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알도르 경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감정 변화가 적은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싫거나 불편한 점이 있어도 거의 내색하지 않았다.
물론 나나 아버지가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면 걱정하긴 했지만, 저렇게 대놓고 불편한 표정을 짓진 않았다.
그런데 대놓고 불편한 티를 내니 신기했다.
그만큼 페르데스를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니, 그에게 페르데스의 교육을 맡겨도 될지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고.
‘괜찮겠지?’
내가 아는 알도르 경은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도르 경,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러니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아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에게 황자 전하의 교육을 맡기고 싶어요.”
“뭐?”
알도르 경에게 말했는데 대답은 페르데스가 대신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내 교육을 이 녀석이 맞는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싫어.”
페르데스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팍팍 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한테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아.”
알도르 경이 페르데스를 싫어하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내가 선택한 배우자는 훗날 레오폴드 공작이 되고, 알도르 경이 모셔야 할 주군이 된다.
그런데 백치에 반푼이로 소문난 4황자를 선택했으니,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 내가 4황자를 선택했을 때, 알도르 경은 드물게 싫은 티를 팍팍 냈었고.
그러나 페르데스가 그를 싫어하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도르 경이 페르데스에게 못된 짓을 한 건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의아해서 페르데스를 보고 있는데, 줄곧 침묵하던 알도르 경이 말했다.
“저 역시 황자 전하의 교육을 담당하는 게 내키지 않습니다, 아가씨.”
알도르 경이 내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그 이유는 더 예상 밖이었다.
만약 거절한다고 해도 그의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지금은 바빠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내키지 않는다니.
당황해서 쳐다보자 알도르 경이 입술을 일자로 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키지 않지만, 아가씨의 부탁이니 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자 알도르 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걸로 한시름 더는 건가 싶었는데, 다른 복병이 남아 있었다.
“난 싫어.”
바로 페르데스였다. 그는 팔짱을 끼며 불만스레 말했다.
“공작가의 가신들이 내가 영애의 약혼자로서 어느 정도 품격은 갖춰야 한다며 떠드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제대로 된 교육계를 붙여 줘.”
그걸 들었구나. 하긴 그도 귀가 있는데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죄송해요, 전하.”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마음에 걸려 사과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팔짱을 낀 채 손을 내저었다.
“됐어. 다 맞는 소리인데 영애가 사과할 필요는 없지.”
페르데스가 알도르 경을 돌아봤다.
“그러니 제대로 된 교육계를 붙여 줘. 난 영애의 약혼자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고 싶은 거지, 기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고.”
아, 기사 교육을 받을까 봐 알도르 경에게 배우고 싶지 않다고 한 거구나.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 역시 전하를 기사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만약 우리의 관계가 약혼에서 멈추지 않고, 결혼으로 이어진다면 페르데스는 기사가 되어야 했다.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가주가 되려면 기사 작위가 있어야 했으니까.
물론 법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보니 예외는 있었다.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서가 내 남편이 된 게 그 예외 중 하나였다.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인 나는 기사 작위가 없다는 이유로 공작이 되는 걸 반대했으면서 체르노서는 허락하다니.
‘참으로 웃기지.’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만큼 귀족회에 황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의미이니 입 안이 약초를 씹은 것처럼 쓰기도 했다.
물론 귀족회에서 내가 공작이 되는 걸 무작정 반대한 건 아니었다.
그들이 말한 이유는 충분히 타당했고, 정당성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를 대지 못하게, 내가 레오폴드 공작위를 잇는데 감히 의문과 의혹을 품지 못하게 하도록 완벽하게 준비해야 해.
“알도르 경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가신 가문 중 하나인 샹크티스 자작가의 차남으로서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귀족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려면 페르데스의 도움이 꼭 필요했기에 조금 성가셔도 차근차근 설명했다.
“게다가 그는 기사 아카데미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이 남자가?”
페르데스가 약간 의외라는 듯 알도르 경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시선이 기분 나빴는지, 알도르 경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전하.”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나빠져서 좋을 건 없으니, 말렸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콧방귀를 끼며 다시 날 쳐다봤다.
“그래서 기사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게 날 가르치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날 기사로 만들 생각이 없다면서?”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려면 검술뿐만 아니라 체술, 역사, 사교댄스, 의술, 인문학, 수사학 등 다양한 과목들도 이수해야 합니다.”
“요컨대 이 남자가 그 과목들을 전부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는 거군.”
“네. 그러니 알도르 경이 전하를 가르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페르데스가 일정 이상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니 여러모로 따져 봤을 때 알도르 경이 스승으로 제격이었다.
“그러니 황자 전하의 교육을 부탁할게요, 알도르 경.”
재차 부탁하자 알도르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난 아직 받아들인다고 안 했는데?”
페르데스가 몹시 어처구니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렇게 설명해 줬는데도 아직 못 알아들은 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설명하려는데 페르데스가 곁눈질로 알도르 경을 흘겨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영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정말인가요?”
드디어 골칫거리가 해결되는 건가?
“응. 그 대신 영애가 직접 영지 안내를 해 줘.”
“제가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나뿐만 아니라 알도르 경도 당황스러운 눈으로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페르데스가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었다.
“영애가 원하는 걸 들어줬으니, 영애도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지.”
그건…… 그렇지.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닌지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니,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페르데스에게 영지 구경을 시켜 주면서 이것들도 다 할 수 있을까?
자는 시간을 줄이면 어찌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앞으로 받으실 교육들은 전하께서 살아가시는 데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고민하고 있는데, 알도르 경이 페르데스에게 말했다.
“특히 차후 레오폴드 공작 각하가 되실 거라면, 더욱 도움이 되실 테지요.”
“……내가 레오폴드 공작이 된다고?”
“네. 차후 아가씨의 정식 배우자가 되신다면, 레오폴드 공작위를 받으실 겁니다. 설마 그 간단한 사실을 모르셨던 겁니까?”
알도르 경이 약간 비아냥거리듯이 물었지만, 페르데스는 대답하지 않고 날 쳐다봤다.
‘이 녀석은 그걸 몰라?’하는 눈빛이었다.
페르데스가 말하는 그것이, 황제에게 복수하는 걸 말하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못마땅하게 구겨져 있던 페르데스의 얼굴이 확 펴졌다.
“아, 그랬지.”
매끄럽게 올라간 입술에 여유가 묻어났다.
“잠시 잊고 있었네. 백치 연기에 너무 집중했었나 봐.”
“가끔 황자 전하께서 진짜 연기를 하시는 건지 의심이 됩니다.”
“그만큼 내가 연기 잘한다는 거지? 칭찬 고마워.”
“…….”
아까와 180도 달라진 반응에 할 말을 잃은 건지 알도르 경이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페르데스의 달라진 태도가 의아해서 그를 쳐다봤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그렇다고 해도, 딱히 그럴 만한 계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안내해 줄 거야?”
태도는 달라져도 제안은 달라지지 않았다.
흐음, 어떡한다. 나는 쌓여 있는 서류와 탁상 달력에 체크된 일정을 확인한 뒤 대답했다.
“내일 당장은 무리지만, 모레 오후라면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어요.”
“그거면 됐어. 언제든 영애가 직접, 영지 안내를 해 주는 게 중요한 거니까.”
어째서 나한테 대답하면서, 알도르 경을 보고 있는 걸까?
“그럼 언제부터 교육을 받으면 되지?”
이 부분은 내가 아닌 알도르 경의 시간이 되어야 하기에 그에게 물었다.
“알도르 경, 기사단 정리는 어느 정도 됐죠?”
알도르 경은 기사단장이었던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혼란스러워진 기사단을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지금 속도라면 나흘 내로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찌 될지 모르니, 기사단 정리가 끝나면 다시 일정을 잡도록 하죠.”
원래는 정리가 끝나는 대로 그를 가문에서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또 미뤄졌다.
이러다 알도르 경을 내보내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약간 불안한 마음을 삼키며 앞으로 알도르 경이 페르데스에게 가르쳐야 할 과목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귀기울여 듣던 알도르 경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행정과 정치 같은 것도 가르치시는 겁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도르 경이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물었다.
“황자 전하께 정말로 레오폴드 공작령과 공작가를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그를 공작으로 만들거냐고 돌려 묻는 거였다.
“일단은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 사실을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럴 거예요’라고 단정 짓기엔 나중에 알도르 경이 ‘그때 그러셨잖아요’라고 물어볼까 봐 돌려 표현했다.
그때까지 알도르 경이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러자 알도르 경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백치라고 소문 난 페르데스가 공작이 되는 걸 걱정하는 거겠지.
알도르 경은 그가 진짜 백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대외적인 이미지가 그러니 걱정할 만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알도르 경.”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하고 웃었다.
알도르 경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