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262)

43화

중앙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이미 외출 준비를 끝내고 홀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델이 보였다.

활동하기 좋게 슈미즈 원피스에 스펜서를 걸치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여태 봤던 아델은 여느 귀족 영애처럼 차분하고 우아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드넓은 들판을 뛰어다닐 것처럼 생기발랄하고 명랑해 보였다.

그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려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너무 예뻐서 페르데스는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하네스와 이야기를 하다가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은 강렬한 시선을 느낀 아델이 뒤를 돌아봤다.

“아, 전하.”

곧 계단 중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페르데스를 발견한 아델이 눈매를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며 웃었다.

쿵-

그 순간, 페르데스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괜찮으세요, 페르데스 님?”

뒤따라오던 하녀가 그 모습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페르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

정확히는 온몸의 감각이 아델에게만 집중되는 바람에 하녀의 말을 듣지 못해 대답할 수 없는 거였다.

* * *

“아까 보니까 몸이 안 좋으신 것 같던데, 괜찮으세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기껏 걱정돼서 물었건만 돌아오는 대답이 매몰찼다.

게다가 페르데스는 마차에 탄 이후로, 내 쪽은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줄곧 창밖만 보고 있었다.

얼굴도 평소보다 약간 붉은 것 같았고.

“정말 괜찮으시죠?”

“그렇다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게 말씀해 주세요, 전하.”

그제야 페르데스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왜 그러세요?”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날 어떻게 부르는지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가 불만스레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런데 왜 영애는 계속 날 전하라고 부르는 거지?”

“제가 사용인들처럼 불러 주길 바라세요?”

“그러니까 물어본 거 아닐까?”

평소보다 속이 배배 꼬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 아니겠지.

“알겠습니다, 페르데스 님.”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흔쾌히 그가 원하는 대로 불러 주었다.

비로소 만족했는지, 페르데스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여전히 내 쪽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그래도 나와 대화할 마음은 있는지 페르데스가 물었다.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으니, 점심부터 먹으러 가려고요.”

“메뉴는 뭔데?”

“가 보시면 알아요.”

“대답이 자신만만한 걸 보니 거기 음식이 아주 맛있는 모양이네.”

“네. 기대하셔도 좋아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페르데스는 곁눈질로 나를 흘끗 보곤 다시 창밖을 쳐다봤다.

입을 꾹 다문 채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는 걸 봐서 바깥 구경을 하는 것 같아 더 말을 걸지 않았다.

마차 안에 흐르던 정적은 목적지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서면서 깨졌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페르데스가 눈앞의 건물을 보고 당황하며 뒤따라 내린 날 돌아봤다.

“잘못 온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도 눈앞에 있는 건물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대로 왔어요.”

“뭐?”

페르데스가 아까보다 더 당황하며 건물을 가리켰다.

“정말로 이 허름한 곳에서 점심을 먹겠다고?”

페르데스의 말대로 이곳저곳에 금이 간 건물은 굉장히 허름했다.

당장 무너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겉보기엔 이래도 안은 멀쩡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여긴 아무리 봐도 귀족 영애가 올 만한 곳이 아니야.”

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셨던 거구나.

나 역시 아버지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페르데스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터라 웃음이 나왔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긴 예전에도 자주 왔던 곳이니까요.”

“……자주 왔었다고?”

“네. 그러니까 어서 들어가요.”

나는 여전히 못 미더워하는 페르데스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게 말한 것처럼 내관은 금 하나 없이 말끔했다.

점심시간을 약간 지나서 왔는데도 가게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빈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있었다.

내가 먼저 자리에 앉고, 맞은편에 페르데스가 앉았다.

페르데스는 눈동자를 연신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크핫핫. 내가 이겼다!”

“크윽, 분하다. 다음에는 꼭 내가 이기겠다!”

특히 가게 중심을 차지한 용병들이 크게 떠들 때마다 흠칫 놀라며 그들을 쳐다봤다.

겁에 질린 게 아닌 이 상황이 적응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줄곧 황궁에만 있었던 그에겐 굉장히 낯선 상황일 테니,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서 오세…… 어머,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은 날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어요? 요즘 뜸하셔서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닌지 걱정했어요.”

“잠시 수도에 다녀오느라 뜸했던 거야. 보다시피 잘 지냈고.”

“다행이네요! 아, 엄마한테 아가씨가 왔다고 말해야지!”

종업원은 주문을 받다 말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종업원이 두고 간 물을 마시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 표정마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 이곳에 왔던 내 표정과 똑같았다.

역시 사람은 다 똑같은 모양이네.

속으로 웃으며 페르데스에게 말을 걸려는데 풍채가 좋은 중년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등장했다.

“드디어 오셨군요, 아가씨!”

아까 그 종업원의 모친이자 이 식당의 주인인 앰버였다.

“하도 안 오시길래 제 가게를 잊으신 건 아닌지 걱정했어요!”

“내가 앰버의 가게를 잊을 리가 없잖아. 특히 앰버가 만든 파이와 감자 스튜는 꿈에서도 절대 못 잊는다고.”

“오호호,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늘 드시던 대로 드리면 될까요?”

“그래.”

앰버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페르데스가 눈을 크게 깜빡이며 내게 물었다.

“여기 자주 왔었나 봐?”

“아까 가게 앞에서 자주 왔었다고 말했었잖아요.”

“누구랑 자주 왔었는데?”

그게 왜 궁금하지?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아버지랑요.”

“…….”

페르데스의 표정이 한순간 흐려졌다.

그는 낡은 나무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길게 내리깔며 사과했다.

“아픈 곳을 찌를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

“괜찮아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았다.

생을 반복하는 동안 아버지를 잃은 것에 대한 상처는 어느덧 아물어 새살이 돋고 있었으니까.

내게 상처를 줄 목적으로 일부러 찌르지 않는다면,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말을 믿을 수 없는지 페르데스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정말 괜찮다고,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재차 말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이야, 진짜 아가씨잖아.”

아까 크게 떠들며 페르데스를 놀라게 했던 용병 무리였다.

모르는 얼굴도 있었지만, 아는 얼굴도 있었다.

특히 내 어깨를 건드렸던 이 용병은 예전에 아버지에게 고용된 적이 있던 터라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잘 지내셨죠?”

“이야, 예전보다 더 예뻐지신 것 같은데요.”

“이분이 소문의 그 아가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용병들은 울타리처럼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참새처럼 떠들어 댔다.

“어라, 그런데 곁에 앉아 계신 분은……?”

내게 쏠렸던 관심은 곧 페르데스에게 옮겨졌다.

항상 아버지랑 왔었는데, 처음 보는 소년을 데리고 왔으니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그들에게 페르데스를 소개해 주는 건, 사냥개에게 사냥감을 던져 주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내 약혼자야.”

그러나 앞으로 페르데스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봤을 때, 정식으로 소개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 이분이 아가씨의 약혼자인 황자 전하시군요!”

아니나 다를까, 용병들은 아까보다 더 흥분해서 떠들어 댔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더 괜찮은 분인 것 같은데요!”

“그래도 덩치가 좀 더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지금은 너무 마르셨어.”

“어허, 황자 전하께 무슨 말버릇이야!”

“죄송합니다, 전하! 이 녀석이 좀 무식해서 말을 막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누가 무식하다는 거야!”

어찌나 정신없이 떠들어 대는지, 혼이 쏙 빠질 지경이다.

페르데스는 이미 혼이 빠졌는지 눈동자가 반쯤 풀렸다.

“반가운 거 잘 알았으니까, 이쯤 하고 다들 돌아가.”

더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 강제로 내쫓았다.

험상궂은 외모와 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용병들은 순순히 내 말을 들었다.

용병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음식들이 나왔다.

앰버의 특제 파이와 감자 스튜, 그리고 치즈를 듬뿍 올린 스파게티였다.

“드세요.”

음식이 나왔는데도 페르데스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 페르데스 님.”

무심코 전하라고 부르려다, 그가 사용인들처럼 이름을 불러 달라고 말했던 걸 뒤늦게 상기하고 정정했다.

“아.”

그러자 페르데스가 짧게 탄성을 터뜨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많이 소란스러웠죠? 죄송해요. 평소엔 이 정도까진 아닌데 제가 너무 오랜만에 왔더니 다들 반가워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말하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아는 보통의 경우랑 달라서 조금 놀랐던 것뿐이니까.”

“보통의 경우요?”

“보통 귀족 가문의 영애는 영지민들이랑 이렇게 친하게 지내지 않잖아.”

“그건 그렇죠.”

첫 번째 생에선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생을 몇 번 반복하며 여러 영지를 다니다보니 내가 특별한 경우라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를 따라 영지를 자주 돌아다니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인 게…….”

페르데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내게 하는 말인 것 같아 물어보자, 페르데스가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