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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262)

28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페르데스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황족 대접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구나.

좋은 마음가짐이네.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만약 페르데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그를 선택한 걸 조금 후회했을 것이다.

내 계획에 권력욕이 있는 사람은 필요 없었으니까.

“우선 황제에게서 전하와의 결혼 허락을 받고, 같이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갈 겁니다.”

“시작부터 난도가 상당한데.”

페르데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팔짱을 꼈다.

“황제가 허락해 줄 리가 없잖아. 무엇보다 내가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았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어떻게 잊겠어요.”

나는 그의 왜소한 몸을 전체적으로 훑어본 뒤, 옅게 웃었다.

내 시선과 웃음이 의미하는 바를 단번에 알아챈 페르데스가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난 아직 성장기야.”

“그러시군요.”

“시간이 지나면 쑥쑥 클 거라고.”

“부디 그러시길 바랍니다.”

“…….”

맞장구를 쳐 줬는데도 불만인지 페르데스는 입술을 실룩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마음도 어리네. 웃음이 나왔지만, 또 웃으면 페르데스가 삐질 것 같아 애써 삼키며 말했다.

“황제에게 결혼 허락을 받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부분이라면 미리 준비해 두었으니까요.”

“자신만만하네.”

“그럼요.”

내가 괜히 황제에게 각서를 받아 둔 게 아니었다.

“그럼 내 나이는 어떻게 할 거지? 이건 법으로 정해진 거라 황제라도 마음대로 못 바꾸는데. 설마 2년 뒤에 황제한테서 결혼 허락을 받겠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그때까지 황제가 기다려 줬다면, 페르데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약혼부터 하고 결혼하는 건 전하께서 성년식을 치른 뒤에 하겠다고 황제에게 말할 겁니다.”

“약혼이라.”

페르데스는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픽 웃었다.

“그 말은 내가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복수를 끝내겠다는 거군.”

“네.”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 만큼 시간이 좀 더 넉넉하면 나야 좋겠지만.

황제가 마냥 손 놓고 기다려 줄 리가 없으니 무조건 그 안에 끝내야 했다.

그러니까.

“황자 전하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진지하게 말하자 페르데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느슨하게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상체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내가 어떤 역할을 해 줘야 하는 거지?”

“황제의 편인 척 연기하면서 그의 계획을 제게 알려 주면 됩니다.”

“……뭐?”

페르데스가 제 귀를 의심하며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이중 첩자 노릇을 하라는 건가?”

“네.”

“설마 네 복수 상대가 황제야?”

“그렇습니다.”

“하?”

페르데스는 몹시 당황한 듯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짚었다.

“반역을 하려고 하다니. 미쳤군. 그래서 나보고 결혼하자고 한 건가? 날 황제로…….”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전 황자 전하를 황제로 추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반역을 저지를 생각도 없고요.”

반역이란, 황제의 뜻에 거역하며 그의 자리를 빼앗는 걸 의미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었다. 완전히 부숴 버리는 거지.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못하게.

뭐, 내 계획이 실패한다면 그땐 황제와 함께 저승길로 가는 걸 선택하겠지만, 일단은 아니었다.

페르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보며 물었다.

“확실히 반역은 아니라는 거지?”

“아닙니다.”

“날 황제로 추대할 생각도 없고.”

“소설을 많이 보신 것 같네요.”

페르데스와 손을 잡긴 했지만, 그에게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같은 길을 걷고 있어도 언젠가는 서로 다른 길을 갈 테니까.

혹 일이 틀어졌을 때, 그에게까지 연대 책임을 묻게 하지 않으려면 그는 모르는 편이 나았다.

내가 말을 아낀 덕분에 외려 내 말을 믿을 수 있는지 페르데스가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을 풀며 크게 숨을 뱉었다.

“그래도 이중 첩자는 너무 어려운 일인데.”

“전하께선 하실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전하께선 16년 동안 백치 황자인 척, 연기하며 모두를 속이셨잖아요.”

“그랬었지. 너한테 허무하게 들켰지만.”

“덕분에 이렇게 같은 편이 됐잖아요. 신께서 우리를 이어 주려고 일부러 자리를 만드셨나 봐요.”

나는 진지하고 복잡한 이야기 때문에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고자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게 통했는지 굳었던 페르데스의 얼굴이 완전히 풀렸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말은 참 잘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이야.”

페르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일주일 안에 황제한테 결혼 승낙을 받을 거라고 했지? 그때 난 뭐 하면 되지?”

* * *

서로 할 말이 많은 만큼 오래 걸릴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밤을 꼬박 지새울 줄이야.

페르데스는 알도르를 따라 마구간지기 숙소로 돌아가면서 아델과 나눴던 대화들을 되짚어 봤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만큼 되짚어 볼 게 많았다.

아델이 복수할 대상이 황제라는 건 조금 놀라웠다.

페르데스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고이 자란 그녀가 황제에게 악감정을 가질 만한 일이 뭐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말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너무 깊이 관여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금 딱 이 정도 관계가 좋았다.

그래야 모든 게 끝났을 때, 먼지를 털어 내듯이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단지 아델이 자신에게 바라는 게 생각보다 너무 크고 막중해서 부담스럽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아델의 손을 잡은 걸 후회하진 않았다.

그녀가 기대하는 만큼 잘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될 뿐.

‘무조건 잘해야지.’

그래야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사이 어느덧 마구간지기 숙소에 도착했다.

주변을 살피며 앞서 걸어가던 알도르가 페르데스를 향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전하.”

그 태도는 그를 데리러 왔을 때와 똑같아 보였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아까보다 좀 더 불손해졌고, 불만이 묻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근소한 차이였으나, 오랫동안 눈칫밥을 먹고 살아온 페르데스는 단번에 알아봤다.

“불만이 있으면 말해.”

알도르가 바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없긴. 아무리 봐도 불만이 가득한데.

아까 아델이 그를 강제로 내보낸 것 때문에 그런 걸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아닌 아델에게 화를 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러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혹시 내가 그 여자랑 결혼하는 게 싫어?”

정곡이었는지 알도르의 표정이 좀 더 딱딱하게 굳었다.

알도르는 입술을 일자로 굳히며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레오폴드 공작의 자리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요컨대 나는 ‘아무나’라는 거군.

더불어 페르데스가 아델의 짝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돌려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그 부분은 페르데스 역시 인정했다. 아델도 복수가 아니었다면 자신을 결혼 상대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숙소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한 마디는 해 줘야 할 것 같다.

페르데스는 들어가기 직전, 고개만 돌려 알도르를 쳐다봤다.

“너도 레오폴드 공작의 자리에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겠지?”

* * *

복수라는 이름의 기다란 실에 첫 번째 구슬을 꿰었으니, 이제 다음 구슬을 넣을 차례였다.

하여 나는 이안이 아닌 체르노서에게만 시간을 쏟아부었다.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니, 황제에게 가장 큰 실망감을 안겨 주기 위한 단계였다.

황제는 내가 체르노서와 결혼하길 바랐으니까.

황궁 안에는 내가 곧 체르노서와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 소문을 들은 이안이 아연실색하며 내게 수없이 만나자고 요청했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그렇게 일주일 뒤, 나는 소피아가 듣는 곳에서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며 말을 흘렸다.

내가 흘린 말은 곧바로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황제는 귀족들을 알현실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내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몇 번째 황자를 남편으로 선택했는지 발표하라고 통보했다.

혹 내가 마음을 바꾸지 못하게 못을 박아 두려는 심보였다.

정말이지…… 이러면 너무 좋잖아.

알현실에 갈 준비를 하는 동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허벅지를 쿡쿡 찔러야 했다.

“후후.”

황제의 부름에 알현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귀족들을 마주했을 때,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다들 환하게 웃으며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과연 내 결정을 듣고도, 저렇게 웃으며 축하한다는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장담컨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여기 있는 그 어떤 귀족도 말이지.

잠시 후, 황자와 황녀들도 도착했다.

“허억.”

“저, 저기 보세요!”

대수롭지 않게 황족들을 보던 귀족들이 일제히 놀란 건 4황자, 페르데스가 들어왔을 때였다.

“저 소년은 4황자 아닌가요?”

“맞는 것 같아요. 눈동자가 금색이잖아요.”

“폐하께서 황족들도 전부 참석하라고 하시긴 했지만, 4황자도 올 줄은 몰랐네요.”

“반푼이라고 해도 일단 황자는 황자니까…….”

놀라 수군거리는 와중에도 비웃음이 섞여 나오는 건, 페르데스의 행색이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평소보단 나았지만, 말 그대로 나은 정도지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페르데스는 4황자이니 서열대로라면 3황자와 5황자 사이에 서는 게 맞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그보다 한참 어린 7황자의 옆에 섰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이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레오폴드 영애.”

체르노서가 내게 말을 걸자 페르데스를 향했던 관심이 한순간 나와 그에게 쏠렸다.

지난날의 일은 모두 잊었다는 듯, 체르노서가 흑심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평소에도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더 아름답군요. 마치 한 떨기의 장미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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