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서랍 안에는 머리핀, 브로치 등 여러 가지 액세서리가 들어 있었다.
그중 큼지막한 브로치를 집어 들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여전히 슬립 차림에 적응하지 못한 페르데스가 흘끗, 곁눈질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건 왜 가지고 온 거야?”
“쓸 곳이 있으니 가져왔죠.”
“어디에 쓰려고?”
나는 대답하는 대신 브로치의 날카로운 핀 부분으로 손끝을 푹 찔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걸 본 페르데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 양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다소 흉포한 그의 행동에 들고 있던 브로치가 날아갔다.
그와 함께 그 끝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포물선을 그리며 새하얀 이불 위에 떨어졌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 모양새가 체르노서가 말하는 ‘그것’과 비슷했다.
여기서 피가 더 묻는다면, ‘그것’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 피가 흐르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힘을 주었더니 상처 부위가 아렸다. 피가 좀 더 많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
“지혈해야 하니 손 좀 놔주실래요?”
“지혈할 거면서 왜 찔렀어?”
“이것 때문에요.”
내가 턱 끝으로 이불 위에 묻은 피를 가리키며 대답하자,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역시 어리다니까. 나는 설핏 웃으며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흔히 순결한 여자가 첫날밤을 보내고 나면, 이불에 피가 묻어 있다고 하죠.”
아예 모르는 이야기는 아닌지 페르데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부 이해한 모양이다.
“이해됐으면 이만 손을 놔주겠어요? 지혈해야 하거든요.”
거듭된 요청에도 페르데스는 말없이 다친 내 손가락을 바라봤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피는 손바닥 안쪽에 고였다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불에 떨어지면 안 되는데. 손을 좀 더 말아 쥐려는데, 페르데스가 엄지를 말아 쥔 손 틈 사이에 집어넣었다.
“전하?”
“내가 지혈해 줄게.”
“네?”
“휴지 같은 곳에 닦으면 흔적이 남잖아.”
그거야 그렇지. 나 역시 피가 묻은 휴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니까 내가 지혈해 줄게.”
“뭘 어떻게……!”
그는 말을 마친 후 피가 흐르는 검지를 그의 입에 집어넣었다.
“전하!”
나는 깜짝 놀라며 손가락을 빼려고 했지만, 페르데스가 손가락을 꼭 붙잡고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놔 주세요!”
당황하며 비교적 자유로운 손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페르데스는 상처뿐만 아니라 손바닥 안쪽에 고여 흐른 피까지 전부 핥아 말끔하게 지운 후에야 떨어졌다.
쿰쿰하고 야릇한 속내는 전혀 없는, 정말로 피를 없애기 위해 한 짓이라고 해도 이건 도가 지나친 행동이었다.
“다음부턴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마세요.”
내가 엄하게 경고하자 페르데스가 입술 끝에 남은 피를 혀로 핥으며 대답했다.
“영애도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나도 그러겠다고 약속하지.”
“전 쓸데없는 짓을 한 게 아닙니다. 다 필요해서 한 거예요.”
“그럼 차라리 내 손을 찔러.”
“어떻게 제가 황자 전하의 손을 찌르나요?”
“그럼 나한테 찌르라고 해.”
“그 뜻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인데.”
이대로는 이상한 대화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분명하게 말했다.
“만약 전하께서 피를 보셨다면, 전 죄책감에 시달리며 전하를 걱정했을 겁니다.”
나 때문에 또 괜한 사람이 다쳤다는 죄책감.
가벼운 상처일지라도 누군가 나 때문에 다치는 건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다칠 일이 필요하다면, 제가 다치는 게 맞습니다.”
“……그럼 영애는?”
“네?”
“내가 영애를 걱정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생각하지 않아?”
어라,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인지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자 전하, 아가씨. 이만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소피아였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그새 백치 황자 가면을 쓴 페르데스가 실없이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오묘하게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가 ‘이렇게 하면 되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천연덕스러운 그의 표정과 태도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 이상한 실랑이를 했던 게 싹 잊혔다.
그가 이렇게 잘해 주는데, 내가 실수하면 안 되지.
나는 막 자고 일어난 것치고 지나치게 단정한 머리와 슬립 끝을 살짝 헝클어뜨리며 대답했다.
“들어와요.”
* * *
“그래, 첫날밤을 확실히 보냈단 말이지.”
보고를 받은 다이몬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내심 백치인 페르데스가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황태자를 시켜 미약까지 먹였는데 실패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한 번만으론 아이가 생기기 힘들겠지?”
다이몬의 질문에 시종장이 대답했다.
“아이가 생기는 건 하늘이 정해 주는 일인지라 뭐라 대답을 드리기 힘들지만, 한 번으로는 확실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생길 때까지 여러 번 하게 만들어야지.”
다이몬은 시종장에게 페르데스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페르데스가 쭈뼛거리며 등장했다. 행색은 말끔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멍청했다.
‘저런 놈이 내 아들이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페르데스가 황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를 황자로 인정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황실을 욕 먹이는 이런 옥의 티는 없는 게 나았으니까.
그래서 황자로 인정한 뒤, 죽일 생각도 했지만, 방치하면 알아서 죽을 테니 괜히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여태 살아 있다니.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다이몬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론 인자하게 웃으며 페르데스를 칭찬했다.
“제 역할을 훌륭하게 했더구나. 잘했다.”
다이몬의 칭찬이 기쁜지 페르데스가 뺨을 수줍게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대답은 고갯짓으로만 해도 된다.”
멍청하게 말을 더듬는 걸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같은 의미로 멍청한 그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지 않아 다이몬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에 내가 당부한 걸 기억하고 있겠지?”
“네, 네!”
“대답은 고갯짓만 하라고 했을 텐데.”
다이몬이 인상을 팍 쓰며 지적하자, 페르데스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이몬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말귀를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드는 거였다.
누군가 이런 짓을 하면 다이몬은 상대가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몹시 화를 냈었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이러는 건 약간 짜증만 날 뿐, 화가 나진 않았다.
애초에 백치인 그가 자신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들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묻겠다. 전에 내가 당부한 걸 기억하고 있겠지?”
페르데스는 이번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라고 말했었지?”
“…….”
다이몬이 일부러 함정을 팠는데도 페르데스는 말하지 않았다.
말은 더듬어도 격식을 갖춘 인사는 제대로 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그는 알려진 것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다이몬이 원하는 걸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은 됐다.
그래, 이 정도 지능만 있으면 됐지.
지금 든 생각이지만 이 임무에는 체르노서처럼 어중간하게 멍청하면서 자존심만 센 놈보단 페르데스에게 맡기는 게 나았다.
다이몬은 흡족하게 웃으며 서랍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병에는 정체불명의 붉은 약이 들어 있었다.
다이몬은 약병을 페르데스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기를 쉽게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약이다. 레오폴드 영애랑 잠자리를 가지기 전에 이 약을 챙겨 먹어라.”
* * *
페르데스는 황제에게 받은 정체불명의 약을 내게 보여 주며 물었다.
“황제가 아기를 쉽게 가질 수 있는 약이라고 하던데, 미약인가? 아니면 내가 전에 먹었던 환각제?”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약인지라, 한번 알아볼게요.”
나는 알도르 경에게 약의 정체를 몰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약 반나절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돌아온 알도르 경이 보고했다.
“미약이나 환각 성분은 없고, 단순히 아기가 잘 들어서는 약이라고 합니다.”
“보통 그런 건 여자가 먹지 않나요?”
“남자가 먹는 약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처음 안 사실이었다.
“도대체 황제는 아이한테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페르데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히 레오폴드 공작가를 집어삼킬 목적이라면, 황자 중 한 명이 공작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글쎄요. 저도 참 궁금하네요.”
레오폴드 공작가 말고 달리 원하는 게 있다면 던져 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황제의 속내가 궁금해서 생을 거듭할 때마다 그걸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매번 헛수고였다. 내가 알아낸 건 황제가 집요하게 레오폴드 공작의 자리에 집착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점을 생각해 봤을 때, 황제가 원하는 것 중 하나가 레오폴드 공작의 자리인 건 확실했다.
‘혹시 정당성을 원하는 건가?’
그래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도 딱히 특별한 건 없을 텐데.
“…….”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페르데스가 턱을 괴고 뚫어지게 날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영애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게 신기해서.”
“네?”
“지금까지 내가 물어보면 척척 대답했는데, 처음으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잖아.”
아, 그랬었나?
“그게 신기해서 바라본 거야. 영애도 모르는 게 있구나.”
“저도 사람이니 모르는 것이 있는 게 당연하죠.”
“그렇지, 사람이지.”
페르데스는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면서도 계속 날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이 대화를 끊고 싶어 약병을 그 쪽으로 밀었다.
“이 약은 황제가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드세요.”
“뭐?”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네. 이런 분류의 약은 그런 능력 말고 체력을 보강해 주는 보약 효과도 있으니,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냥 보약을 먹고 말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페르데스는 툴툴거리면서도 약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