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델은 페르데스에게 내일은 약속한 대로 안내인과 호위 기사를 붙여 줄 테니 영지 구경을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델이 직접 영지 구경을 시켜 줄 때, 김이 팍 식을 것 같아 페르데스는 거절했다.
안내인과 함께하는 영지 구경은 아델과 먼저 다녀온 뒤, 가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 남자가 아델의 계획을 몰랐다니.’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하긴 자신 역시 잭에게 아델의 계획을 말하지 않았으니, 그 여자 역시 호위 기사에게 말하지 않는 게 맞긴 했다.
즉, 이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그녀 뿐이라는 사실이니, 페르데스는 그 점이 몹시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전하.”
페르데스의 간식을 들고 찾아온 잭은 소파에 앉아 히죽히죽 웃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물었다.
“아까 아가씨를 만나러 가시는 것 같던데 거기서 기분 좋은 일 있으셨어요?”
“기분 좋은 일은 무슨.”
페르데스는 언제 웃었냐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쿠키를 집어 들었다.
곡물로 만든 쿠키는 단맛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귀찮게 됐어.”
“왜요?”
“교육을 받아야 하거든.”
페르데스가 앞으로 배워야 할 건 사교댄스, 예절 등 귀족의 기본 소양은 물론 산수, 문학 같은 기초 과목, 행정과 재정, 법무, 교역까지 배워야 했다.
레오폴드 공작 영애의 약혼자가 됐으니 귀족의 기본 소양을 배우는 건 충분히 이해됐다.
무식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산수나 문학 같은 기초 과목을 배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다른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보통 영지나 가문을 관리하거나, 중앙 관리가 되는 자들이 배우는 거였으니까.
아델의 복수가 끝나면 대륙을 여행하는 방랑자가 될 그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분야였다.
‘단순히 주변 눈을 속이기 위해서 그러는 건가?’
아델이 다른 황자들을 제치고 반푼이에 백치인 페르데스를 선택한 것에 의문을 품은 귀족들이 많았다.
몇몇은 아델이 다른 목적을 가지고 페르데스를 선택한 게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그들을 속이기 위해 페르데스에게 그 모든 것들을 가르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러면 아델이 페르데스를 나중에 레오폴드 공작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 줄 수 있으니까.
“우와, 교육이라니.”
페르데스의 이야기를 들은 잭은 소녀처럼 두 손을 모아 쥐며 감탄했다.
“아가씨께서 전하를 정말 아끼시나 봐요.”
“도대체 어딜 봐서 그 여자가 날 아낀다는 건데?”
“전부 다요! 전하를 황궁에서 데리고 나오신 것부터 시작해서 아가씨의 약혼자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직접 손을 써 주신 것까지, 전부 전하를 아껴서 하신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그 여자의 복수를 위해서 그런 거야.
페르데스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차와 함께 삼켰다.
“전하께서도 아가씨에게 마음을 활짝 여신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에요.”
“쿨럭-”
덧붙인 잭의 말에 목구멍을 넘어가던 차가 다시 역류했다.
페르데스는 손등으로 튀어나온 잔여물을 닦으며 잭을 노려봤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그 여자한테 마음을 활짝 열었다고?”
“아닌가요?”
“아니야.”
마음을 조금 열긴 했지만, 활짝 연 건 아니었다.
“그래, 아니야.”
내가 그 여자한테 마음을 열 리가 없잖아.
그러니 절대 아닐 거라고 페르데스는 자기 최면을 걸듯 한참이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 *
페르데스에게 영지 구경을 시켜 주기로 한 날까지 어떻게든 해야 할 일을 끝내려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됐다.
“일을 열심히 하시는 건 좋지만, 조금 쉬면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가씨.”
약속한 날에도 새벽에 일어나 서류들을 붙잡고 있자, 하네스가 몹시 안타까워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차였다.
나는 괜찮다는 빈말 대신 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몸에 찌든 피로가 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페르데스 님과 같이 외출하시죠?”
“응.”
총괄 집사인 하네스가 내 일정을 아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자 전하가 아니라 페르데스 님?
“전하의 이름을 부르는 거야?”
“페르데스 님께서 황자 전하라는 딱딱한 호칭보단 이쪽이 좋다며 그렇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사용인들과 잘 지내는 모양이네.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알도르 경과는 잘 지내지 못하는 거지?’
문득 전에 알도르 경과 페르데스가 기 싸움을 벌였던 게 떠올라 콧잔등을 찌푸렸다.
부디 수업할 땐 그렇게 싸우지 말아야 할 텐데.
“언제 나가십니까?”
몰라서 묻는 게 아닌 확인차 물어보는 거였다.
“1시쯤 나가서, 그곳에서 점심 먹으려고.”
내가 말하는 그곳이 어딘지 아는 하네스가 웃었다.
“안 그래도 그곳 주인장이 아가씨께서 오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좋아하겠군요.”
“그럼 다행이고.”
내가 빈 찻잔을 내려놓자 하네스가 채워 주었다.
“이거.”
하네스가 찻주전자를 내려놓자마자 서류를 내밀었다.
“막스 상단과의 거래를 관리하는 담당자한테 전해 줘.”
막스 상단은 레오폴드 공작가와 거래하는 상단 중 하나로, 황후의 외가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서류의 앞부분을 쭉 훑어본 하네스가 놀라며 내게 물었다.
“아가씨, 정말 이대로 실행하실 겁니까?”
“그래.”
“분명 반발이 있을 겁니다. 보복을 해 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
막스 상단은 황후의 외가에서 운영한다는 것만 빼면 별 볼 일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반발한답시고 발악해 봤자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아가씨…….”
하네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걱정스럽게 날 불렀다.
“괜찮아. 타당한 이유를 적어 두기도 했고, 황후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 눈치가 빠른 황후라면 당연히 알 것이다.
내가 이러는 게 체르노서가 페르데스의 뺨을 때린 것 때문이라는 걸 말이지.
황궁에 있었을 땐, 그 일을 복수할 방법이 없어 가만히 있었을 뿐, 그냥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당한 것 이상으로 돌려줘야 성미가 풀렸기에 하네스의 걱정에도 번복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했다.
* * *
“…….”
침대에 늘어놓은 옷가지를 보는 페르데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아델과의 약혼이 확정된 뒤.
황후가 뒤늦게 체면을 차린답시고 이것저것 챙겨 준 덕분에 옷과 액세서리가 많아졌지만, 막상 입으려니 입을 만한 게 없었다.
이건 너무 화려하고, 저건 너무 수수했다.
좀 괜찮다 싶은 건, 너무 얇거나 두꺼워서 지금 계절에 입을 수가 없었다.
“옷이 많으면 뭐 하나.”
다 이따위인데. 툴툴거리던 페르데스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왜 그렇게 놀라시는 거예요, 전하?”
잭이었다. 그를 본 페르데스는 안도하는 것과 동시에 맥이 쭉 빠져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제가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그게 문제라는 거다. 그리고 페르데스 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왜 계속 전하라고 불러?”
“아, 죄송해요. 전하라는 호칭이 입에 붙어서 그랬어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사과하던 잭의 시선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에 닿았다.
“저건 다 뭐예요?”
페르데스도 옷을 보며 대답했다.
“보면 몰라? 옷이잖아.”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요. 왜 옷을 전부 꺼내 놓으셨냐는 거죠.”
“오늘 그 여자랑 함께 외출하기로 했는데, 뭘 입으면 좋을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페르데스를 보던 잭은 곧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되물었다.
“그, 그러니까 오늘 아가씨랑 데이트하러 가신다는 건가요?”
“데이트가 아니라 외출.”
“그게 데이트죠!”
한껏 높아진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페르데스가 깜짝 놀라며 다시 그를 돌아볼 정도였다.
“세상에, 미쳤어.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이제 말씀하시다니!”
잭은 혼잣말하며 발을 동동 굴리다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기예요, 여기!”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잭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가씨랑 데이트 나가신다면서요?”
“어휴,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더 좋은 걸로 준비했을 텐데.”
“브로치 상자 좀 가져와 봐!”
잭과 함께 온 하녀들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페르데스를 꾸미기 시작했다.
어디서 가지고 온 건지 알 수 없는 옷으로 갈아입고, 브로치를 달았다.
그사이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를 말끔하게 정리하고, 얼굴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걸 발랐다.
페르데스는 마치 파도에 휩쓸린 나뭇가지처럼 그들이 하자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페르데스 님, 아가씨께서 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델이 보낸 하인이 약속 시간이 다 됐음을 알렸다.
“어머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다 됐으니까, 아가씨와 데이트 잘하고 오세요!”
“잠깐……!”
하녀들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페르데스는 제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하지도 못하고 아델이 기다리는 홀로 가야 했다.
“잠깐만요!”
긴 복도를 지나 중앙 계단으로 가고 있는데, 허겁지겁 따라온 잭이 페르데스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그건 가죽 주머니였다. 안에는 금화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정식으로 하는 첫 데이트인데 아가씨께 선물이라도 사 드리세요.”
“……됐어.”
혹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잭이 그동안 받은 월급을 알뜰살뜰 모은 돈이라는 걸 알기에 받을 수가 없었다.
페르데스는 가죽 주머니를 돌려주려고 했지만, 잭은 받지 않았다.
“전 괜찮으니까 꼭 아가씨께 선물 사 드리세요!”
“잠깐……!”
잭이 재빠르게 도망치는 바람에, 가죽 주머니를 돌려줄 타이밍을 놓친 페르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머니를 내려다봤다.
잭의 마음은 고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돈은 쓸 수 없었다.
그러니 나중에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