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페르데스에게 말한 대로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준비된 마차를 타고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향했다.
출발할 땐, 딱히 설렌다거나 하는 감정이 없었다.
그저 어서 돌아가서 내가 세운 계획들을 실천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언덕 너머로 조그맣게 보이는 레오폴드 공작령이 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쿵쿵 뛰고 설렜다.
오랜 시간 타지에서 고생하다가 정겨운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맞은편에서 내 표정을 본 페르데스가 말했다.
“공작령에 돌아온 게 좋은 모양이지?”
“좋죠. 이곳은 제 고향이자, 제 전부니까요.”
그래. 레오폴드 공작령과 공작가는 나의 전부였다.
그러니 절대 황제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제가 말한 건 전부 숙지하셨나요, 전하?”
나는 새삼 각오를 다지며 페르데스에게 물었다.
“전부 숙지했어.”
“말씀해 보세요.”
“첫 번째, 영애랑 그 호위 기사와 잭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정상인 걸 절대 들키지 말 것. 두 번째…….”
페르데스가 기다렸다는 듯 내가 알려 준 것들을 읊었다.
“……마지막으로 공작저를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지만 지하에는 절대 가지 말 것.”
“네, 맞아요.”
너무 늦게 알려 줘서 시간 내에 전부 숙지하지 못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다 외우고 있었다.
“그것들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꼭 지키셔야 해요.”
“알았어.”
그것 말고도 달리 주의할 점을 알려 주는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공작령에 도착했다.
익숙하면서도 정겨운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창한 날씨만큼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이번엔 저들의 미소를 지켜 줘야 할 텐데.
반드시 그래야겠다는 다짐과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공존하며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울렁이는 속을 애써 진정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산을 등지고 있는 레오폴드 공작저가 보였다.
페르데스도 공작저를 발견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저택이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좋게 봐 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정말 아름다운 저택이야.”
내가 아닌 저택 칭찬이었지만, 마치 내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저 산은 뭐야?”
페르데스가 가리킨 건 공작저 바로 뒤에 있는 산이었다.
“다른 산들은 아직 눈이 덜 녹았는데, 저 산만 눈이 다 녹았네.”
“눈이 녹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쌓이지 않은 거예요. 저 산은 화산이거든요.”
“뭐?”
페르데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화산이 터지면 어쩌려고 공작저를 저기다 만든 거야? 영지민들의 거처도 화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쏟아지는 질문에 되레 내가 더 당황하며 되물었다.
“몰라서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전부 다 차근차근 말씀드릴게요.”
페르데스의 질문에 전부 대답하려면 레오폴드 영지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말할 게 무척 많았다.
그가 이해하는 시간까지 더해서 못해도 하루는 날을 잡아야 했다.
“나중에 꼭 말해 줘야 해.”
“물론이죠.”
대화가 얼추 마무리됐을 무렵, 마차가 멈춰 섰다. 공작저에 도착한 것이다.
밖에서 말을 타고 호위하던 알도르 경이 마차 문을 열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이!”
“아가씨께서 오셨다!”
그 손을 잡고 내리자마자 사용인들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하나같이 날 반겨 주는…… 줄 알았는데, 다들 표정이 왜 저러지?
기쁜 것 같으면서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 오묘했다.
특히 하네스처럼 오랫동안 레오폴드 공작저에서 일한 사람들의 표정이 안 좋았다.
“다들 왜 그러는 거야, 집사?”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아가씨?”
그럼 몰라서 묻지, 알고 있는데 물어볼까 봐?
그런 의미를 담아 쳐다보자 하네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한숨만 내쉬지 말고, 제대로 말해. 왜 그러는데?”
답답한 마음에 대답을 재촉했는데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뒤를 쳐다봤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뒤따라 내린 페르데스였다.
“헤헤.”
백치 가면을 쓴 페르데스는 누가 봐도 조금 모자란 사람처럼 보였다.
나중에 사용인들을 따로 모아 페르데스를 정식으로 소개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여기 대부분 모여 있었으니까.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지금 소개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려는데 하네스가 페르데스 쪽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네스가 페르데스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면 어떡하지?
다른 귀족들처럼 놀리는 게 아닌, 진심으로 날 걱정해서 그런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네스…….”
그래서 말리려는데, 알도르 경이 손을 뻗어 나를 제재했다.
내가 그를 잠시 보는 사이, 하네스는 페르데스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처음 뵙겠습니다, 황자 전하. 저는 레오폴드 공작저의 총괄 집사인 하네스라고 합니다.”
하네스는 페르데스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그 어느 때보다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렇게 황자 전하를 뵙게 돼서 무척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그건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봄날의 햇살이 허리 숙인 사용인들의 위로 화사하게 부서졌다.
* * *
“무시당할 줄 알았어.”
긴 여정 동안 뒤집어쓴 먼지를 말끔하게 씻어 낸 뒤.
다시 만난 페르데스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영애가 보는 동안 착한 척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그들은 진심으로 날 환영하고 있었어.”
찻잔을 바라보는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소중한 아가씨가 반푼이에 백치 황자랑 약혼했다는데, 어떻게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는 거야?”
“……제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이래요.”
나는 페르데스가 오기 전, 이미 하네스에게 이유를 물어봤었다.
그러자 하네스는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 어떤 분이시든 간에 제가 선택한 분이고, 제 약혼자니 진심으로 환영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허어.”
페르데스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심정이 딱 내 심정이었다.
하네스에게서 지독한 잔소리를 들을 걸 각오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이 날 믿고 따르는 만큼, 보답해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첫 번째 생에서도 하네스나 사용인들은 내가 체르노서와 결혼하고 돌아온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체르노서의 말에 공손히 따랐다.
뭐, 그때는 체르노서가 정식으로 레오폴드 공작이 됐기도 했고.
하지만 체르노서는 황제가 아끼는 황자라고 소문이 났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반면 페르데스는 아니었다.
정식으로 공작이 된 것도 아니고, 소문도 안 좋은 황자인데, 나 하나만 믿고 환대한다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기도 했다.
“뭐, 잘됐네.”
그런 내 마음을 알 턱이 없는 페르데스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내심 레오폴드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궁인들처럼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럴 일은 없겠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
내 말이 믿기지 않는지 페르데스는 말없이 날 바라봤다.
“정말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믿으셔도 돼요.”
재차 강조하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로 바라본 게 아니야.”
“그럼……?”
“영애가 힘들 것 같아서.”
내가 힘들다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많다는 거잖아.”
페르데스가 찻잔을 들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참 힘들 것 같아서. 그래서 안타까워서 본 거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라 주니 부인은 참 좋겠습니다.”
페르데스의 말을 들으니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서가 날 비꼬았던 게 떠올랐다.
같은 모습을 보고도 반응이 이렇게 판이하게 다를 수 있구나.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 건가?”
“그게 아니라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멀리 왔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페르데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섰다.
“아까 못 들었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그럼 푹 쉬도록 해.”
페르데스가 떠나고, 나는 차를 좀 더 마시다가 일어섰다.
내가 향한 곳은 침대가 아닌 책상이었다.
페르데스에게 피곤하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으면 바로 잠들 수 있을 만큼 몹시 피곤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가문의 가신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내 허락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기다렸던 서류들도 처리해야 하고.
그리고…….
“편지부터 써야지.”
다른 것도 중요했지만, 지금 내겐 이게 가장 중요했다.
나는 중요한 사람들에게 보낼 때만 쓰는 고급 편지지에 정성 들여 편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