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급한 일을 처리한 뒤 푹 자고 나니 머리는 맑아졌지만, 몸은 여전히 피곤했다.
정확히는 찌뿌둥한 거였다. 적당한 운동을 하며 몸을 풀고 싶었다.
예를 들면 검을 휘두른다든가.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나는 마티나 백작에게서 받은 검을 들고 개인 훈련장으로 향했다.
보통 훈련장은 기사단 숙소 근처에 만들었다. 아버지의 개인 훈련장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내 개인 훈련장은 정원 안쪽에 있었다.
내가 검술 훈련을 하는 걸 숨기기 위해 아버지가 일부러 정원에 훈련장을 만든 것이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가까운 곳에 훈련장이 생긴 걸 무척 기뻐했다.
남들은 모르는 비밀 훈련장이 생긴 걸 좋아하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며 쓰게 웃었었다.
나는 왜 그 웃음을 좋아서 웃는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수풀 속에 숨겨 두었던 짚 인형을 꺼내 세운 후, 마티나 백작에게 받은 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마티나 백작이 쓰던 검이라 그런지 손잡이에는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검날은 새것 같았다.
그만큼 백작이 신경 써서 관리했다는 의미였다.
그걸 한 달 넘게 방치했으니, 조금 미안하네.
지금부터라도 관리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다.
예리한 검날에 짚 인형이 우스스 쓰러졌다.
그렇게 짚 인형을 네 개쯤 베었을 때, 정원 입구 방향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가씨?”
알도르 경이었다.
그는 내가 진검을 들고 있는 걸 보고 놀란 듯 멈칫했다가, 우스스 쓰러져 있는 짚 인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을 하고 계셨군요.”
“네. 알도르 경은 여기 어쩐 일이에요?”
“정원에서 검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나길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와 봤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거예요? 대단하다.”
진심으로 감탄하자 알도르 경이 멋쩍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왜 위험하게 진검을 휘두르고 계셨습니까?”
“진검이 목검보다 좀 더 스트레스가 잘 풀려서요. 그래도 대련할 때만큼 잘 풀리진 않지만요.”
조금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알도르 경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저와 대련하시겠습니까?”
“알도르 경이랑요?”
“네. 전에 아가씨께서 푸시크를 멋지게 물리치셨을 때부터 아가씨와 검을 맞대 보고 싶었습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기사의 피 끓는 마음인가.
약간 의외이긴 했다. 두 번째 생에서의 알도르 경은 내가 검을 잘 다룬다는 걸 알면서도 대련 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신청하는 거지?
그땐 내가 부인이고, 지금은 단순히 아가씨라서 그런 건가?
“좋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대련하고 싶었던 터라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대련도 진검으로 하나요?”
* * *
“전하, 아가씨한테 허락받지 않고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돼요?”
“이미 허락받았다니까. 지하실 빼곤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다고.”
“그래도 정원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잖아요. 여긴 따로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따악-
“아얏.”
페르데스는 잭이 따라다니며 계속 시끄럽게 굴자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허락받았다고 몇 번을 말해. 자꾸 시끄럽게 하면 두고 갈 거야.”
그 말에 잭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 좀 조용히 정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겠네.
페르데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정원을 둘러봤다.
황궁의 정원만큼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특히 사람이 진심으로 가꾼 느낌이 나는 게 너무 좋았다.
타앙-
몹시 만족하며 정원 구경을 하던 페르데스는 어디선가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소리죠?”
마찬가지로 타격음을 들은 잭이 물었다.
페르데스는 대답하는 대신 타격음이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녹음이 무성하게 진 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터 같은 장소가 나왔다.
타앙, 탕-
그곳에서 두 남녀가 검을 맞대고 있었다.
바로 아델과 알도르였다.
아델이 검을 다룰 줄 안다는 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페르데스는 검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델의 실력이 수준급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와, 아가씨. 엄청 검을 잘 휘두르시네요.”
그건 잭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델은 두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알도르를 공격했다.
탕, 타앙-
묵직한 타격음이 울릴 때마다 아델의 눈동자가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생동감. 활기.
지금 아델에겐 이 모든 표현이 잘 어울렸다. 그만큼 아델은 행복해 보였다.
그건 알도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술 근육이 굳은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잘 웃지 않던 그의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페르데스는 그런 알도르의 표정이 몹시 거슬렸다.
너무 거슬려서 당장 저 둘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명분이 없기도 했고.
아델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또 왜 저 두 사람을 갈라놓고 싶은지 이해가 안 돼서.
“…….”
페르데스는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 * *
하네스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내가 페르데스와 결혼한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가문의 가신들은 아니었다.
“어쩌자고 그런 분을 선택하신 겁니까, 아가씨.”
“그나마 결혼이 아닌 약혼이라 다행입니다. 결혼하실 땐 부디 심각하게 고려해 주십시오.”
“맞습니다. 아가씨의 배우자가 곧 레오폴드 공작 각하가 되신다는 부분을 깊이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체르노서 때랑 다르구나.
그땐 다들 쌍수 들고 환영했었는데.
“그래도 일단 아가씨의 약혼자가 되셨으니, 그에 맞는 격은 갖추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말을 더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행동이나 상식은 웬만한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페르데스에게 선생을 붙여야 한다고 가신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건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곧 큰 문제에 부딪혔다.
“전하의 상태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 수준의 교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
바로 사람들이 페르데스가 진짜 백치라고 알고 있다는 거였다.
내가 당부한 대로 페르데스는 사람들 앞에서 철저하게 백치 연기를 했다.
물론 상식 테스트도 백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주 엉망으로 봤다.
테스트 결과를 본 하네스는 당연하게도 5세 수준의 교육 과정을 가져왔다.
‘어떡한다.’
이것보다 수준을 높이자니 페르데스가 백치가 아닌 게 들킬까 봐 걱정됐다.
공작저 사람들에게 들키는 건 괜찮았다.
문제는 그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황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준 낮은 교육을 하자니, 앞으로 그에게 부탁할 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입이 무거운 사람한테 그의 교육을 부탁해야겠네.’
페르데스가 백치가 아니라는 걸 알아도 절대 밖으로 누설하지 않을, 믿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세 번째 생에서 믿었던 하녀에게 독살당해 죽었던 만큼 사람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하네스나 알도르 경 정도가 아니면 믿을 수가 없었다.
아, 알도르 경이라면 페르데스의 스승으로 괜찮을 것 같은데.
원래는 영지로 돌아오면 알도르 경을 내보내려고 했지만, 계획을 약간 변경해야 할 것 같았다.
“알도르 경을 불러 줘.”
그 전에 알도르 경의 의사를 물어봐야 하니, 그를 불렀다.
서류를 보며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바, 바빠?”
페르데스였다.
그는 집무실에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바로 백치 가면을 벗었다.
“많이 바쁜가 보네?”
“조금요. 무슨 일이세요?”
“공작령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잖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나는 곁눈질로 탁상용 달력을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일주일이 지났다.
그럼 곧 그곳에서 답장이 오겠지.
부디 긍정적인 대답이 와야 할 텐데.
“공작저 탐색도 끝났겠다, 이제 슬슬 영지 구경을 하고 싶어서.”
“별채까지 다 본 거예요?”
“응. 영애가 절대 가지 말라고 당부한 지하를 빼고 다 봤어.”
레오폴드 공작저에는 본관을 제외하고 7개의 건물이 더 있었다.
정원에 온실까지 더하면 황궁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넓었다.
그런데 그걸 벌써 다 봤다니. 부지런히 돌아다녔나 보네.
“그래요. 내일부터 영지 구경을 할 수 있게 안내인과 호위 기사를 준비해 둘게요.”
“그런 거 없이 혼자 돌아다녀도 되는데.”
“위험할 수도 있으니 안 돼요.”
페르데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구겼지만,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진 않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난 이만 가볼게.”
페르데스가 나가고자 문을 여는데, 밖에 알도르 경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놀란 듯 우두커니 멈춰 섰다.
“왔으면 들어와요.”
내 말에 비로소 알도르 경은 페르데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왔다.
페르데스는 이만 나갈 줄 알았는데 웬걸, 나가지 않고 문을 닫고 다시 돌아왔다.
“나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왠지 내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같이 들으려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말한 적이 없는데?
놀라서 묻자 페르데스가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냥 한번 찔러 본 건데, 정말이었나 보네.”
“촉이 좋으시네요.”
“그러니까 그 지옥 같은 황궁에서 여태 살아남은 거 아니겠어?”
하긴 그건 그렇지.
나는 동감하며 알도르 경을 쳐다봤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얼굴로 페르데스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