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때 반푼이이되, 반푼이가 아닌 척 연기하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정상인보단 지능이 모자라지만, 누군가 가르쳐 주고 알려 주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은 된다는 걸 황제에게 어필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럼 황제가 페르데스에게 특별한 임무를 내려 줄 거라고 아델은 말했었다.
페르데스는 아델과 헤어진 뒤에도, 몇 번이나 그녀의 말을 되새기며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괜히 그랬다가 눈치 빠른 황제가 백치 황자인 척 연기한 걸 알아채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고.
그래도 일단 아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황제한테 인사할 때 말은 더듬어도 자세는 완벽하게 했던 거였다.
질문을 적당히 틀리거나 모르는 척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런다고 황제가 정말 특별한 임무를 내려 줄까?’
궁금했다.
보아하니 아델은 그 임무가 뭔지 알고 있는 것 같고, 복수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더 알고 싶었다.
도대체 뭐길래…….
“약혼식이 끝나면 넌 아델 레오폴드와 함께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가게 될 거다.”
페르데스는 다이몬이 입을 열자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곳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한 가지다.”
그런 페르데스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이몬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황실과 레오폴드 공작가의 피를 이은 아이를 만들어라.”
* * *
결혼식 때는 무조건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하지만, 약혼식 때는 드레스 색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래도 보통은 베이지나 베이비 핑크같이 옅은 색상을 입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선택한 드레스의 색은 검은색이 섞인 붉은색이었다.
내가 붉은 드레스를 선택하자 하녀들은 하나같이 놀라며 내게 되물었다.
“정말로 약혼식 때 이 드레스를 입으실 건가요, 아가씨?”
“이 드레스는 너무 눈에 띄지 않나요? 약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부 아가씨만 쳐다볼 것 같은데요.”
“그거 좋네. 약혼식 땐 내가 주인공이니까, 다들 나만 봐 줬으면 했는데. 적절한 의상을 골랐어.”
내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하자 하녀들은 떨떠름해하며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약혼식 당일.
나는 전날 미리 선택해 뒀던 붉은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이게 어울릴까?”
“드레스가 화려하니까 액세서리는 조금 수수하게 가도 될 것 같은데.”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내 치장을 도왔다.
“아가씨 생각은 어떠세요?”
“이 목걸이와 저 목걸이 중 어느 쪽이 더 좋으세요?”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전부 예쁘고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게 대답한 건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하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하나만 선택해 보세요.”
“역시 이쪽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건 너무 수수하다니까.”
“알았어. 저거로 하자.”
뭘 해도 정말 상관없었지만,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면 싸울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
“그럼 반지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팔찌는요?”
“신발은 이거 어떠세요, 아가씨?”
“그것보다 이게 더 예쁘다니까!”
……그냥 싸우도록 내버려 둘 걸 그랬나.
선택을 한번 하고 나니 계속해야 했다.
이에 조금 짜증이 나기 직전, 하녀장인 소피아가 눈치껏 하녀들을 말렸다.
“곧 약혼식이 시작되니, 쓸데없는 토론은 그쯤하고 얼른 준비를 끝내자꾸나.”
“어머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얼른 마무리해야겠어요!”
시간을 확인한 하녀들은 하나같이 놀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약혼식 준비가 끝나 갈수록 내 시선은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아닌 문으로 향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혹시 늦는 건 아니겠지?
그럼 곤란한데.
똑똑-
다행히 그건 아닌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여라.”
당연히 ‘그’일 거라고 생각해서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들인 건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립니다, 영애.”
바로 3황자, 이안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아닌 반푼이에 백치인 4황자를 선택할 수 있냐며 분개했던 체르노서와 달리, 이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레오폴드 영애와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전부 잠시 물러가라.”
그랬는데 뒤늦게라도 내게 뭐라고 할 생각인 걸까.
그렇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하녀들에게 물러가라고 할 리가 없었다.
내가 경계하며 쳐다보자 이안이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둘째 형님처럼 패악을 부리려고 찾아온 게 아니니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왜 찾아온 거죠?”
“4황자와의 약혼을 축하할 겸, 영애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전자는 핑계고 후자가 진짜 목적이라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알 수 있었다.
“제게 묻고 싶은 게 뭔가요?”
“정말로 4황자와 약혼할 겁니까?”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그럴 생각이니 제가 여기 앉아 있는 게 아닐까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대화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는 뜬금없는 대답에 나는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이안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뭐 때문에 4황자를 선택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네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이안을 쳐다봤다.
“제가 왜 4황자 전하를 선택했는지 모르신다면서, 절 도와주겠다고요?”
“네. 4황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잘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오만을 떠는 건 황족의 특성인 걸까.
페르데스는 그렇지 않았던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 절 선택하세요, 레오폴드 영애. 그러는 편이 레오폴드 영지와 영애를 위해서라도 더 나을 겁니다.”
“그걸 판단하는 건 전하가 아닌 저입니다.”
이안에게 그가 끼어들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어필하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제가 4황자 전하를 선택한 건, 그분이 정말로 좋아서 그런 거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안이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팍 썼다.
“영애처럼 고귀하게 자란 사람이 한낱 백치 따위에게 반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그게 사실이지만 황자 전하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정말 유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이안이 매섭게 날 노려봤다.
여전히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테니까.
그러나 이안에게도 말한 것처럼 그가 믿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그는 내가 원하는 걸 절대 이뤄 줄 수 없다는 거였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곧 약혼식이 시작돼서 얼른 준비를 끝마쳐야 하거든요.”
“…….”
이안은 말없이 날 노려보다가 밖으로 휙 나갔다.
당연하지만 약혼을 축하한다는 겉치레 인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이안이 나가고, 하녀들이 다시 들어왔다. 이안에게 시간을 빼앗긴 만큼 그들은 좀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약혼식장에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걸 가지고 왔습니다.”
알도르 경은 하녀의 눈을 피해 내 손에 종이에 싼 작은 환을 쥐여 주었다.
이 환이 바로 내가 알도르 경을 애타게 기다렸던 이유였다.
“수고했어요, 알도르 경.”
나는 이만 물러나도 좋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알도르 경은 나가지 않고 물끄러미 날 바라봤다. 할 말이 무척 많아 보이는 시선이었다.
내가 왜 이걸 구해 달라고 했는지 궁금한 거겠지.
알도르 경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듣는 귀가 많아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설명하기엔 복잡하기도 했고.
“나가 봐요.”
계속 그를 곁에 두면 하녀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강제로 내보냈다.
그리고 사탕을 먹는 척 환을 입에 넣어 어금니 안쪽에 숨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척, 태연하게 앉아 있는데 소피아가 보고했다.
“아가씨, 페르데스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결혼식 때는 신랑이 먼저 입장하고 신부는 나중에 부친의 손을 잡고 입장하지만, 약혼식 때는 함께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즉, 이제 약혼식장에 갈 시간이라는 의미.
앉아 있느라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자 엉거주춤 서 있는 4황자, 페르데스가 보였다.
그는 덥수룩했던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제 몸에 딱 맞는 화려한 연회복을 입고 있었다.
요즘 잘 먹어서 그런지 살도 통통하게 올라 제법 귀공자 느낌이 났다.
“아, 안녕.”
저 바보스러운 연기만 없었다면, 진짜 귀공자 같았을 텐데.
약간의 아쉬움을 삼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황자 전하.”
“으, 으응.”
페르데스가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자 그의 전속 시종이 말했다.
“전하, 여기서 레오폴드 영애에게 손을 내미셔야 합니다.”
“아, 아, 맞아. 그, 그랬었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페르데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진짜 연기 잘한다니까. 새삼 감탄하며 그가 내민 손에 내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 상태 그대로 그의 옆에 다가가 서는 순간, 페르데스가 내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네 손을 잡은 걸 후회해.”
돌아보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황금색 눈동자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랑이를 피하려다 오히려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거든.”
“……그래서 이 손을 놓고 싶으신가요?”
그렇다고 해도 놓아줄 생각은 없지만, 그의 생각을 알고 싶어 물었다.
“아니.”
페르데스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가볍게 얹은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이왕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호랑이를 잡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