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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262)

31화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페르데스는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쓰러졌다.

“전하!”

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페르데스를 부축했다.

체르노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는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소리 지르는 걸 들은 건지 알도르 경이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나는 페르데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알도르 경에게 명령했다.

“2황자 전하께서 물러가신다고 하니 배웅해 드리세요, 알도르 경.”

티끌만큼이나마 양심이 남아 있는 건지, 아니면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좋다고 판단한 건지 체르노서는 군말 없이 나갔다.

나는 하녀에게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뒤, 페르데스의 뺨을 살폈다.

페르데스의 뺨은 누가 봐도 맞은 티가 날 정도로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체르노서가 끼고 있는 반지에 긁힌 건지 기다란 생채기도 보였다.

그나마 깨끗한 피부가 볼 만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화가 나고 속상했다.

내가 생채기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닦아 내자 그가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옷 더러워져.”

“지금 옷이 더러워지는 게 문제인가요?”

그가 멀어진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가만히 있어요.”

소매가 더러워져도 개의치 않고 피를 닦아 낸 뒤, 하녀가 가지고 온 차가운 물수건을 뺨에 댔다.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차가워.”

그러길래 왜 나섰냐고 말하려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순화했다.

“전하께서 나설 필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 영애가 맞잖아.”

“제가 맞는 게 나았어요.”

그래야 체르노서에게 맞은 것 이상으로 돌려줄 수 있었을 테니까.

“영애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음부터는 절대 나서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말했다.

“난 역시 내가 대신 맞는 게 맞다고 생각해.”

바닥을 응시하던 황금색 눈동자가 내 모습을 담았다.

“이름뿐이긴 해도…….”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입술의 끝이 슬쩍 올라가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난 영애의 약혼자니까. 약혼자는 약혼녀를 지켜야 하는 거잖아.”

“……!”

“그게 맞는 거잖아.”

누군가 내 목을 움켜쥔 것처럼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뺨에 차가운 물수건을 대고 있는 것뿐이었다.

* * *

페르데스는 아델과의 약혼이 정해지자마자, 마구간지기 숙소에서 봄의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건 잭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만 해도 잭은 천한 신분의 마구간지기였지만, 이젠 황자의 전속 하인으로서 그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황제는 페르데스에게 전속 시종과 더불어 황실 예절, 역사 등 간단한 교육을 위해 선생을 붙였다.

페르데스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데다가, 그가 백치라는 걸 고려해서 교육 수준은 굉장히 낮았다.

사실은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페르데스가 한 시간이면 모두 습득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 어, 어려워.”

그러나 백치라면 알아듣지 못했을 테니, 페르데스는 매번 모르는 척 연기했다.

아직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7황자도 이것보단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니 아무리 백치라고 해도 16살이나 된 페르데스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을 법도 한데, 선생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애초에 그가 알아들을 거라고 기대 자체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페르데스에게 이건 꼭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게 있었으니, 바로 황제의 풀네임과 그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황자 전하께선 폐하의 아들이시자 제국민이니 어떤 경우라도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하셔야 합니다.”

“으, 으응.”

“제 말을 알아들으셨으면 10번 복창하십시오.”

선생은 교육을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이 마음가짐을 10번씩 복창하게 했다.

이건 황자 교육이 아니라 사상 교육인 것 같은데.

페르데스는 속으로 별 미친 짓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론 선생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따라 했다.

교육 시간은 2시간이었고, 선생은 2시간이 지나면 칼같이 수업을 끝내고 나갔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교육이 끝나고, 선생이 나가자 페르데스는 늘어지도록 소파에 누웠다.

잭이 테이블을 치우며 페르데스에게 물었다.

“많이 힘드세요?”

“응.”

백치인 척 연기하는 거나 아는 걸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건 쉬웠지만, 그 망할 사상 교육은 정말 힘들었다.

황제에게 충성하겠다고 입에 담을 때마다 내가 왜 이래야 하나 짙은 자괴감이 들었다.

“역시 그 여자의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나…….”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잭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믿기 때문에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잭이 이제야 자신이 행복을 찾은 것 같다며 순수하게 기뻐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르데스는 잭을 레오폴드 공작령까지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자신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는데, 그 먼 곳까지 데리고 가서 고생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잭은 모르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페르데스는 돌아누웠다.

그런 페르데스의 뒷모습을 흘끗 보던 잭이 제안했다.

“기분이 안 좋으시면 아가씨를 만나러 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페르데스는 그제야 잭을 돌아봤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내가 기분이 안 좋은 거랑…….”

습관적으로 ‘그 여자’라고 말할 뻔한 페르데스는 순간 멈칫했다가 정정했다.

“레오폴드 영애를 보러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야 전하께선 아가씨를 뵙고 오면 항상 기분이 좋으셨잖아요.”

“그런 적 없는데?”

“그러셨어요.”

“없다니까.”

“그러셨다니까요.”

“아, 됐어. 말을 말자.”

페르데스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고개를 돌리자 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니까 최근에 아가씨께서 전하를 찾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건 또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페르데스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격하게 돌리며 다시 잭을 쳐다봤다.

잭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발 아가씨한테는 툴툴거리지 말고 잘해 주세요. 전하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구해 주는 은인이시잖아요.”

구해 주긴 무슨. 서로의 필요를 위해 손을 잡은 건데.

할 수 없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최근에 아델이 페르데스를 찾지 않는 건, 그가 툴툴거리거나 그래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페르데스가 아델과 만난 건 체르노서가 찾아온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아델은 헤어지기 직전, 페르데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사이가 좋은 것도 좋지만, 너무 좋으면 황제가 파고들 틈이 없을 테니 약혼식 전까지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제가 파고들 틈?”

“네. 황제는 아마도 약혼식 전날에 전하를 찾을 겁니다. 그럼 전하께선 그때…….”

똑똑-

불현듯 들리는 노크 소리에 과거의 잔상에서 깨어난 페르데스가 문을 쳐다봤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전속 시종이었다. 말이 전속 시종이지, 그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황제나 황후, 혹은 황족 중 누군가의 말을 전해 주러 오는 게 전부였다.

즉, 그가 들어왔다는 건 누군가의 말을 전해 주러 왔다는 의미.

전속 시종이 약간 고개를 숙이며 그가 들어온 까닭을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황자 전하.”

내일이 페르데스와 아델의 약혼식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날 찾는단 말이지.’

황제는 페르데스가 아델과 약혼한 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다.

전속 시종을 통해 종종 말을 전하긴 했어도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찾는다는 게, 하필 아델이 예상한 딱 그날 찾는다는 게 놀라웠다.

이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가시지요, 전하.”

“……그래.”

페르데스는 찝찝한 기분을 삼키며 전속 시종을 따라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시종은 황제의 궁으로 가는 내내 황제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입이 닳도록 말했다.

황제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만약 페르데스가 잘못하면 어떻게 될지 무섭게 말하며 실수하지 말고 잘하라고 엄포도 놓았다.

“제 말, 알아들으셨습니까?”

“으, 응.”

“어휴, 하나도 못 알아들었네.”

시종은 몹시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황제가 기다리는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황제에게 페르데스가 온 걸 보고했다.

페르데스는 지금까지 살면서 황제를 딱 두 번 봤다.

첫 번째는 알현실에서 아델이 그를 남편감으로 선택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바로 지금이었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처음 그를 봤을 때보단 긴장되지 않았다.

황제가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것만큼 무섭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인상이나 눈빛, 그리고 뿜어내는 기백은 확실히 범상치 않았지만, 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섭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냥 적으로 두면 참 피곤한 상대겠구나, 싶은 정도였다.

페르데스는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격식을 차리고 인사했다.

“폐, 폐하를 뵙습니다.”

비록 말은 더듬었지만, 자세는 완벽했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런 페르데스를 바라보는 다이몬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완전히 모자란 건 아니란 말이지.”

다이몬은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페르데스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페르데스가 가까이 다가가자 다이몬은 그를 위아래로 쭉 훑어본 뒤, 뜬금없는 걸 물었다.

“내 이름이 뭐지?”

황제가 물었다고 해도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 건, 상당히 불경한 짓이었다.

“다, 다이몬 드 빈, 빈센트 아타나시우스 입니다.”

그런데 페르데스는 더듬더듬 다이몬의 이름을 말했다.

“제국의 수도가 어디지?”

“연합국은 몇 개의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지?”

“성국의 교황 이름이 뭐냐.”

이에 다이몬은 불쾌한 티를 내는 대신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이것저것 물었다.

대부분 선생이 가르쳐 준 것들이었다.

페르데스는 전부 답을 다 알지만, 백치 연기를 해야 하기에 몇 개는 모르는 척하거나 틀리게 대답했다.

“흐음.”

마침내 질문을 끝낸 다이몬은 턱을 쓰다듬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페르데스는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서 있으면서 아델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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