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결혼식과 달리 약혼식은 절차가 굉장히 간단했다.
남녀가 동시 입장해서 양쪽의 부모님에게 인사하고, 사람들에게 약혼했음을 알리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끝나면 밤이 깊어질 때까지 피로연을 즐겼다.
페르데스는 파티의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혼자 구석에 박혀 파티장을 구경했다.
높은 천장에 매달려 빛을 발하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눈부셨다.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연주가 커다란 파티장을 빈틈없이 채웠다.
파티장의 중심에는 커다란 천사조각상 분수대가 있었고, 그 주변에선 귀족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대부분 백작가 이상의 고위 귀족들이었지만, 그들을 처음 보는 페르데스의 눈에는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던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멈춘 곳은 바로 아델이 있는 방향이었다.
혼자 있는 페르데스와 달리 아델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귀족들도 화려하게 꾸몄지만, 아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특히 그녀가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도, 옷도 붉다니.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스타일을 아델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다. 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녀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라서…….”
“어머나…….”
그가 있는 곳에선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아델의 표정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령 아델의 왼쪽 눈썹이 올라간다는 건, 대화가 상당히 재미없다는 의미였다.
입꼬리가 살짝 흔들리는 건 짜증 난다는 의미였고.
페르데스가 지켜보는 동안 아델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다.
‘저 여자도 나랑 똑같네.’
똑같이 거짓된 웃음 가면을 쓰고, 가식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페르데스는 고귀한 공작가의 영애인 아델과 비천한 반푼이인 자신이 똑같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아델을 빤히 쳐다봤다.
“페르데스.”
그러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자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황태자가 서 있었다.
황자 전하, 가 아니라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황족일 거라곤 예상했지만, 상대가 황태자인 건 조금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것이 페르데스는 황태자와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아무리 황궁이 넓다고 해도 16년 넘게 같은 황궁에서 지내다 보니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황태자는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하고 지나갔다. 눈길 한번 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제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니 당황스러웠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태자가 저럴 리가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페르데스는 속으로 황태자를 경계하면서도 겉으론 백치 황자의 이름에 걸맞게 헤벌쭉 웃었다.
“쯧.”
그런 페르데스가 못마땅한지 황태자는 대놓고 혀를 찼다.
‘날 구슬리려는 목적은 아니군.’
만약 그렇다면 좋은 사람인 양, 인자하게 웃으며 다가왔을 것이다.
아델 레오폴드처럼.
그녀를 생각하니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시 아델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도 아델 레오폴드가 좋으냐.”
황태자가 말을 거는 바람에 다시 그를 쳐다보긴 했지만.
황태자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아델과 제 앞의 페르데스를 번갈아 쳐다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너에겐 아까운 영애다. 반푼이인데다가 백치인 너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곧 노골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그녀가 왜 너 같은 놈을 선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려진 것처럼 정말 너한테 반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아델은 수많은 황자 중 페르데스를 선택한 이유가 그의 순수한 면모에 반해서, 라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그래서 더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처럼 그건 아닐 거라고, 어림짐작으로 부정하는 게 전부였다.
“자.”
황태자가 내민 건 보라색 액체가 든 잔이었다.
“부황 폐하께서 네 약혼을 축하하며 내린 것이니 마셔라.”
독이 든 건 아니겠지.
페르데스는 불안한 눈으로 잔에 든 음료수를 쳐다봤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닌 이상 독이 든 음료를 이렇게 대놓고 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얼른 마시지 않고 뭐 하는 거지?”
페르데스가 잔을 쳐다보기만 하자 황태자가 짜증을 내며 그의 손에 억지로 잔을 쥐여 주었다.
“얼른 마셔.”
“…….”
강요하니 불안감이 더 커졌다.
페르데스는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거부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억지로 음료수를 마셨다.
꼴깍, 음료수 특유의 달콤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가 사라졌다. 다행히 역하지는 않았다.
황태자는 페르데스가 음료수를 다 마시자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휙 가 버렸다.
이만 가 보겠다든가, 약혼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 같은 건 없었다.
‘진짜 음료만 주러 온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직접 오는 게 아니라 하인을 보내도 됐을 텐데.
황제가 하사한 음료라 어쩔 수 없이 직접 전해 주러 온 건가?
‘모르겠네.’
자아가 생겼을 때부터 눈칫밥을 먹고 살았던 만큼,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읽는 데 꽤 능숙하다 자부했다.
그러나 황태자와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건 저 여자도 마찬가지지.’
아델 레오폴드.
그녀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페르데스는 입술에 남은 음료의 잔여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아델을 쳐다봤다.
때마침 아델도 페르데스를 보고 있었다.
아델은 페르데스와 눈이 마주치자, 눈매를 초승달처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
그 순간, 페르데스는 심장 쪽에 화살이 관통하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고 고개를 휙, 돌렸다.
* * *
왜 고개를 돌리는 거지?
내가 웃는 모습이 이상했나?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고개를 돌릴 필요는 없잖아.
조금 상처를 받긴 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툭툭, 가볍게 털어 내면 금방 사라진다.
그것보다 황태자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한데.
슬슬 페르데스에게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쪽으로 향하려는데, 귀족들이 내 앞길을 막았다.
“레오폴드 영애, 오랜만이에요. 데뷔탕트 이후 처음 뵙는군요.”
“안녕하십니까, 영애. 저는 랑쇼 백작가의…….”
하아, 또 시작이군.
일면식도 없거나, 데뷔탕트 때 잠깐 얼굴을 본 게 전부인 귀족들이 친한 척하며 말을 거는 건 몹시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훗날, 내가 공작위를 잇고자 할 때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적당히 친분을 쌓아 두는 게 좋았다.
그렇게 하나둘씩 인사를 받아 주다 보니 끝이 없었다.
이제 와서 무시하고 그냥 가자니, 레오폴드 영애는 사람 차별한다고 소문이 날까 봐 그러지 못하고 전부 받아 주었다.
덕분에 내 이미지는 좋아졌지만 그만큼 피로도가 쌓였다.
이만 방에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그러나 피로연이 끝나지 않아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2황자에서 4황자로, 결혼식에서 약혼식으로 바뀌었는데 피로연 규모는 왜 그대로인 거야.
내심 방에 일찍 돌아가서 푹 쉬는 결말을 기대했던 터라 실망이 컸다.
변하지 않은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방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가씨.”
하녀가 안내해 준 방은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서와 첫날밤을 보냈던 그 방이었다.
날 이곳으로 안내했다는 건 설마 페르데스랑 첫날밤을 보내라는 의미인가?
‘설마 아니겠지.’
나와 페르데스는 결혼이 아닌 약혼을 한 거였다.
게다가 페르데스는 첫날밤 같은 걸 보내기엔 어렸다.
“……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이었던 걸까.
나는 침대 머리 끝에 웅크려 앉아 있는 페르데스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어린 소년을 첫날밤을 보내라고 밀어 넣다니.
황제가 정신이 나간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럼 내가 마신 음료나 먹은 음식에 약을 탔겠지?’
첫 번째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올라 기분이 확 나빠졌다.
잊고 싶어도 한번 떠오른 지독한 악몽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하필 내가 있는 곳이 그 방이라 더욱 선명하게 상기되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당장 이 불쾌한 방을 나가야겠어.
페르데스와 첫날밤을 보낼 생각도 없었기에 나가려고 했는데.
덜컹-
“하.”
문이 바깥쪽에서부터 단단히 잠겨 있었다.
“당장 이 문 열어.”
쾅쾅-
“문 열라고!”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아무리 소리쳐도, 굳게 닫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렁줄을 잡아당겨도 요지부동이다.
황제가 내일 아침까지 이 문을 절대 열지 말라고 명령한 거겠지.
“후우.”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룰 수 없는 바람이었기에 포기하고 돌아섰다.
안 그래도 피로연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가망이 전혀 없는 일에 쓸데없이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첫 번째 생에서처럼 황제가 내게 약을 먹였어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알도르 경에게서 미리 해독제를 받아 뒀으니까.
약혼식장에 들어가기 전, 알도르 경이 내게 줬던 그 작은 환이 바로 해독제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어금니 안쪽에 숨겨 두었던 환은 많이 녹아 콩알만 해졌다.
혹시 모르니 계속 가지고 있을까.
조금이라도 낌새를 보이면 그때 삼켜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잘못……했어요.”
망부석처럼 침대 머리맡에 계속 웅크려 앉아 있던 페르데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