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진짜 자네.”
아무리 믿을 수 있다고 해도, 너무 태평한 거 아니야?
나도 남자인데.
페르데스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곤히 잠든 아델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녀는 태연한데 저 혼자 신경 쓰는 게 몹시 억울하게 느껴졌다.
‘나도 신경 쓰지 말자.’
페르데스는 그리 생각하며 털썩 누웠다.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약혼식이며, 피로연이며 하루 종일 시달리느라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피곤한데, 정신은 또렷했다.
‘약 때문인가?’
아니면 해독제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까 저 여자가 터무니없이 저지른 일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
아델을 등진 채 누워 있던 페르데스는 슬며시 고개만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흔히 아기는 자는 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던데, 그 말은 아델에게도 적용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델이 자는 모습은 천사처럼 예뻤다.
‘붉은 머리 천사라.’
문득 아델이 순백의 옷을 입고 천사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 페르데스는 픽 웃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잘 어울려서 신기했다.
더 신기한 건 그녀 자체였다.
페르데스는 아델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지체 높은 공작 가문의 영애이니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고이 보호받고 자랐을 텐데, 아델은 온갖 풍랑을 다 겪은 들판의 잡초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힘들어 보였지만, 보호해 주고 싶은 느낌은 들지 않으니 아이러니했다.
신기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페르데스를 본 사람들은 그를 체르노서처럼 경멸하거나 황태자처럼 무시하기 일쑤였다.
가끔 체르노서나 5황자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내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선뜻 나서서 도와주려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아델은 손을 내밀었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초라한 페르데스의 행색을 보고도, 그가 소문의 4황자라는 걸 알고 난 뒤에도 계속 존댓말을 썼었다.
“진짜 신기한 여자야.”
어느덧 아델 쪽으로 완전히 돌아누운 페르데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같은 침대에 누워 마주 보는 이도 아델이 처음이었다.
제게 무언가를 같이하자고 손을 내민 사람도, 믿어 준다고 말해 준 사람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손바닥 안쪽을 깃털로 간지럽히는 것 같은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이 기분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와 이러고 있는 게 싫지는 않다는 거였다.
그게 참 이상했다.
* * *
잠에서 깨자마자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오전 6시.
피로에 절어서 기절하듯 곯아떨어졌지만, 그간 습관이 어디 가지 않는지 이 시간만 되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보통 아침 식사는 8시 전후에 하니, 한 시간 정도 뒤에 하녀들이 오겠네.
시중을 핑계로, 우리가 첫날밤을 보냈는지 확인하러 말이지.
그들이 보고 들은 건 전부 황제에게 전해질 테니 적당한 연출과 연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
그러려면 페르데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그를 깨우려다, 침대 끝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새우잠을 자는 그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건 마치 내가 구석에 가서 자라고 몰아세운 것 같잖아.
하지도 않은 일에 죄책감이 드는 건 그만큼 페르데스가 불쌍하게 자고 있기 때문이다. 차마 깨우기 미안할 정도였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자게 두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전하.”
어쩔 수 없이 그의 어깨를 잡으려는 그때.
“……!”
사냥감을 낚아채는 매처럼 그의 손이 내 손목을 강하게 휘어잡았다.
졸음과 살기가 뒤엉킨 황금색 눈동자가 내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그 시선은 맹수처럼 사납고 살벌했지만, 이보다 더한 일을 겪어 온 내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전하.”
나는 조금도 떨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그러자 내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억세게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조금씩 풀렸다.
페르데스가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눈동자에 서려 있던 졸음과 살기가 완전히 달아났다.
“정신이 드셨으면 제 손을 놓아주시겠어요?”
“…….”
나는 페르데스가 놓아준 손목을 확인했다. 새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킨 페르데스도 손자국이 남은 내 손목을 보고 사과했다.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알고 있어요.”
누가 봐도 고의로 그런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건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다 보니 나온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전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응.”
대답과 달리 페르데스는 여전히 시무룩해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마치 풀이 죽은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아 귀여웠다.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든다고나 할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손을 마주 잡는 걸로 충동을 억누르며 말하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들었다.
“해야 할 일? 뭔데?”
“우리가 어제 첫날밤을 보낸 것처럼 위장해야 해요.”
“……?!”
한 박자 늦게 내 말을 이해한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큼 커졌다.
“지금…… 첫날밤이라고 했어?”
“네.”
“내가 아는 그 첫날밤, 맞아?”
“결혼한 남녀가 처음으로 보내는 밤을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내가 아는 사전적인 의미를 그대로 말해 줬더니 페르데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상한 상상 하지 마세요.”
지적하자 페르데스가 움찔하며 소리쳤다.
“이상한 상상 같은 거 안 했어!”
“그런 표정으로 말씀하시면 신빙성이 전혀 없는 거 아시죠?”
“내 표정이 뭐 어때서?”
“거울을 가져다드릴까요?”
원한다면 진짜 그럴 생각으로 침대 밖에 발을 내밀자 페르데스가 내 손목을 잡았다.
우연인지, 처음 세게 잡았던 그 손목은 아니었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사과까지 받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알겠으니까 놓아주세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첫날밤을 보낸 것처럼 위장해야 해서 할 일이 무척 많아요.”
“왜 그렇게 위장해야 하는데?”
페르데스가 내 손목을 놓아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약혼했지, 결혼을 한 건 아니잖아. 게다가 난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았다고. 그런데 영애랑 첫날밤을 치른 게 더 이상하지 않아?”
“황제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전하와 저를 방에 밀어 넣지 않았을 겁니다. 전하께 이상한 약까지 먹이고 말이죠.”
내 말의 뜻을 바로 이해했는지 페르데스의 얼굴이 와장창 구겨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친 놈이었네.”
황제를 지칭하는 아주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약혼식 전날, 황제가 날 불렀었어.”
“알고 있어요.”
체르노서가 깽판을 치고 간 후, 페르데스와 직접 만나지 않았을 뿐 알도르 경을 통해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페르데스가 무얼 먹는지, 어떤 교육을 받는지, 누굴 만났는지 전부 보고받았다.
“황제가 그러더라. 어떻게서든 레오폴드 공작가의 피와 황가의 피가 이어진 아이를 만들라고.”
“그랬군요.”
“놀라지 않네.”
페르데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예리한 눈으로 날 주시했다.
“이것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의 눈매가 더 얇게 접혔다.
“이건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지?”
“제가 말했더라면 전하께선 황제의 말을 듣고 그렇게 놀라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놀란 척 연기할 수도 있지만, 순간의 감정은 연기로도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때 황제한테 간파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일부러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페르데스는 아직 성인이 아니니 아이를 낳는 걸 강요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시곗바늘은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으니, 어서 준비해 주세요.”
“…….”
그는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침대 밖으로 나왔다.
“뭘 어떻게 준비하면 되지?”
“일단 옷부터 벗어야겠죠.”
“……!”
겨우 수습했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지금까지 어떻게 백치 연기를 하고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의 얼굴에 감정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역시 연기 실력이 뛰어나도 순간 감정은 잘 못 숨기는구나.
그에게 그 이야기를 미리 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께서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벗는 건 저 혼자니까요. 그리고 전부 다 벗을 생각은 없어요.”
큰일을 치르고 이제 막 옷을 입은 사람처럼 흐트러진 상태로 있을 생각이었다.
아, 그전에 침대부터 어떻게 해야지.
나는 침대보를 잔뜩 흩뜨리고, 베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다.
겉옷 안에는 슬립 형태의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걸 본 페르데스는 귀까지 붉히며 고개를 휙 돌렸다.
다 벗은 것도 아니고, 옷이 얇아서 안이 비치는 것도 아닌데 뭘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건지.
역시 애는 애였다. 나는 웃음을 흘리며 마무리 작업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첫날밤의 풍경을 떠올리며 이래저래 연출했는데, 부족했다.
이대로는 숙련된 하녀들의 눈을 절대 속일 수 없었다.
여기서 뭘 더 하면 좋으려나.
키스 마크?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만 아무리 연출이라고 해도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그에게 키스 마크를 새겨 달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좋은 방법이 뭐가 있으려나.
고민하던 나는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서가 했던 막말을 떠올렸다.
“처음 관계를 하면 피가 나온다고 하던데……. 영애는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처음이 아닌가 봅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무례한 발언이었다.
그때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게 그저 분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도움이 되네. 개똥도 다 쓸 곳이 있다던 오래된 명언이 문득 떠올라 나는 쓰게 웃으며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