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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262)

34화

“자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하도 안 움직이길래 그대로 잠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페르데스는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고 몸을 웅크렸다.

“전하?”

“…….”

“혹시 어디 아프세요?”

그래서 저러는 걸까?

그러고 보니 아까 잘못했다고 말한 것 같은데.

갑자기 뭘 잘못했다는 거지?

“전하.”

페르데스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아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침대에 올라가 그의 어깨를 만지려는 그때.

휘익, 쿵-

페르데스가 벌떡 일어서더니 날 침대에 눕히고, 내 위에 올라탔다.

“죽어. 죽어야 해.”

그리고 독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내 목을 졸랐다.

비루한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놀랄 정도로 그의 악력은 셌다.

게다가 페르데스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릿했다.

황금색 눈동자는 날 담고 있지만, 그의 머리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죽어, 죽어야 해.”

“전……하.”

“죽으란 말이야.”

아무래도 내 목소리가 전혀 닿지 않는 모양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무례를 용서하세요, 전하.

나는 속으로 짤막한 사과를 하며 오래전, 올벤 경에게 배운 급소를 찔러 페르데스를 제압했다.

“컥.”

그는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급소를 당해 그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나는 빠르게 페르데스의 상태를 살폈다.

여전히 동공은 풀려 있었고, 아까 그가 이상 반응을 보였던 것 등 이것저것 생각해 보면 그는 환각 종류의 약을 먹은 것 같았다.

그런 짓을 한 사람은 아마 황제겠지.

첫 번째 생과 달리 황제는 타깃을 내가 아닌 페르데스를 삼은 모양이다.

아니면 둘 다 타겟으로 삼았거나.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만큼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선 이 일을 공론화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황제의 머리카락 한 올도 뜯을 수 없었다.

황제가 페르데스에게 약을 먹였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까.

오히려 내가 먹인 게 아니냐고 누명을 쓸 수도 있었다.

“아, 아.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때리지 마세요…….”

그새 정신을 차린 페르데스가 몸을 둥글게 만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를 구해줘야 하는데, 어떻게 구해주면 좋지?

입안에 해독제를 머금고 있긴 하지만, 다른 종류의 해독제라서 지금 페르데스의 상황도 해결해 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제발, 제발…….”

그래도 일단 먹여볼까.

내가 멀쩡한 걸 봐서 이 해독제가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 페르데스를 방치하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 그러기로 했다.

어금니 안쪽에 넣어둔 해독제는 녹아 흐물흐물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괜히 손가락으로 건드렸다가 완전히 부서지면 큰일이니, 혀로 조심스럽게 끌어냈다.

그리고 벌어진 그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갠 뒤, 녹은 해독제를 그의 입 안에 밀어 넣고 떨어졌다.

정신이 없는 페르데스는 착하게도 내가 먹여주는 대로 꼴깍, 잘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너울거리고, 입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걸 확인한 나는 해독제가 돌기를 바라며 일단 페르데스에게서 최대한 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리길 기다렸다.

페르데스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발발 떨며 한참동안 중얼거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잠이 든 건가?

확인하고자 조심스럽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페르데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여긴……어디?”

미어캣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눈물 젖은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곧 내게 닿는 눈동자에 초점이 또렷했다.

“영애?”

게다가 날 알아보는 걸 보니 다행히 해독제가 든 모양이다.

“정신이 드세요?”

“정신이 드냐니. 그건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죠. 방금까지 전하께선 제정신이 아니셨거든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천천히 깜빡이던 페르데스는.

“……!”

이내 뭔가를 떠올렸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한계까지 확장된 눈동자에 경악이 물들었다.

“나, 나한테 입을……!”

왜 하필 거기만 떠올리는 건데.

일이 조금 귀찮게 돌아가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했다.

“해독제를 먹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

“마침 제가 해독제를 입 안에 숨기고 있었거든요. 그걸…….”

“……그 말은 황제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할 거라는 걸 영애는 알고 있었다는 거네?”

페르데스가 내 말을 자르며 물었다. 

외모는 앳된 소년인데, 목소리는 변성기를 한참 지난 성인이니 약간 괴리감이 느껴졌다.

“말해.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알고 있었던 건 아니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겁니다.”

“예상했다고?”

“네. 전 황제가 제게 약을 먹일 거라고 예상하고 해독제를 준비한 거였습니다.”

첫 번째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페르데스가 어려서, 그리고 결혼이 아닌 약혼식이라 반신반의했지만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 알도르 경에게 해독제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런데 설마 전하께 불똥이 튈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하자 페르데스가 손을 내저었다.

“됐어. 영애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오히려 영애는 내게 해독제를…….”

페르데스는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을 확 붉히며 입을 가렸다.

“왜 그러세요, 전하?”

“……영애는 아무렇지 않아?”

뭐가 아무렇지 않냐는 거지?

아, 혹시?

“말하는 거라면 전 안 먹은 것 같고, 미리 해독제도 먹어 둬서 괜찮아요.”

“…….”

“전하께선 드신 건 약이 아닌 것 같고, 해독제도 잘 든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지, 페르데스는 말없이 날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네?”

“아무것도 아니야.”

페르데스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내젓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페르데스가 16년간 백치 연기를 하며 모두를 속였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가 평범하다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더 이상한 것 같았다.

‘아직 약 효과가 다 풀리지 않은 건가?’ 

그렇겠지. 해독제를 먹었다고 해도 바로 해독이 되는 건 아니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은 건드리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옆에 누웠다.

그의 옆이라고 해도 침대가 장정 여러 명이 누워도 될 만큼 커서, 그와 나 사이에는 거리가 제법 있었다.

“……!”

내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페르데스는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까보다 더 커진 눈동자는 상당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무, 뭐야, 왜 여기 누워?”

“그럼 어디 누워요? 침대는 이것 하나뿐인데.”

“…….”

할 말이 없는지 페르데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베개를 집어 들었다.

나는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가는 페르데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어디 가세요?”

“소파에서 자려고.”

“여기 소파 없는데요.”

궁인들의 침실에도 작은 소파가 하나씩은 다 있는데, 이곳에는 없었다.

원래 없던 게 아니라, 나와 페르데스가 한 침대에서 자도록 만들기 위해 황제가 치운 게 틀림없었다.

하여간 이상한 데에서 치밀하다니까.

“…….”.

페르데스는 소파가 없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당황했는지 그대로 굳었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끊임없이 굴러다니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답은 하나뿐인데, 뭘 저렇게 고민하는 건지.

“여기서 주무세요.”

그가 방금까지 누워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페르데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지금 나랑 한 침대에서 같이 자겠다는 건가?”

“싫으세요?”

“이건 싫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어떤 문제가 있는데요?”

“허.”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페르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만 놀려야겠네.

더 놀리면 진짜 화낼 것 같아 두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고 말했다.

“알아요. 남매나 가족도 아니고, 성별이 다른데 저랑 한 침대에서, 한 이불 덮고 자는 게 싫으신 거겠죠.”

“……싫다곤 안 했어.”

“그럼 부담스러운 거로 하죠.”

원하는 대로 말을 바꿔 줬는데도 여전히 불만인지 페르데스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저도 전하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게 부담스러워요. 하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잖아요.”

소파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침대에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만약 전하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쪽을 선택했을 거예요.”

“……무슨 의미지?”

“무슨 의미긴요. 그만큼 전하를 믿고 있다는 의미죠.”

이번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간 사이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주름이 쫙 펴졌다.

그는 꼭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침대 끝에 살포시 앉았다.

이 정도로 풀리다니, 역시 애는 애구나.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와 한 침대에서 자는 게 더 부담이 없기도 했고.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수마가 몰려왔다.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가 나를 잠의 세계로 인도했다.

나는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며 베개에 머리를 댔다. 푹신한 베개를 베니 더욱 잠이 쏟아졌다.

“저 먼저 잘게요.”

“혹시…… 도…… 같이…….”

페르데스가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너무 졸려서 들리지 않았다.

내일 일어나면 잠들기 전에 무슨 말을 했었냐고 물어봐야지.

중요한 이야기면 말해 주겠지.

단순히 생각하며 피곤한 눈 위에 어둠을 씌웠다.

곧 까마득한 수마가 몰려오면서 정신이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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