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약혼식을 치르고,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나는 황제에게 이만 레오폴드 영지로 돌아가겠다고 보고했다.
당연히 황제는 섭섭해하며 좀 더 머물기를 바랐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버지의 추모식을 다 치르지 못한 데다가, 갑작스러운 영주의 부재로 혼란스러워진 영지도 정리해야 합니다. 하니 이만 돌아가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이유를 대며 영지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황제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나는 황제의 허락을 받자마자 가장 빠른 기차표를 끊었다.
오늘 저녁, 수도를 출발해서 마티나 영지로 가는 기차였다.
페르데스에게는 저녁에 황궁을 벗어나 레오폴드 영지로 갈 테니, 잭과 함께 짐을 챙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잭은 데리고 가지 않을 거야.”
“그 말은 그 남자를 황궁에 남기고 가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게 아니라 같이 황궁은 나가지만, 레오폴드 영지까진 데리고 가지 않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날 돌보느라 고생한 그한테 자유를 주고 싶거든.”
“그렇군요.”
당연히 데리고 갈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
어쩌면 사지가 될지도 모르는 장소에 소중한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이유로 알도르 경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그 남자에게 그동안 전하를 잘 보살펴 준 보답으로 선물을 해야겠네요.”
페르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잭한테 선물을 해 줄 건가?”
“그러면 안 되나요?”
“그럴 리가!”
페르데스가 두 손을 격하게 저으며 부정했다.
입술 끝자락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며 환한 미소를 그렸다.
“정말 고마워서 그래. 생각지도 못한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고마우면 앞으로 더 열심히 제 일을 도와주세요.”
별것 아닌 일에 그가 너무 진지하게 나오는 게 부담스러워 농담 삼아 말을 던졌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럴게. 앞으로 뭐든 시켜만 줘.”
흐음, 생각한 것보다 반응이 더 격하네.
그만큼 잭이 페르데스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잭을 이대로 보내 줄 수 없었다.
혹여 페르데스가 허튼 마음을 먹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잭을 계속 데리고 있어야 했다.
페르데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긴 했지만, 그를 온전하게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제어할 안전장치가 필요했고, 난 그 안전장치로 잭을 선택했다.
페르데스를 보내자마자 잭을 불렀다.
“받아.”
대놓고 ‘떠나지 마라’라고 말하면 내 쿰쿰한 속내가 들킬 테니, 일단 선물부터 내밀었다.
“그동안 전하를 잘 보필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야.”
상자 안에 든 브로치를 본 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상자를 다시 덮고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렇게 비싼 건 받을 수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받아.”
“저야말로 괜찮습니다. 황자 전하를 모신 건 보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순수한 제 의지였으니, 부디 거둬 주십시오.”
이거 참, 보통은 이렇게 말하면 못 이긴 척 받던데 잭은 끝까지 거절했다.
그만큼 욕심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지난 16년 동안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반푼이 황자의 곁을 지킨 거겠지.
“그럼 달리 필요한 게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
“아무거나 말해 봐. 전하의 곁을 떠나서 혼자 정착하려면 돈이든 집이든 뭔가 필요할 테니까.”
“네?”
잭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설마……?
“처음 듣는 이야기야?”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대답이 사실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페르데스가 잭과 먼저 상의한 뒤, 나한테 말한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안. 전하께서 이미 너한테 말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전하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말 그대로야. 황자 전하께서 널 수도에 두고 갈 테니, 챙겨 달라고 부탁했거든.”
“아.”
잭이 탄식하며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는 페르데스를 떠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말인즉, 그를 붙잡기 쉬워진다는 의미였다.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도 겉으론 몹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전하께선 내 약혼자이자 차기 공작이니 레오폴드 공작령에 가도 대접을 받겠지만, 그래도 처음 가는 낯선 땅이니 익숙한 사람이 옆에서 보좌해 주길 바라는데…… 네 생각은 어때?”
“저는…….”
잭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제 생각도 아가씨와 똑같습니다.”
“어머, 그래?”
“네. 그러니 더욱 제게 보답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전하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거든요.”
“하지만 전하께선 널 두고 가신다고 하셨는걸.”
그래서 기차표도 3장만 끊었다고 말을 덧붙이자 그가 벌떡 일어섰다.
“지금 당장 전하께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가씨.”
“그래. 기다릴게.”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잭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재빨리 나갔다.
순둥순둥한 외모와 달리 성격이 급한 편이네.
그 덕분에 한시름 덜게 된 나는 알도르 경에게 기차표를 한 장 더 예매해 달라고 부탁했다.
* * *
잭에게 그냥 떠나라고 말하면 분명 싫다고 할 텐데, 어떻게 말해야 하나.
일단 기차표를 세 장만 예매했다고 했으니, 기차표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남으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또 어떤 핑계를 대면 좋을까.
“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머릿속으로 잭을 떼어 놓을 핑곗거리를 고민하던 차였다.
페르데스는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온 잭이 던진 말에 당황하며 그를 쳐다봤다.
잭은 그런 페르데스의 팔을 꼭 부여잡고 재차 말했다.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전하랑 같이 레오폴드 공작가에 갈 생각이니, 절 떼어 놓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마세요!”
“……너, 그 이야기 어디서 들었어?”
페르데스는 당황하며 잭에게 물었지만, 스스로 대답을 찾아냈다.
아델 레오폴드. 그 여자가 말해 준 게 틀림없었다.
이 이야기를 아는 건 그녀와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아가씨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역시 그 여자가 다 말했구나.
“전하께서 절 이곳에 두고 가기로 했으니, 그동안 전하를 보살펴 준 보답이라며 비싸 보이는 브로치를 주셨다고요!”
그냥 말한 건 아니고 보답을 해 주려다 그런 거였군.
그의 아델을 향한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애초에 아델에게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하지 않은 제 잘못이었다.
“전 물론 안 받았지만요!”
“받지 그랬어. 그동안 고생한 대가인데.”
“그런 대가 필요 없어요! 전 전하의 곁에 있을 거니까요!”
페르데스의 팔을 잡은 잭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절 버리지 마세요, 전하!”
버리는 게 아니라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두고 가겠다는 건데.
페르데스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입 안에 굴렸다가 삼켰다.
그걸 말하려면 아델과 계약한 것도 말해야 하니, 말할 수가 없었다.
잭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아델과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는 도저히 잭을 설득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았어. 같이 가자.”
내심 잭이 함께 가 줬으면 하는 이기심을 품고 있었던 터라 페르데스는 못 이긴 척, 잭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 * *
내가 황궁에 들어갔을 땐, 거리에 겨울과 봄의 기운이 공존했었다.
그러나 황궁을 나올 땐 봄의 기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큼 황궁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는 의미였고, 복수할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공작령으로 돌아가면 바로 그곳에 편지를 보내야지.
답장이 올 동안 가주들에게 적절하게 일을 분배하고, 페르데스도 공작가의 일에 적응시켜야 했다.
과연 그가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문득 걱정돼서 맞은편에 앉은 그를 쳐다봤다.
페르데스의 시선은 황궁을 나온 순간부터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생 황궁에 갇혀 살았으니, 바깥세상이 신기한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페르데스를 보니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나는 옅게 웃으며 페르데스에게 물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전하?”
“좋아.”
페르데스가 꾸밈없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대답했다.
“황궁 밖은 어떤 세상일지 항상 궁금했거든. 그 세상에서 사는 걸 꿈꾸기도 했고.”
페르데스가 반짝이는 눈동자 그대로 날 돌아봤다.
“그런데 이렇게 날 데리고 나와줘서 고마워, 영애.”
좋은 마음으로 그를 황궁에서 데리고 나온 게 아니었다.
음험한 내 복수에 이용하려고 그런 건데, 저런 말을 들으니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보기 창피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법도 한데, 난생처음 보는 바깥세상에 푹 빠진 페르데스는 다행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기차역에 도착했다.
“우와.”
웅장한 기차역을 본 페르데스는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끊임없이 반짝이던 눈동자는 기차에 올라탔을 때 정점을 찍었다.
페르데스는 황홀한 얼굴로 기차 벽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마나로 움직이는 기차란 말이지.”
“기차에 관심이 있으세요?”
“기차보다 마나에 관심이 있어.”
페르데스가 기차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한때 마법사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 애석하게도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라 포기했지만.”
마나를 느끼지 못하면 마법사가 되기 힘들긴 하지.
마나를 느끼지 못해도 수식을 연산해서 마법진을 그리거나 마법 공식을 만드는 마법사도 있긴 했다.
그러나 이 역시 그쪽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 전하의 꿈은 뭔가요?”
“자유.”
페르데스가 어두운 거리의 풍경을 담은 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사는 게 내 꿈이야.”
“가장 어려운 걸 바라시네요.”
“그러니까 꿈이지. 그래서 영애는 꿈이 뭐야?”
꿈이라.
깊게 고민할 것도 없이 현재 내 꿈은 단 하나였다.
“복수요.”
“……내가 괜한 걸 물었네.”
페르데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일어섰다.
“기차 구경을 좀 더 하고 와도 될까?”
“상관없지만 일등석 칸 밖으론 나가지 마세요. 다른 칸은 위험하니까요.”
“알았어.”
페르데스가 나가자 객실에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난 시끄러운 것보단 조용한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객실에 흐르는 정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페르데스가 있었을 때의 그 소란스러움이 그리워지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