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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38/262)

38화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향하는 기차 여행은 순조로웠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고, 햇살은 따사로울 정도로 쨍쨍하게 내리쬈다.

페르데스는 식사할 때와 잠잘 때를 제외하고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기차 구경을 했다.

오죽하면 잭이 그만 돌아다니라고 만류할 정도였다.

“그렇게 구경할 게 많아요?”

신기해서 묻자 페르데스가 더 신기해하며 내게 물었다.

“당연하지. 영애는 처음 기차를 탔을 때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 안 했어?”

“음, 글쎄요.”

나는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가 대답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나지 않네요.”

“오래됐다고? 처음 기차를 탄 게 몇 살 때인데?”

그건 또 언제였더라. 다행히 이번엔 바로 떠올랐다.

“13살 때 처음 탄 것 같아요.”

“올해 영애가 18살이니까…… 뭐야. 5년밖에 안 됐네.”

이번 생만 계산하면 그렇지.

지난 삶까지 전부 더하면 15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오래전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기차에는 전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막 돌아다니셔도 괜찮지만, 마티나 영지에 도착했을 땐 그러시면 안 돼요.”

그 사실을 말해 줄 수 없으니 유연하게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럴 생각이었던 건지 페르데스가 움찔하며 내게 물었다.

“조금도 구경하면 안 돼?”

“안 됩니다. 어차피 구경하실 시간도 없으실 거예요. 마티나 영지에 내리자마자 바로 마차를 타고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갈 거거든요.”

마티나 영지에서 하루 머무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그러면 마티나 백작에게 너무 민폐일 것 같다.

체르노서에 이어 페르데스까지.

황자를 대접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여 조금 피곤해도 바로 떠나기로 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눈에 띄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찔렸다.

마치 아이가 맛있게 먹고 있던 막대 사탕을 빼앗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대신 레오폴드 공작령은 원하는 만큼 구경하셔도 돼요.”

“……정말?”

“네.”

대신 새로운 사탕을 쥐여 주자 페르데스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맛있는 간식을 받고 좋아하는 강아지 같았다.

페르데스의 머리 위에는 앙증맞은 귀가, 등 뒤에는 커다랗고 털이 북슬북슬한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만큼 페르데스는 귀여웠다.

요즘 잘 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올라 귀여움이 한층 더 돋보였다.

“……영애?”

“아.”

그 귀여움에 홀려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그것도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그의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했을까.

“…….”

황당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거뒀다.

그리고 그 손을 감싸 쥐고, 바닥을 보며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무작정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실수였다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실수였어요.”

그게 맞는 것 같아 내 감정을 솔직하게 그대로 말했다.

“방금 전하께서 보이신 행동이 동생처럼 귀여웠거든요.”

강아지보단 동생 같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테니 순화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네요. 죄송합니다.”

“…….”

마무리로 정중한 사과까지.

나름대로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페르데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기분이 많이 나쁘셨나요?”

조심스럽게 묻자 페르데스가 손을 내저었다.

“응? 아니, 기분이 나빴던 게 아니라 조금 놀라서 그래.”

페르데스가 내가 쓰다듬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반푼이에 백치이긴 해도 황자는 황자였다.

궁인들이 감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그가 가족처럼 생각하는 잭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는 가능했지만, 황제가 그런 다정한 손길을 건네는 건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바라는 게 더 나을 정도로 가능성 없는 일이었고.

그의 친모에게는 페르데스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는 바람에 바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살기 위해 백치인 척 연기해야 했지.

“…….”

그의 불운한 출생과 성장 과정을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치고 올라왔다.

나 역시 황제 때문에 무던히 고생했던 터라 동질감도 짙게 느껴졌다.

아까와 다른 의미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일어섰다.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잠시 나갔다가 올게요.”

진짜 볼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여기 더 있다간 또 실수할 것 같아 나는 내 할 말만 하고 빠르게 객실을 나왔다.

* * *

아델이 나가고 혼자 남은 페르데스는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기차에서 급한 볼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화장실이 급한 거라면 객실에 딸린 화장실을 가면 되지, 나갈 이유는 없었다.

그럼 역시 여기 있기 불편해서 급하게 자리를 피한 건가.

‘뭐 때문에 불편해진 거지?’

머리를 쓰다듬은 건 괜찮다고 말했으니,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페르데스는 문득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쳐다봤다.

머리가 여전히 정신없이 헝클어져 있었다.

페르데스는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빗어 정리하다가 그녀가 쓰다듬은 부위에서 멈칫했다.

아델에겐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사람이 그녀가 처음이라고 말했지만, 아니었다.

체르노서와 찰스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이러니까 개 새끼 같네. 나뭇가지 던지면 물어 오려나.”

“…….”

물론 좋은 의미로 쓰다듬은 건 아니었다.

굉장히 기분 나쁘고, 짜증 나는 손길이었다.

페르데스는 진짜 개새끼처럼 그 손을 콱 물어 버리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아야 했다.

이복형제들에게서 수모를 몇 번이나 당했다 보니 페르데스는 누가 자신의 머리를 건드리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그건 잭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잭이 머리가 덥수룩하게 자랐을 때, 잘라 준다고 해도 질색하며 거절했었다.

약혼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잘라야 했을 때는 이를 악물고 참았었고.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쓰다듬어 주는 건 싫지 않았던 걸까.

그녀의 손길엔 악의 같은 게 묻어 있지 않아서?

그런 거라면 잭도 마찬가지일 텐데, 왜 잭이 만지는 건 불쾌했던 거지?

“……모르겠네.”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만 더 깊어지니 페르데스는 기껏 정리한 머리를 도로 박박 긁으며 헝클어뜨렸다.

* * *

목적지 같은 건 정해 두지 않고, 그저 이상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알도르 경이 그런 내 뒤를 묵묵히 따라왔다.

마치 귀신처럼 발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따라오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잊었다.

“……!”

그러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알도르 경이 있는 걸 확인하고 흠칫 놀랐다.

세 번 정도 그러니 알도르 경이 황당하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절 보고 왜 그리 놀라십니까?”

“알도르 경이 너무 조용하게 따라와서 순간순간 따라온다는 걸 잊어서 그래요.”

“그럼 이제부터 발소리를 낼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고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는 것도 기사의 덕목이었으니까.

그러나 내 말이 신경 쓰였는지 알도르 경은 아까보다 좀 더 발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기분은 나아졌지만, 객실로 돌아가기엔 조금 그런 감이 있었다.

정확히는 아직 페르데스의 얼굴을 보기 민망한 거였다.

그래서 나는 2층의 라운지 바로 올라갔다.

일등석 고객만 여길 이용할 수 있는데, 지금 일등석은 전부 내 일행이 쓰고 있으니, 라운지 바를 독점해서 쓸 수 있었다.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바텐더에게 칵테일을 부탁했다.

“알도르 경도 마실래요?”

“아니요.”

“내 호위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괜찮아요.”

“저도 괜찮습니다.”

“무알코올 칵테일도 있는데.”

“괜찮습니다.”

하여간 고지식하긴.

나는 바텐더가 가져온 칵테일을 홀짝거리면 창밖을 내다봤다.

꽃이 핀 들판과 그 뒤로 우뚝 솟은 산의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내겐 이렇다 할 감흥을 주지 못했다.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서 풍경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페르데스를 손에 얻는 등 지금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지만, 그래서 불안했다.

폭풍이 불어닥치는 전날 밤처럼, 이 뒤에 아주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음이 불안한 만큼 술이 당겼다.

칵테일을 한 잔 더 마시려는데, 알도르 경이 만류했다.

“그만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가씨.”

“고작 한 잔 마셨는데?”

“방금 드신 칵테일의 도수가 높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리고 아가씨의 얼굴도 약간 붉고요.”

그 말에 나는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새 술기운이 올라온 뺨이 약간 뜨거웠다.

“정신은 멀쩡한데.”

“술에 취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말은 내가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인다는 건가요?”

알도르 경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그런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술을 못 마시게 됐으니 이만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아.”

순간 발목이 꺾이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뒤에서 알도르 경이 바로 잡아 준 덕분에 꼴사납게 넘어지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나는 알도르 경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똑바로 섰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알도르 경의 표정이 약간 이상했다.

그는 생각이 많은 얼굴로 방금까지 내 팔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뭐가 묻은 건가?

그건 아닌데.

“왜 그래요, 알도르 경?”

의아해서 물어보자 알도르 경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만 객실로 돌아가시죠,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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