용했던 브로치 기억나?”
“브로치요?”
기억을 되짚던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나요. 푸른 보석이 박힌 브로치 말씀하시는 거죠?”
아, 기억하는구나.
페르데스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브로치가 갑자기 사라져서 그런데…… 찾아 줄래?”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았지만, 단박에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눈치챈 아델이 픽, 웃었다.
“그럼요. 손버릇이 나쁜 놈은 혼쭐을 내 줘야 하니, 당연히 찾아 드려야죠. 범인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