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 남자는 알까.
덩굴장미보다 홀로 핀 장미가 제 몸을 지키기 위해 가시가 더 많다는 걸.
“감사합니다.”
“이제 곧…….”
“황제 폐하께서 곧 도착하십니다!”
체르노서가 뭘 말하려는 그때, 시종이 황제가 오는 걸 알렸다.
체르노서는 아쉬워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 직후 황제가 황후와 세 명의 황비들을 데리고 알현실로 들어왔다.
가장 상석에 자리를 잡은 황제는 귀족들을 쭉 훑어본 뒤, 나를 호명했다.
“아델 레오폴드는 앞으로 나오도록.”
나는 붉은 레드 카펫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가 그 끝에 섰다.
“아델 레오폴드,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리고 격식에 맞춰 인사한 뒤, 황제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황제가 흐뭇하게 웃었다.
“영애가 짐에게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 말했다.
“결혼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황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빛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암, 그래야지. 드디어 레오폴드 영애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기쁘군.”
당연히 잘 알고 있지. 그 빌어먹을 마음 때문에 무려 3번이나 당신 손에 죽었으니까.
새삼 이전 생에서 그에게 당했던 일들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입 안이 약초라도 씹은 듯 썼다.
나는 그 모든 걸 삼키며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화려한 꽃잎 속에 가시와 독을 감춘 내 미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는 더욱 흐뭇하게 웃었다.
“영애와 레오폴드 영지의 빠른 안정을 위해 속히 결혼식을 치러야겠군. 그래야 레오폴드 공작도 편히 눈을 감을 테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부황 폐하.”
황좌 바로 아래 서 있던 황태자가 황제의 말을 두둔하고 나섰다.
“체서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낸 상태입니다. 오래전부터 어서 빨리 레오폴드 영애와 결혼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죠.”
“형님, 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황태자의 옆에 서 있던 체르노서가 수줍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황제와 같은 탐욕이 가득했다. 온정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나,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가 탄생하겠군요.”
황제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황후가 한마디 거들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도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황자 전하. 레오폴드 영애.”
“두 분이 결혼하시면 올해 최고의 경사군요.”
“아이는 몇 명이나 낳으실 겁니까? 당연히 둘 이상은 낳으시겠지요?”
사람들은 벌써 나와 체르노서가 결혼을 한 것처럼 웃으며 떠들었다.
“내가 레오폴드 공작이 된다면 제국을 위해 힘쓰겠소.”
체르노서는 이미 레오폴드 공작이 된 것처럼 굴었고, 황후는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과자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차부터 마신다는 누군가의 명언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어 절정에 달했을 무렵, 입을 열었다.
“제가 결혼할 분은 2황자 전하가 아닙니다.”
내가 툭 던진 말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귀족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서로를 바라봤고, 체르노서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졌다.
황태자와 황후는 물론 다른 황자들과 황녀들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가 숨죽인 채 나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
“……그게 무슨 소리지, 레오폴드 영애?”
황제가 황금색 손잡이를 부술 것처럼 세게 움켜쥐며 물었다.
“조금 전에 결혼하겠다고 영애의 입으로 말했을 텐데?”
“네,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체르노서 전하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하.”
황제가 몹시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차더니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살벌하게 쏘아붙였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린 겁니다.”
첫 번째 생의 나였다면, 황제가 무서워서 벌벌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 번의 끔찍한 지옥과 죽음을 경험한 지금의 내겐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설마 벌써 저와 한 약속을 잊으신 겁니까, 폐하.”
나는 당당하게 황제의 시선을 받아치며 말을 이었다.
“누구와 결혼할지 제게 선택권을 주신다고 하셨지요.”
“……그랬었지.”
황제가 떨떠름해하는 게 길게 늘인 말꼬리에서 느껴졌다.
‘그러길래 말조심을 했어야지.’
미리 각서를 받아 둔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만약 각서를 쓰지 않았다면 황제는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를 뗐을 테니까.
“그 뒤로 며칠 동안 누구와 결혼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2황자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제가 영애와 결혼하기 부족하다는 의미입니까?”
체르노서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따지듯이 내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쪽으론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오로지 황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결혼 상대로 선택한 분은 다른 분입니다.”
“내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레오폴드 영애!”
“조용히 하라, 2황자.”
황제가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체르노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 공백을 채운 건 1황비였다.
“그럼 3황자인가요?”
1황비는 내가 그녀의 소생인 이안과 결혼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레오폴드 공작가의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쩌지. 난 당신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3황자 전하도 아닙니다.”
“아, 그런가요.”
눈에 띄게 실망하는 꼴이 우습고 시커먼 속내가 훤히 보여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황자 중 혼기가 꽉 찬 두 황자가 아니라고 하니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황제도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설마 7황자는 아니겠지?”
“설마요. 제가 10살도 안 되신 어린 7황자님을 결혼 상대로 선택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도대체 누구지?”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를 주시하고 있는 좌중을 쭉 훑어봤다.
황태자를 지나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내 시선이 멈춘 곳은 가장 끝이었다.
그곳엔 엄숙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방실방실 웃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바로 4황자, 페르데스였다.
언제 자른 건지 알 수 없는 덥수룩한 머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잔뜩 뻗쳐 있었고, 옷차림도 초라했다. 흔한 장신구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나이가 훨씬 어려 보이는 황자나 황녀들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는데 페르데스는 산만하게 손을 꼼지락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이런 곳에서도 백치 연기를 정말 잘한다니까.
나는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제가 결혼할 분은 바로 이분이십니다.”
아까와 다른 의미로 알현실이 조용해졌다.
귀족 중에는 너무 놀라 체면도 잊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황제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경악과 혼돈 그리고 당혹스러움으로 물든 얼굴은 여러 의미에서 볼 만했다.
그 얼굴은 점차 굳었고, 종국엔 완전히 일그러졌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겐가, 레오폴드 영애!”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흡사 사자가 포효하듯이 알현실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황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찌 황제 폐하와 장난을 치겠습니까.”
“그럼 진심이라는 건가?”
숙인 머리 위로 황제의 살벌한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로 4황자 결혼할 생각이냔 말이다!”
“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저, 아델 레오폴드는 제국의 4황자이신 페르데스 드 빈센트 아타나시우스 황자 전하와 결혼하기를 원하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황제가 입을 다물면서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뜻밖에도 황후였다.
마찬가지로 충격에 빠져 있던 황후가 억지 미소를 그리며 내게 말했다.
“레오폴드 영애가 모르는 것 같아 말하는데 4황자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내 대답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은 듯 황후는 입을 다물었다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게다가 4황자는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결혼을 할 수 없는 나이지요.”
“괜찮습니다. 올해 황자 전하의 나이가 16세이시니, 일단 약혼부터 하고 2년 뒤에 결혼식을 치르면 되니까요.”
“그럼 그동안 레오폴드 공작의 자리를 비워 둬야 할 텐데요.”
이번엔 1황비가 나섰다.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레오폴드 공작가와 영지민들을 생각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레오폴드 공작을 정해야지요, 영애.”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고작 2년을 더 비워 둔다고 흔들릴 만큼 레오폴드 공작가는 약하지 않습니다, 황비 전하.”
어쩜 하나같이 예상한 태클만 거는지 반박하기가 너무 쉬웠다.
“그리고 어떤 황자 전하께서 공작이 되든 간에 공작가의 일에 적응하시는 몇 년 동안은 실무에 나서지 못하실 테지요. 하니 2년 늦게 정해진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습니다.”
억지 논리를 펼치거나 과장을 하는 게 아닌 전부 있는 사실만 말하니 황비도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마를 짚고 고민에 빠진 황제를 돌아봤다.
생각보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지만,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무조건 허락해 줄 거야.’
각서를 썼으니까. 그 각서에 기간이 있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다.
조건도 ‘황자’면 누구나 다 된다고 했으니, 4황자‘만’ 안 된다고 반대하지 못할 터.
페르데스가 백치인 걸 걸고넘어진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글쎄.
난 오히려 황제가 그것 때문에 더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 침묵하며 황제의 대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한참 고민하던 황제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결혼을 허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